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무덤을 다시 열다
  • 이승욱·감명국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3.06.2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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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 발언록’ 카드 꺼내 반전 꾀하는 새누리당과 국정원

2013년 3월21일. 이날은 진선미 민주당 의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문건을 폭로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지난해 말 대선 직전 터진 ‘국정원 댓글녀’ 사건에 이어, 국정원 수장의 정치 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정국이 요동칠 조짐을 보일 때였다. 그날 오후 기자는 새누리당 소속의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TK(대구·경북) 출신 친박계 핵심인 그가 예민한 ‘정국의 뇌관’에 대해 쉽게 언급할 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기자는 국정원 소관 상임위원장으로서 ‘국기 문란’ 행위에 연루된 국정원의 행태를 지적하는 원론적인 ‘워딩’이라도 들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서 위원장의 이날 반응은 기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시종일관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당시 인터뷰 내용 일부를 간추려 보면 이렇다.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과 새누리당 소속 정보위원들이 6월20일 국회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연합뉴스
서상기, 전화 인터뷰에서 원세훈 적극 옹호

기자 :  (진선미 의원 폭로로) 원세훈 전 원장의 국내 정치 개입 논란이 불거지지 않았습니까.

서 위원장: (진선미 의원이 주장한 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제가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자료를) 봤는데 완전히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원 전 원장이 훈시한 게 수십 개 있는데, 그중에서 (일부를) 짜깁기한 거거든요. 완전히 허위 날조죠.

기자 : 원 전 원장이 정치 개입을 하지 않았다고 보시는 것인지….

서 위원장: 원 전 원장이 원래는 (국정원은) 국내 정치 개입하지 말라고 한 것인데, 그걸 가지고 (민주당 쪽이) 짜깁기를 해가지고 (정치 개입하라는 것으로) 둔갑을 시킨 거죠.

기자 : 원 전 원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4년이나 국정원장을 지내면서 각종 구설에 오른 인물 아닙니까.

서 위원장: 제가 아는 바로는 원 전 원장은 (정치 개입과 관련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정도로 철저히 지켰어요. (국정원 댓글) 여직원 사건도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미 (우리가) 검토를 하고 (민주당측 인사들의) 통화 내역까지 봤어요. 곧 검찰 발표가 납니다. 국정원 나간 사람이 민주당 공천을 받기 위해… 주범이 민주당 당원입니다. 민주당의 고위층하고 통화한 기록까지 다 봤습니다. 검찰에서 (수사 결과가) 곧 나옵니다. 검찰에서 나머지 조사해서 발표할 일만 남았어요.

 

서상기 위원장은 당시 통화에서 기자에게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의혹 관련) 기사를 쓰면 창피당한다” “정말 큰일이 난다” “성급하게 기사를 쓰지 말고 기다려라”고 거듭 당부했다.

국정원 내부 사정에 밝은 또 다른 친박 성향 의원도 기자와의 통화에서 “‘원장님 지시·당부 말씀’은 (국정원 내) 인터넷망에 공식 게시된 것 아니냐”면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띄운 걸 가지고 정치 개입이라고 모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기자가 이들 친박계 의원들과 인터뷰할 당시는 국정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의 전말이 분명히 밝혀지기 전이었다. 결국 원 전 원장은 검찰에 의해 정치 개입뿐만 아니라 선거 개입 혐의로 불구속 기소될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도 해당 의원들은 원 전 원장으로 향하는 의혹을 자신들이 대신해 온몸으로 막아서는 모양새를 보였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4월30일 서울중앙지검을 나서며 ‘국가정보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과 관련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정원 사건, 어떻게 번질지 몰라”

서상기 위원장은 6월20일 다시 한번 뉴스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갑자기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논란을 다시 꺼내들었다. 국정원이 제공한 2007년 노무현-김정일 남북 정상회담 대화 내용의 발췌록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동료 여당 의원들과 함께 이에 대한 기자회견도 열었다. 여기서도 그의 발언 수위는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말인지 의심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야당이 그동안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 “상세한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말하기 부끄러운 내용들이었다. 대화가 아니라 보고를 올리는 느낌이었다” 등등. “내 말이 조금이라도 과장됐다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며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국정원 선거 개입’ 논란으로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이 궁지에 몰린 시점이라 그 의도가 구설을 낳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을 접한 기자들은 해묵은 NLL 논란이 다시 불거진 데 대해 다소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TK 지역 일간지의 한 기자는 “평소의 서 위원장답지 않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심지어는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국민들이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 ‘물 타기’라고 생각하지 않겠나”라며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민주당은 즉각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과 국정원의 국정조사에 대한 본질 흐리기”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현재 친박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새누리당의 국정원 사건 대응 태도는 박근혜 대통령, 국정원 등 국가 정보 라인의 악연을 복기하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국정원은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박 대통령의 과거 행적 등 각종 루머를 담은 ‘X파일’ 제작소라는 의혹을 샀다. X파일은 2007년에 이어 2012년 대선에서도 박 대통령을 괴롭혔다. 특히 MB 정권 시절인 2009년 국무총리실 주도로 자행된 ‘민간인 불법 사찰’의 표적도 박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선된 후 국정원 등 국가 정보 라인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도 이런 악연 때문이었다.

MB 정권의 실세였던 원 전 원장과 대척점에 설 것으로 보였던 새누리당이 적극적인 지원 사격에 나선 것은,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이 전 정권뿐만 아니라 현 정권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경우 현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이 올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한 새누리당 친박계 인사는 이를 두고 MB 정권 초기의 ‘촛불 시위’와 연관해 설명했다. 그는 “MB 집권 초기인 2008년 광우병 파동이 몰고 온 촛불 시위의 파장이 얼마나 컸나. 국정원 사건도 앞으로 어디로, 어떤 양상으로 번질지 모르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위기에 봉착한 새누리당의 의도대로 굴러갈지, 아니면 더 큰 역풍을 맞을지 6월 국회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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