“일본군의 금 도굴해 사업 밑천 마련했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3.06.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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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탁 전 수산그룹 회장, 중국에서 재기 자금 출처 두고 뒷말 무성

이명박 정권이 막을 내리기 직전이던 1월 말 국민적 비난 속에 특별사면이 단행됐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등 대통령 최측근 인사들이 포함돼 논란이 일었는데, 이들 옆에 뜻밖의 이름이 올라와 눈길을 끌었다. 경제인 14명 중 한 명으로 특사 명단에 오른 박주탁 전 수산그룹 회장이다. 한때 잘나가던 중견 그룹 총수였지만 이미 십수 년도 더 지난 일이라 그의 이름이 특사 명단에 오른 게 뜬금없어 보였다.

수산그룹은 김영삼 정부 시절 급성장한 대표적인 PK(부산·경남) 기업으로 꼽힌다. 박 전 회장이 1984년 설립한 특수 중장비 생산업체인 수산중공업이 모태다.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박 전 회장은 경남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왔다. 박 전 회장은 1990년대 들어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수산정밀, 수산스타, 수산섬유기계, 수산정공을 잇달아 설립해 그룹사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중국 저장 성 북쪽 자싱 시에 위치한 수산기계유한공사. 아래는 회사 안내 책자에 동사장으로 소개된 박주탁 전 수산그룹 회장.
한때 11개 계열사에서 연 4600억 매출

1995년 말에는 권력 실세와 가까워 뒷말이 무성하던 중견 건설업체 대호를 인수해 주목받았다. 이 과정에서 뛰어난 자금 동원 능력을 보여 어느 대기업 위장 계열사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수산그룹은 1996년 무선정보통신 사업에도 진출했다. 또, 한보 사태로 부도난 세양선박·대동조선·세양주건 등을 인수해 덩치를 키웠다. 1996년 말 세양선박 계열사를 제외하고도 11개 계열사에서 46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1997년 매출액 목표를 1조3000억원으로 잡는가 하면, 2000년대에는 매출 2조1000억원을 달성해 국내 50대 그룹에 진입한다는 당찬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무리한 확장으로 자금난에 시달린 수산그룹은 1997년 말 외환위기 때 끝내 부도나고 말았다. 주력 기업인 수산중공업·수산특장·수산정밀 등 3개 회사에 대해 법원에 화의신청을 하면서 무섭게 질주하던 수산그룹의 운명도 다했다. 이후 박 전 회장은 공식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2002년 초 한 경제지를 통해 ‘종업원 5000명을 거느린 중견 그룹 총수였던 박 전 회장이 종업원 5명의 소기업 사장이 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런 그가 2013년 1월 말 대통령 특사에 포함된 것이다. 당시 특사와 관련해 ‘저축은행 비리 대상자는 사면 대상에서 뺐다고 했는데, 박주탁의 경우 금융권 비리에 포함돼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법무부 대변인은 “박주탁의 경우 범죄인 인도 과정에서 13개월 동안 중국에서 억류돼 있었다. 현재 남은 형기가 11개월인데 실질적으로 잔여 형기 이상 복역한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박 전 회장은 1995~97년 분식회계를 통해 6개 금융기관에서 993억여 원을 차입해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로 2011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보면 박 전 회장은 범죄를 저지른 지 10년 넘은 후 중국에서 붙들려 1년 가까이 있다가 한국으로 넘겨졌다는 얘기가 된다. 중견 그룹을 이끌다 부도낸 후 자취를 감췄던 박 전 회장. 지난 10여 년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시사저널>은 박 전 회장이 10여 년 전부터 중국에서 사업을 해온 사실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했다. 특히 박 전 회장은 ‘水山(수산)’이라는 회사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해당 업체를 직접 방문하고 왔다는 다큐멘터리 작가 정충제씨를 통해 입수한 ‘수산기계유한공사’라는 이름의 회사 안내 책자에는 박주탁 전 회장이 이 회사의 동사장을 맡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동사장은 중국에서 기업의 대표자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 저장 성(浙江省) 북쪽에 있는 자싱 시(嘉興市)에 위치한 수산기계는 양말 편직기를 생산하고 있다. 한국수산정밀과 기술 합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1990년 박 전 회장이 설립한 섬유기계 제조업체인 수산정밀을 말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박 전 회장은 인사말에서 ‘한국수산정밀은 30년 이상 양말 편직기 연구·개발과 생산·판매를 해왔다. 수산정밀은 양말 편직기 기술의 최고 자리를 지켜왔다’고 밝혔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양말 편직기는 두 종류이며 중국을 비롯해 세계 30개 이상 국가에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수출국 중에는 한국도 포함돼 있다.

중국 정부에서 발행한 이 회사의 외상투자기업기본정황(外商投資企業基本情況)에 따르면 설립 일자는 2003년 4월23일이다. 이 서류는 한국의 법인 등기부등본에 해당한다고 한다. 자금 흐름도 일부 나와 있다. 1차로 미화 60만 달러를 들여왔고 그 뒤로 인민폐 몇십만 원씩을 계속 들여온 것으로 돼 있다. 지분의 경우 한국기술교류주식회사가 33.76%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회사는 박 전 회장이 종업원 5명을 두고 만들었다는 바로 그 회사다. 박 전 회장은 수산기계 외에도 인근에 비단을 짜는 직려방직과 직접 양말을 생산하는 동덕섬유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박 전 회장이 중국에서 회사를 차릴 만한 큰돈을 어디서 마련했느냐는 점이다. 정씨에 따르면, 2001~02년 당시 박 전 회장은 가족이 살던 아파트까지 압류당해 쫓겨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정씨는 이 시기 박 전 회장을 만나 동업했다고 밝혔다. 그는 “채권단에 재산을 다 뺏겼는데 어디서 돈이 나와 직원이 1000명이 넘는다는 회사를 차렸겠느냐”며 자금 출처에 의혹을 제기했다.

정씨는 박 전 회장이 뭉칫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부산 문현동의 일제 어뢰 공장에서 금 도굴에 관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에 문현동 일대에 만들어졌다는 지하 어뢰 공장은 소문이 무성했지만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박 전 회장 회사가 어뢰 공장 굴착 계약”

2010년 <실화 황금백합작전>이라는 책을 출간한 정씨는 “일본군이 중국 각지에서 약탈한 보물을 본토로 옮기려고 하다가 미군이 현해탄을 봉쇄하자 부산 문현동의 지하 어뢰 공장에 은닉했다. 이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징용된 노무자 1000여 명을 함께 매장했다”고 주장해 당시 일제 강점기 피해자 관련 단체에서 정부에 조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기관은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는 근거가 없다며 조사에 나서지 않았다. 이러한 주장을 보물 탐사 사업과 관련한 이권 다툼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 지역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법적 분쟁으로 정씨는 2005년 9월부터 2009년 5월까지 44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정씨는 2002년 탐사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박 전 회장도 이 일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박 회장의 한국기술교류주식회사가 바로 이 지하 어뢰 공장 탐사를 위해 굴착 계약을 한 회사라고 설명했다.

등기부등본을 통해 확인한 결과 한국기술교류주식회사는 2010년 12월1일 해산됐다. 박 전 회장은 2000년 3월부터 2005년 1월까지 이 회사 대표이사를 맡았다. 눈에 띄는 부분은 2000년 3월부터 2003년 3월까지 3년 동안 이 회사의 감사를 맡은 인사가 현재 여당에서 주요 당직을 맡고 있는 국회의원이라는 점이다. 정씨는 박 전 회장의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는 “박 전 회장은 금 도굴을 한 포세이돈 살베지라는 회사의 고문을 맡아 지분 5%를 갖고 있었다. 이 지분으로 중국 사업의 밑천을 마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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