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권력 5년 막후] #3. 읍참마속(泣斬馬謖) 후 노무현 세력 척결 나서다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3.07.3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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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MB 집권 첫해 중심 못 잡고 허둥지둥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지난 6월10일,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저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위대의 함성과 함께, 제가 오래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이라는 노랫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캄캄한 산 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늦은 밤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수없이 제 자신을 돌이켜보았습니다. …(중략) 아무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현안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챙겨봤어야 했습니다. 저와 정부는 이 점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취임 두 달 만에 맞은 이번 일을 통해 얻은 교훈을 재임 기간 내내 되새기면서 국정에 임하겠습니다. 국민과 소통하면서, 국민과 함께 가겠습니다.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중략) 대선 공약이었던 대운하 사업도 국민이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정책도 민심과 함께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중략)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다시 국민 여러분께 다가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저와 정부를 믿고 지켜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촛불로 뒤덮였던 거리에 희망의 빛이 넘치게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5월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연일 개최됐다. ⓒ 연합뉴스
2008년 6월19일 오후,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특별 기자회견을 했다. 머리를 깊이 숙였다. ‘촛불 사과 기자회견’으로 불리는 바로 그 회견이다. 한 달 전인 5월22일 ‘대국민 담화’ 형식으로 사과한 데 이어 두 번째였다. 축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정권이 화려하게 출범한 지 불과 4개월 만의 일이었다. ‘캄캄한 산 중턱에 홀로 앉아서…’로 상징되는 문구는 감성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후로도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태가 잠잠해졌다. 2009년 8월30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08년 5월2일부터 그해 8월15일까지 계속된 촛불 시위로 입건된 사람은 1467명. 시위는 전국에서 2398차례나 열렸다.

“촛불 사태 초기, 청와대 안이하게 대응”

2008년 여름, 전국을 달군 촛불은 이른바 ‘MB 프로그램’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준비한 야심찬 국정 프로젝트를 펼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정권이 출범한 첫해 1년을 중심을 잡는 데 써야 했다. 물론 그렇게 된 원인의 상당 부분은 이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가 시작된 것은 2008년 5월2일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의견을 나누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었다. 처음 주류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의 ‘어륀지’ 발언으로 상징되는 영어 몰입 교육과 0교시 수업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 위원장은 2008년 1월 이명박 정부의 영어 교육 방향을 설명하던 중 “내가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듣더라. ‘어륀지’라고 하니까 알아듣더라”라고 말했다. 영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취지였지만, 서민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여서 비판이 쏟아졌다. 여기에 더해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학생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쇠고기를 수입하는 정책에 반대한다. 못 믿겠다. 영어 수업이나 우열반은 말도 안 된다. 정책에도 반대하고 친구들끼리 추억을 만들려고 나왔다.”(2008년 5월7일, ‘국민대책회의’가 주최한 서울 청계천에서 있은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한 고등학생) 이날 학생들은 ‘너나 먹어, 미친 소’ ‘저는 아직 15년밖에 안 살았습니다’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54.8%에서 28.4%로 가파르게 떨어졌다. 인터넷에서 벌어진 대통령 탄핵 서명에는 140만명 넘게 서명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 대통령은 5월22일 “국민께 충분한 이해를 구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라는 내용으로 8분간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당시 청와대 사정 파트에서 일하며 촛불 시위 현장을 면밀히 들여다봤던 한 인사는 필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촛불 시위 초기만 해도 청와대는 사태를 심각하게 보기보다는 억울해하는 분위기였다. 국민들이 진심을 몰라준다며, 진심을 알게 되면 촛불이 사그라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쇠고기 협상이 아무리 잘못됐다 하더라도 촛불 시위에서 정권 퇴진 주장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것에 고마워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청와대는 촛불 시위 초기에 상황을 너무도 안이하게 판단했다.”

당시 정무수석실에서 일했던 인사도 비슷하게 증언했다. “당시 정권을 뺏겼으니 저럴 수도 있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청와대에 있었을 정도다. 나는 ‘저러다 실제로 시위대가 청와대로 몰려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경호원들이 시민들을 상대로 총을 쏠 수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시위 과정에서 어떤 경우에서건 사망자가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보통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었다.”

5월24일 이후 촛불문화제는 거리 시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집회 장소도 청계광장에서 서울시청 앞으로 옮겨졌다. 거리 시위도 청와대로 방향을 분명히 했다. 이날부터 민주노총과 전교조, 농민들이 가세했다.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장관 고시’를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29일부터는 대학생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서울대 총학생회를 비롯한 전국 60여 개 대학이 동맹휴업을 했다. 주부들이 유모차를 몰고 시위에 참석하는 ‘유모차 부대’도 등장했다. ‘촛불’은 점점 시민항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5월2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광우병 파동에 사과하는 내용의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촛불 전까지는 MB-노 관계 나쁘지 않아”

6월에 들어서며 시위 규모는 더 커졌다. 일부에서 과격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하는 72시간 릴레이 시위 마지막 날인 6월8일 새벽에는 쇠파이프와 각목이 등장했다. 시위대가 전경 버스를 파손하는 일도 일어났다. 내용도 쇠고기 수입 문제를 넘어 대운하, 영어 몰입 교육, 공기업 개혁 등 정부 정책 전반을 비판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때쯤 청와대 분위기도 5월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당시 청와대 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청와대는 대국민 설득이 안 먹혀 들어간다고 판단했다. (촛불 시위의)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습을 모색해야 했다. 정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이 사람들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촛불의 주동 세력을 노사모라고 보았다. 사실 촛불 시위 전까지 이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대선 때는 이상득-노건평 핫라인이 가동돼 양측은 물밑에서 여러 얘기를 주고받았다. ‘정치 보복은 없다’는 데 공감했다. 노 전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당시 치적인 청계천을 걷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촛불 시위를 겪으며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인식했던 것 같다. 이후 대통령은 ‘믿을 것은 내 사람밖에 없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촛불 시위 와중인 6월9일 ‘왕비서관’으로 불리며 힘을 과시했던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이 청와대를 떠났다. 정두언 의원 등이 인사 실패 등의 책임을 물어 끈질기게 제기했던 이른바 ‘인적 쇄신’ 주장을 이 대통령이 수용한 결과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볼 때 여권 내부부터 단합해야 위기를 넘을 수 있다는 이 대통령의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이 대통령은 여권 내부 정리에 들어간다. 그것은 공격을 위한 사전 준비였다.

대통령의 특별 기자회견이 열린 6월19일 다음 날인 20일,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곽승준 국정기획수석, 이종찬 민정수석, 김병국 외교안보수석, 김중수 경제수석, 이주호 교육과학문화수석 등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의 이임식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렸다. 임명 당시 이 대통령은 이들을 직접 소개하면서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라고 극찬했다. 그랬는데 불과 4개월도 안 돼 대대적으로 교체된 것이다. 류 실장은 “바로 어제 다른 수석들을 면직시키는 연설문을 썼다. 오늘은 내가 떠나는 연설문을 써야 하는데…”라며 한동안 말문을 잇지 못했다. 대통령의 권위는 떨어졌고 6월의 청와대는 우울했다.

MB, 6월 대폭 청와대 인사 통해 반격 준비

대통령의 사과에 이은 대폭적인 인사 개편, 정부 차원의 강경 대응이 나오면서 촛불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불씨를 되살리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종교계였다.

“주여! 검역 주권을 확보하게 하소서.” 2008년 7월2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집전하는 저녁 미사가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헌법 제1조> <광야에서> <아침이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등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신부들은 “촛불은 평화다”라고 외쳤다. 같은 장소에서 7월3일에는 개신교계가, 7월4일에는 불교계가 집회를 열었다.

불교계에서 생명평화운동을 이끌던 수경 스님은 당시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국민을 섬기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그 내용을 국민에게 소상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의 순수한 외침도 배후 세력이니 뭐니 해가지고 매도해버리지를 않나…. 촛불의 진정성을 매도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당략이 있는 것도 아닌 맑은 정신에서 나온 것인데 정반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최고’라는 아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정 운영을 기능적으로, 사업을 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촛불 여파로 공직윤리지원관실 탄생

종교계가 광장으로 나올 즈음 여권 진용을 재정비한 권력 핵심부는 친위 조직을 만들며 대반격을 위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촛불 시위의 핵심 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막후 움직임을 본격화한 것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당시 청와대는 촛불 세력의 힘과 자금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면밀히 살폈다. 그 결과, 노무현 정권 때 임명된 공기업 임원과 시민단체들이 공생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공기업 임원들이 노조를 동원해 촛불 시위에 나오는 것을 목도했다. 공직 기강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만들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촛불 이후’인 2008년 하반기, 이명박 정권은 정권 차원에서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중심으로 ‘노사모 세력’에 대한 대공세를 펼친다. 이것은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대참사로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이었다.   


ⓒ 연합뉴스
‘촛불 시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당시 어청수 경찰청장이다. 2008년 2월11일 제14대 경찰청장에 취임한 어 청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당선인이 협의해 인사를 단행한 첫 고위직 인물이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떼법·정서법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선언한다. 어 청장은 2008년 6월10일 이른바 ‘명박산성’으로 불리는 컨테이너 바리케이드를 광화문에 쌓아 시위대의 진입을 막았다. 이 일로 정권으로부터는 신임을 받았지만 ‘명박산성’은 이명박 정권의 ‘불통 이미지’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는 2009년 1월 경찰청장에서 퇴임한 뒤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맡아 2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러다가 ‘MB 내곡동 사저’ 파문으로 물러난 김인종 경호처장 후임으로 10·26 재보선 다음 날인 2011년 10월27일 경호처장을 맡아 임기 후반의 대통령 경호를 책임졌다.

어 청장은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컨테이너로 막으라고) 내가 직접 지시했다. 당시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APEC 때 시위대와 경찰 간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이 방법을 썼는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촛불 시위와 관련해서) 부상자가 발생해 이 방법을 사용했다. 그랬더니 시위대·경찰 모두 부상자가 없었다. 그 전에 여의도 농민 시위 때는 두 명인가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나. 경찰 장비도 불타고. 전에는 (큰 시위의 경우) 주로 경찰 버스로 차벽을 만들어 막았다. 시위대와 경찰이 몸을 부딪치는 등 물리적으로 충돌하면 부상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는 데는 (컨테이너로 막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 판단해서 했다. 시비가 있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연일 부상자 발생하고 다치고 있는데 그날은 가장 대규모 인원이 모였고 해서. 지금 생각해도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Series) MB권력 막후 5년


#1.  드디어 피바람이…“당신 주변엔 빨갱이가 왜 이리 많아”
- 이상득·박영준 등 TK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허망하게 무너진 정두언 ‘한 달 천하’



#2. 함께 가자더니 하루아침에 배신을…”
- 이재오 향한 정두언의 분노…TK는 ‘55인의 반란’ 초기에 진압


#3. 읍참마속(泣斬馬謖) 후 노무현 세력 척결 나서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MB 집권 첫해 중심 못 잡고 허둥지둥


#4. 봉하마을 향하는 칼끝 최종 타깃은 노무현
- 진보 단체 돈줄 색출…‘박연차 게이트’ 광풍 몰아쳐


#5. MB 검찰, 지관 총무원장 계좌 뒤졌다
- 노발대발한 총무원장, 불교계 총동원령 내려


#6. 한상률의 배신, 노무현 등에 비수 꽂아
- TK 세력과 손잡고 ‘정치성 세무조사’…부하의 보복에 자신도 거꾸러져


#7. 이상득은 친인척 관리 대상 위에 있었다
- MB도 어쩌지 못하는 ‘궐 밖 권력’ 김윤옥 여사와 SD 부인 최신자씨 간 갈등도


#8. ‘대군’들의 밀약, 촛불에 한 줌 재로 사라져
- 전·현직 대통령 ‘형님’들 핫라인…2007년 대선 전후 가동


#9
. 검찰 수사 나서며 회장 퇴진 압박
- ‘왕차관’ 박영준, 핵심 인사들 면접 보듯이 일일이 접촉


#10. 웃음 뒤에 감춰둔 ‘비수’는 예리했다
-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불편했던 MB-박근혜 “실제 둘 관계 나쁘지 않다”는 얘기도


#11. 암호명 ‘동해 일출’ “VIP를 독도로 모셔라”
- 김효겸 전 청와대 비서관이 전하는 이명박 정권 뒷얘기


#12. 정권 실세들 떡고물 챙기려 ‘4대강’ 기웃기웃
- MB, 2008년 6월 ‘대운하 포기’ 언급 이후에도 논란 이어져


#13. 정권 끝날 때까지 “믿을 건 내 사람뿐”
- MB 정권, 사정·정보·인사 등 핵심 라인 ‘고대·영남’ 출신 독식


#14. ‘박근혜 대항마’, 날개도 못 펴고 스러지다
- 정운찬의 총리 취임 직전 즉흥적 ‘세종시 수정안’ 한마디로 권력 쟁투 가열


#15. 요란한 구호 속 한몫 챙기기 바빠
- 5년 내내 ‘동반 성장’ ‘녹색 성장’ ‘중도 실용’ ‘공정 사회’ 등 키워드만 난무


#16. 궐 밖에선 최고 권력자였지만…
- MB 정권 실세의 상징 ‘6인회’ 멤버, 잇따라 몰락의 길 걸어


#17. 실세들이 설친 자리엔 빚더미만 남아
- MB 정권 ‘자원 외교’, 공기업들에 수조 원대 부채 떠안겨


#18. KT·포스코는 정권의 전리품
- 민간 기업을 낙하산 집합소로 만들어…버티면 검찰권 동원해 압박


#19. 정운찬·김태호·오세훈 제 무덤 파거나 포격에 무너져
- 실패로 끝난 MB의 ‘후계 프로젝트’…‘박근혜 대항마’ 부각되기도 전 좌초


#20. 강남 ‘큰손’ 부동산업자에게 땅 비밀 거래 꼬리 잡히다
- 시사저널, ‘내곡동 사저 단독 공개’로 MB 정권 강타…특검도 의혹 해소 못해


#21. 거물들 모셔왔으나 성과 없이 내리막길
- ‘친기업주의’ 정책 펼치며 해외 유명인들 영입…권력 내부에서는 균열 조짐


#22. 잇단 북 도발에 ‘병역 면제 정권’ 조롱
-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안보 무능’ 드러나…컨트롤타워 부재 따른 혼선에 지지율 뚝


#23. ‘MB맨’ CEO들 빚더미 안기고 퇴장하다
- 지난 정권 5년간 공기업 부채 244조원 증가…4대강 사업 등에 돈 쏟아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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