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나라에서 월드컵 반대한다고?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3.07.0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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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반정부 시위 격화…“2014 월드컵 개최 비용 너무 많다”

이 정도면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을 넘어섰다. 버스요금 20센타보(약 100원) 인상 때문에 돌아온 된서리의 규모가 브라질 정부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6월6일 상파울루에서 시작된 브라질 국민들의 시위는 1992년 이후 처음으로 전국적인 거리 시위로 확산됐다. 1992년은 측근 비리로 페르난도 콜로르 데 멜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관철시킨 해였다.

상파울루에서 시위를 처음 시작한 ‘프리페어무브먼트’라는 단체는 이름 그대로 버스 이용의 일괄적인 무료화를 주장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대중교통은 공공 서비스이며, 무료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지옥 같은 교통 체증 도시인 상파울루에서 버스로 통근·통학을 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요금을 올린다고? 오히려 무료화하라”는 구호에 많은 젊은이가 동조했다. 통근·통학의 어려움에 질린 시위대 중 일부가 폭력성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보수 신문들은 ‘시위대의 단속’을 요구했다.

6월17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시위 참가자가 브라질 국기를 든 채 경찰을 막아서고 있다. ⓒ AP연합. 오른쪽은 월드컵을 앞두고 대규모 개·보수 공사를 한 벨로 호리존테 미네이랑 경기장. ⓒ EPA연합
시위 격화에도 대통령 지지도는 높아

상황이 달라진 것은 6월13일이었다.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경찰이 평화적으로 진행하던 시위대를 심하게 단속했다. 시위 참가자와 시위대를 지켜보던 관람자에게 섬광 수류탄과 고무탄을 발사했다. 아수라장이 된 시위대를 잡으러 경찰들이 거리로 직접 뛰어들었다. 최루가스에 효과가 있다는 식초를 소지하고 있던 사람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됐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얼굴에 고무탄을 맞은 사람도 있었고, 여기저기서 부상자가 생겼다. 이때부터 상파울루의 시위는 ‘식초 운동’ ‘샐러드 혁명’으로 불렸다. 어설픈 경찰의 폭력은 다음 날 대다수 브라질 신문의 논조를 변화시켰다.

시위는 10개 이상 도시로 확대됐다. 밤이 되면 브라질 전역에서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출발은 젊은이들 위주였지만 이후에는 여성과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이 많았고 중년층의 참여도 늘어났다. 늘어난 사람만큼 요구도 더욱 다양해졌다. 부패, 물가 상승, 교육과 의료 문제 등이 광범위한 의제로 떠올랐다.

최근 영국·프랑스·스웨덴·터키 등 세계 여러 국가에서 작은 시위가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젊은이의 높은 실업률, 민족 분쟁, 생활수준 저하, 독재 정권, 이민에 대한 불안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앞의 국가들과 브라질의 상황은 좀 다르다. 상파울루의 시위대에서는 평균보다 풍요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주력 부대였다. 6월17일 브라질의 여론조사 회사인 ‘다타폴랴(Datafolha)’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상파울루의 시위 참가자는 다른 국가의 시위 참가자에 비해 대학 졸업장을 보유하고 있는 비율이 3배나 높았다.

시위대의 성격은 브라질 정치 전문가들이 ‘시위대가 왜 이렇게 거리로 뛰어나왔는지’를 설명하는 데 고심하게 했다. 예를 들어 앞의 국가들과 달리 브라질의 청년 실업률은 기록적으로 낮다. 다인종 국가인 브라질에서는 인종차별 문제로 거리에서 싸움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생활수준도 나아졌다. 지난 10년 동안 약 4000만명의 브라질 국민이 극빈층에서 벗어났다. 이민으로 건설된 브라질이지만 현재 브라질 인구 중 외국 출신은 0.3%에 불과하다.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인 시점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6월18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다른 국가의 지도자와 비교할 때 고공비행 중이다. ‘매우 좋음’과 ‘좋음’이라고 평가한 사람이 전체의 55%였고, ‘보통’이라고 답한 사람도 32%였다. ‘나쁨’과 ‘매우 나쁨’이라고 부정적인 응답을 한 사람은 13%에 불과했다. 이번 시위가 ‘공공 서비스를 향상하라’는 정치권에 대한 경고는 되겠지만 정권을 향해 비수처럼 꽂히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시위대의 외침 중 가장 뚜렷한 것은 2014년에 개최되는 월드컵 비용 문제다. 시위대는 “경기장 건설·개보수 등 월드컵 개최 준비에 공적 자금을 일절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월드컵 준비로 스타디움 공사에만 70억 헤알(약 3조668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2010년 월드컵 비용보다 3배가 많다. 월드컵 비용에 항의하는 시위대의 현수막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제1세계의 스타디움, 제3세계의 학교와 병원.’

축구의 나라 브라질에서 월드컵을 반대하는 현상은 흥미로운 일이다. 브라질의 대표적인 레전드 두 명의 엇갈린 행보도 눈길을 끈다. 현재 브라질에서는 월드컵을 1년 앞두고 대륙 챔피언 간 대결인 컨페더레이션스컵이 열리고 있다. 시위가 한창이던 6월19일 브라질월드컵 명예대사인 ‘축구 황제’ 펠레는 TV에 등장해 “브라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동과 시위를 잊자. 브라질 국가대표가 우리나라와 우리 피의 상징임을 상기하자”고 말했다가 거센 질타를 받았다. “부자라서 일반인의 생활을 모른다” “경비원 없이 버스 타봐라. 그런 바보 같은 말이 나오나” 등 SNS에서는 펠레를 향해 조롱 섞인 비난이 쏟아졌다.

펠레와 정반대에 선 레전드는 호마리우다. 로이터 통신은 브라질의 축구 스타에서 하원의원으로 변신한 호마리우가 자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을 보도했다. “그동안 경기장 건설 및 수리에 들어간 비용은 8000개의 학교를 짓고 3만9000대의 스쿨버스를 운영하고 2만8000개의 체육관을 건설할 수 있는 규모”라고 비판했다. 그는 “브라질리아의 나시오날 스타디움에 들어간 자금이 있다면 서민 주택 15만호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 정부는 15억 헤알(약 7855억원)을 하나의 경기장에 썼다. 아름다운 경기장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용적이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호마리우는 못을 박았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브라질의 진짜 대통령이다. 그들이 이 나라에 와서 또 다른 나라를 만든 것과 같다.”

호마리우 “FIFA가 브라질 대통령”

역대 월드컵에서 개최 장소가 갑자기 바뀐 사례는 딱 한 번 있었다. 1986년 월드컵은 원래 콜롬비아에서 열리기로 했지만 예산 부족을 이유로 멕시코에서 치러진 적이 있다. 그러나 호마리우가 ‘브라질의 대통령’이라고 말한 FIFA는 대회 장소 변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제롬 발케 FIFA 사무총장은 “2014년 월드컵은 예정대로 브라질의 12개 장소에서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FIFA 입장에서 브라질은 보고나 다름없다. 브라질 의회는 FIFA가 월드컵을 통해 브라질에서 올릴 수익에 관한 세금을 면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FIFA에서 브라질측에 제시한 조건 중 하나였다. FIFA가 월드컵을 통해 브라질에서 올릴 수익은 40억 헤알(약 2조948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대로라면 이 중 10억 헤알(약 5237억원) 정도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모든 것을 손에 쥔 채 빠져나갈 수 있는 브라질을 FIFA가 외면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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