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용의 발톱 드러낸 ‘최강의 여성’
  • 김원식│뉴욕 통신원 ()
  • 승인 2013.10.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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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 내년 중간선거 앞두고 대권 행보 본격화

“워싱턴 정치인들이 ‘공감(common ground)’을 불태워버렸다. 이것은 잘못된 지도력이다. 나는 그동안 어떤 종류의 리더십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가를 생각해왔다. 미국의 진보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이처럼 위대한 실험이 납치(hijack)되는 것을 우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힐러리 클린턴(이하 힐러리) 전 미국 국무장관. 10월26일로 만 66세가 되는 그가 10월19일 미국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선 테리 맥컬리프에 대한 지원 유세 현장에서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날 힐러리의 연설은 맥컬리프를 위한 지지 연설이었지만, 주변에서는 2016년 차기 미국 대선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확고하게 내비친 발언으로 본다. 미국의 모든 언론도 “이제 힐러리가 대권 가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고 보도했다.

한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가장 강력한 대권 후보였던 그는 2008년 대권 경쟁에서 오바마에게 패배했고, 대신 국무장관 자리를 지키며 4년을 보냈다. 올해 2월1일 오바마 2기 정부 출범에 즈음해 퇴임하면서는 “일상적인 가정으로 돌아가 조용히 여생을 즐기고 싶다”며 언뜻 정계 은퇴를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10월19일 민주당 버지니아 주지사 유세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 AP연합
차기 대선, 민주당 내 힐러리 적수 없어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현재 힐러리는 2016년 대선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당 후보이며, 그의 출마 역시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현실적으로도 그렇다. 힐러리의 지지율은 65%가 넘는다. 10여 명의 ‘잠룡’들이 2016년을 노리며 뛰고 있는 공화당과 달리 민주당에서는 힐러리와 겨룰 만한 대권 후보가 없는 게 현실이다. 조 바이든 부통령이 거론되고는 있지만, 10%의 지지율도 얻지 못해 힐러리와는 게임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 어느 때보다 힐러리의 2016년 대권 가도 앞에는 확실한 청신호가 켜져 있는 상태다.

지금 힐러리의 움직임은 꽤나 조용한 편이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현실은 역설적으로 힐러리를 매우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리 나섰다가 비난의 칼을 맞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국무장관 퇴임 후 “내 평생 여성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간접화법으로 대권 의지를 피력한 그는 9월22일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뉴욕에 기반을 둔 <뉴욕매거진>과 인터뷰를 가졌다. 힐러리는 이날 “미국을 위해 옳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지지하기 위해 지위와 관계없이 어떤 일이든 할 것”이라며 대선 출마를 고민하고 있다는 애드벌룬을 띄웠고, 이후 조금씩 출마 의지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치밀하게 여론을 떠보면서 동시에 대권 후보로 나섰을 경우 자신에게 불어닥칠지도 모를 역풍을 미리 간파해보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번 버지니아 주 연설이 그나마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 자리였다.

그가 조용히 움직이는 또 다른 이유는 오바마 대통령의 존재 때문이다. 아직 집권 2기 초반으로 임기가 3년이나 남은 같은 당의 현직 대통령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과도한 관심이 쏠린다는 건 달리 말해 오바마의 레임덕과 연결될 수 있다. 힐러리가 대선 출마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벌써 2016년 대선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좋지 않다. 지금은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손사래를 치는 이유다.

<뉴욕타임스>가 “맥컬리프 버지니아 주지사 후보 측에 후원금을 지원한 사람들은 그 이유를 2016년 힐러리의 대권 출마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바마가 화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있다”고 보도한 내용도 앞선 맥락과 비슷하다.

간혹 힐러리가 출마하지 않을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도 힐러리 진영이 그만큼 조심스레 움직인다는 증거다. 10월4일 미국 언론들은 힐러리 측근의 말을 인용해 “힐러리 전 장관은 딸 첼시가 임신할 경우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당시 이 측근은 “지금 힐러리는 손자를 얻는 것 외에 원하는 것이 없다”며 “오랜 시간 정계에 몸담아 열심히 일했고 이제 겨우 격무에서 벗어나 가정생활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불과 보름 후 가정생활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힐러리는 버지니아에서 독설을 뿜으며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리더십’을 거론했다.

대선 위한 외곽 사조직 발족

수면 아래에서 조용했던 힐러리지만 대권 가도를 위한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힐러리의 국무장관 퇴임과 동시에 그의 대선 출마를 지지하는 외곽 조직이 발족했다. 이미 ‘힐러리를 위한 준비(Ready for Hillary)’가 1월에 슈퍼팩(Super PAC; 미국의 민간 정치자금 모집 단체)으로 연방선거위원회(FEC)에 등록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기금 모금에 나서며 조직을 확대해가고 있다. 슈퍼팩은 선거 캠프에는 속하지 않지만 외곽에서 지원 활동을 벌이는 조직으로 정치 기부금을 무제한으로 모으는 게 가능하다. 이번 버지니아 주지사 지원 유세장에는 수많은 지지자가 ‘힐러리를 위한 준비’가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몇 시간 동안 줄을 서 입장했다. 이들은 힐러리의 연설 내내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등 분위기를 달구며 조직의 힘을 과시했다.

또 다른 한 축은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설립한 ‘클린턴 재단’이다. 올해 8월 이 재단은 이름을 ‘빌, 힐러리, 첼시 클린턴 재단’으로 바꿔 힐러리의 대선 출마를 위한 조직 확대가 아니냐는 시선을 받고 있다. 정치 입문설이 끊이지 않는 외동딸 첼시 클린턴의 이름을 올린 것도 전략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이 단체는 조직 확대와 동시에 모금 목표액을 2억5000만 달러로 높였다.

언론들은 힐러리의 대선 출마 가능성이 커지면서 ‘큰손’들의 기부금 후원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고 보도했다. 에이즈와 빈곤 퇴치 등 국제적인 문제와 여성 인권 등 비영리 재단이 추진하는 과제를 위한 기부금을 모금하는 것이지만 재단 관계자들은 “기부자 중에는 암묵적으로 힐러리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이 많다”며 2016년 대선 출마와 연관이 있음을 굳이 부인하지 않고 있다.

독주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힐러리는 아직 공식적으로 출마 선언을 하지 않는 등 몸을 낮추면서도 치밀한 ‘정중동(靜中動)’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의 대권 도전은 2014년 미국의 중간선거 이전에 구체화될 것으로 미국 언론들은 전망하고 있다. 그때쯤 선거에 나선 민주당 후보들이 힐러리의 지지와 지원 연설을 원하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정치권에 전면 등장할 무대가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힐러리에게는 과거 오바마에게 패배한 사례에서처럼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고 장담할 수 없는 변수도 존재한다. 그래서 힐러리는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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