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는 공동묘지가 됐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10.2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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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난민 참사에도 떠넘기기 바쁜 유럽 국가들

등 뒤의 총성과 눈앞의 바다. 하늘은 맑고 파도는 낮았다. 지난 9월, 쾌청한 날씨가 이어지자 난민을 싣고 북아프리카를 떠나는 배가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이탈리아령 람페두사 섬으로 향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의 섬이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 땅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오랜 내전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빈곤에 시달리던 이들은 그렇게 조각배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배는 침몰했다.

10월3일 리비아를 출발해 람페두사 섬으로 향하던 배가 가라앉으면서 500여 명의 승객 중 36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상 최악의 참극이 벌어졌다. 시칠리아 섬 연안에서 비슷한 사고로 10명의 난민이 사망한 지 불과 사흘 만에 일어난 일이다. 프란치스코 로마가톨릭 교황은 사고 발생 다음 날인 10월4일 “이 사건에 대해 한마디 말밖에 할 수 없다. 수치스럽다”고 밝혔다.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구조 요청을 위해 배 위에 불을 지핀 데 있었지만 배가 가라앉은 것은 람페두사 섬에서 불과 몇백 m 떨어진 연안이었다. 인재(人災)다.

비극은 매일 반복되고 있다. 사고가 일어난 지 채 열흘도 지나지 않은 10월12일에도 람페두사 섬 연안에서 난민선이 침몰해 최소 27명이 사망하고 150명이 구조되었다. 이틀 뒤인 14일 밤에는 또 다른 난민선에서 137명이 구조됐다. 11일과 15일에는 시칠리아 섬 해역에서도 800여 명의 난민이 어렵게 목숨을 건졌다.

침몰된 난민선에서 수습된 시신들. 최근 EU 국가들은 난민 문제 책임을 떠넘기느라 바쁘다. ⓒ AFP 연합
난민 구조보다 감시에 열 올리나

유럽연합(EU) 국가들은 람페두사 비극의 재발을 막을 방안을 놓고 고심 중이다. 독일의 한스 페터 프리드리히 내무장관은 “조직적인 난민 브로커를 근절하고 난민이 발생하는 북아프리카 국가의 상황 개선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숨을 담보로 망명을 감행하는 사람이 더 나오지 않도록 원천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이를 두고 “플라시보 해결책”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럴싸해 보이는 속임수라는 얘기다. 

최악의 비극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인 10월10일, 유럽의회는 지중해 해역에 새로운 위치 추적 시스템인 ‘유로서(Eurosur)’를 도입하기로 결의했다. 무인항공기와 인공위성 등을 통해 지중해 전역을 감시하고, 지중해 연안 국가 간 정보 공유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다. 세실리아 말스트룀 유럽내무위원은 “새로운 시스템은 항해에 부적합한 배에 탄 난민들을 신속히 찾아내 이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것”이라고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를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비판했다. <슈피겔> 온라인은 “유로서는 구조를 위한 것이 아닌 감시를 위한 시스템”이라면서 비극의 근본 원인은 “위치 추적이 아닌 해상 구조 책임 떠넘기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2011년 5월 그리스 트리폴리스를 떠나 람페두사 섬으로 향하던 난민들이 이탈리아와 몰타 국경수비대, 나토(NATO) 선함과 스페인 해군선의 외면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73명이 타고 있던 보트가 출항 후 보름 만에 리비아 해안으로 떠밀려왔을 때 생존자는 불과 아홉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출발한 지 이틀 만에 헬리콥터가 다가와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물과 비상식량을 던져주고는 떠나버렸다”고 밝혔다. 난민선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 것과 이들을 구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EU 외곽의 국경 국가들도 할 말은 있다. 내륙에 위치한 유럽 국가들과 유럽연합이 망명자 문제를 방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몰타의 조셉 무스캇 총리는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빈말만 할 뿐이다. (난민 문제에 관해서)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내버려두고 있다”고 강하게 불만을 제기했다. 그는 또 “지중해가 공동묘지로 변하고 있다”며 EU의 망명 정책 개혁을 촉구했다.

2003년에 개정된 더블린 조약은 유럽 난민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 조약에 따르면 난민들은 최초로 도착한 나라에서만 망명 신청을 할 수 있다. 국경을 제대로 수비하지 않거나 유인을 제공한 나라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다. 만약 난민이 다른 EU 국가로 숨어들 경우에도 이들은 처음 땅을 밟은 나라로 환송된다. 이를 위해 난민의 지문을 비롯한 신원 정보를 저장하고 공유하는 시스템인 유로닥(EURODAC)이 가동 중이다. 

그러나 더블린 조약은 사실상 EU 외곽의 일부 국가들에게 난민에 대한 책임을 떠넘길 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북아프리카·중동·동구권 망명자들이 이탈리아·그리스·폴란드 등 국경 국가를 거치지 않고 독일·스웨덴 등 중·북부 유럽 국가로 바로 들어오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국경 국가에 대한 EU와 북유럽 국가들의 지원은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슈피겔> 보도에 따르면, 올해 9월 독일 정부가 EU 국경 수비를 위해 그리스에 보낸 인력은 고작 경찰 7명이 전부인 것으로 드러났다. EU 역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그리스의 국경 수비에 3400만 유로를 지원하는 데 그쳤다.

점점 약발 떨어지는 ‘더블린 조약’

유럽 내륙 국가들이 더블린 조약을 고집할수록 이 조약의 효력은 점점 약해진다. 홀로 짐을 떠안은 EU 국경 국가들이 난민들을 다른 EU 국가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지난 5월 리비아 난민들에게 현금 500유로와 여행자 비자를 주고 독일로 떠나라고 종용해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8월에는 베로나발 뮌헨행 열차에서 신원 정보가 등록되지 않은 난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더블린 조약을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경제난에 시달리는 폴란드는 체첸계 난민들에게 독일로 향하는 관문이 된 지 오래다. 그리스에서는 난민들에 대한 증오와 학대가 심각하다. 이들을 곱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못 살게 굴어서 쫓아내는 식이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디터 뷔펠스퓌츠 의원은 “그리스인들의 행태는 유럽 전체의 수치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인들을 내버려두고 있는 탓도 있다”고 말했다.

더블린 조약이 사실상 효력을 잃자 유럽 대륙 한가운데에 위치한 독일이 국경 국가인 이탈리아·폴란드·그리스를 합친 것보다 많은 망명자를 받아들이는 상황에 처했다. <슈피겔>은 “더블린 조약은 폐기된 것과 다름없으며 독일 정부만이 이를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EU가 국경 국가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각 유럽 국가가 경제 규모에 맞춰서 난민을 분담할 것을 제안했다. 핀란드의 일간지인 <칼레바> 역시 “북유럽도 남유럽 국가들이 겪고 있는 난민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도했다. 독일연방 이민망명청(BAMF)의 만프레드 슈미트 청장은 “현행 망명법이 일괄적으로 정치적 박해를 받은 난민에게만 망명자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문제”라며 “난민들 가운데서 고급 인력을 추려내자”고 제안했다. 해외 고급 인력을 유치해 산업계의 인력난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이는 난민을 “복지 제도에 기생하려는 존재”라고 표현한 프리드리히 내무장관보다 진일보한 시각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산업의 역군’이 될 자질을 갖추지 못한 나머지 난민들은 외면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배우지 못하고, 정치적 박해를 받지도 않았지만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조각배에 오른 난민들. 이들은 유럽 땅 위에서 지금도 끝없이 표류 중이다. “8100만명 독일인에 난민 10만명이 정말로 짐이 될까? 독일이 아니면 어느 나라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나?” <슈피겔>이 던진 물음이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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