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배우시지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06.1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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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5000억 들인 베를린 신공항, 시스템 오류로 2년간 개항 못 해

터키 반(反)정부 시위의 시작은 정부가 주도한 한 프로젝트에서 비롯됐다. 수도 이스탄불 탁심에 위치한 게지 공원에 주상복합 건물을 올리려는 정부,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농성이 출발점이다. 정부 주도의 개발 프로젝트가 애물단지로 취급받는 일은 비단 터키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에서도 지금 거대하고 호화찬란한 유령 건물이 골칫거리다. 베를린 신공항이 그것이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신공항(BER)의 유지·관리에 소요되는 월간 비용이 4000만 유로(한화 약 600억원)에 달한다. 어느 지방 소도시 예산과 맞먹는 돈이다. 베를린 신공항의 필요성은 동·서독 통일 이후 꾸준히 제기돼왔다. 베를린 지역에 이미 쇠네펠트·테겔·템펠호프 등 세 개의 공항이 있지만 입지와 시설이 좋지 않아 늘어나는 항공 수송 규모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통일된 독일의 수도에 ‘하나의 공항’을 세운다는 상징성도 있었다. 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베를린 중앙역이 세워진 것과 같은 논리다.

텅 빈 유령 건물이 되어버린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신공항. ⓒ EPA연합
5차례 개장 연기로 손실 규모 눈덩이

베를린 신공항은 부지 선정 과정에서부터 지난한 진통을 겪은 끝에 마침내 2006년 9월 착공됐다. 당초 계획된 예산은 17억 유로, 개항 예정일은 2011년 10월께였다. 새 공항이 문을 열면 나머지 공항들은 철거한다는 계획도 세워졌다. 공사가 한창이던 2008년에는 템펠호프 공항이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그러나 신공항은 2년간 다섯 차례나 개항이 미뤄지면서 베를린의 골칫거리가 됐다. 개항일이 미뤄질수록 손해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공항 건설에 든 비용만 당초 예상액인 17억 유로를 훌쩍 넘은 43억 유로다. 경비 인력과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찾는 이가 없는 이 유령 공항은 24시간 불빛이 환하며 에어컨은 ‘풀가동’ 중이다. 전부 자동으로 통제되기 때문에 손을 쓸 수가 없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도 고장을 막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소모되는 에너지량이 하루 400여 기의 항공기가 오가는 템펠 공항보다도 많을 정도다. “신공항은 독일에서 가장 비싼 공사장”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공항은 2011년 말 ‘모의고사’를 치렀다. 1만2000여 명의 시민체험단을 모집해 체크인부터 수화물 운반, 보안 검사와 탑승까지 항공 여행의 전 과정을 점검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 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화재 경보 시스템에서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된 것이다. 공항 청사 전체에 완전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화를 불렀다. 이 시스템은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데,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사(BBF)가 자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화재가 발생할 경우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할지, 통풍구가 열릴지, 안내 방송이 나올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1996년 독일에서는 뒤셀도르프 공항 화재로 17명이 사망한 일이 있어 화재 경보 시스템 오류가 해결될 때까지 베를린 신공항은 여행객들을 맞을 수 없다. 환풍 기구와 통로를 건물 지하에 설치해 화재가 났을 때 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웃지 못할 설계상의 하자도 발견됐다. 미관상의 이유로 공항 청사 옥상에 굴뚝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신공항의 하자를 집중적으로 다룬 기사에서 “이런 구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지하의 철도역과 공항을 잇는 에스컬레이터의 길이가 너무 짧고, 공항 내 응급 의료 구역이 없는 등 기술 강국 독일의 위상을 의심케 하는 어이없는 실수들이 지적됐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비난의 화살은 특히 신공항 건설의 건축주 대표인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과 마티아스 플라체크 브란덴부르크 주 총리에게 집중되고 있다. 이들이 2010년부터 무려 500여 회나 설계 변경을 요청하고 급기야 개항 연기를 이유로 건축가들을 해고하는 등 ‘갑의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다. 올해 초 보베라이트 시장은 비판이 거세지자 BBF 감사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치인들의 성과주의 때문에 엉망 돼”

공항 설계에 참여한 독일의 스타 건축가 마인하르트 폰 게르칸은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신공항 프로젝트가 임기 중에 업적을 남기려는 정치인들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남기기 위해 최소 비용으로 최단 시간에 최대한 큰 건축물을 짓고 싶어 한다”고 비판했다. 정치인들은 공항의 본질적 기능보다 카페와 옷가게가 늘어선 대형 쇼핑몰을 지으려고 해 갈등이 생겼다고 했다. 실제로 BBF의 경영 컨설팅 보고서에 따르면 건축주들이 점포와 음식점 부지를 늘릴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르칸은 “이 때문에 공항 총 면적이 수시로 늘었다 줄었다 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추가로 발생한 공사 비용 중 11억7000만 유로는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게다가 신공항 인근의 쇠네펠트 주민들은 항공소음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신공항의 방음 대책이 미진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BBF는 2010년 항로를 변경하고 방음 시설 절충안을 제시했지만 4월25일 베를린 주 행정법원은 “신공항사가 조직적으로 방음 대책을 축소시켰다”면서 전면적인 방음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결정했다. 전면적인 방음 시설을 구축하는 데에만 추가로 3억 유로가 더 들어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월30일에는 유럽위원회가 독일 정부를 제소하겠다고 나섰다. 소음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항로를 변경하면서 항공기가 자연보호구역을 지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위원회는 “신공항의 항로가 처음 승인받은 항로와 심각하게 달라졌다. 새로운 항로에 대해 제대로 된 환경영향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독일 정부는 EU 환경조약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최근 독일에서 정부 주도로 이뤄진 대형 건축 프로젝트는 모두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과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함부르크의 엘베 필하모니 극장과 슈투트가르트의 새 중앙역 공사 비용과 소요 기간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게르칸은 그 원인으로 정치인의 성과주의 외에도 공모전 당선을 위해 예산을 축소해서 응모하는 건축계의 관행, 전문성이 부족한 정치인들의 입김, 소음과 자연 보호 등에 대한 정치인들의 무관심을 꼽았다. “개발도상국이면 모를까, 독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독일에서도 공공 건축 프로젝트가 정치권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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