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상흔의 땅에 여름에도 눈이 내린다
  • 정준모│인디펜던트 큐레이터 ()
  • 승인 2013.11.2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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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무사 터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연결-전개> 등 전시

11월12일 오후 4시 서울 삼청동 옛 기무사 부지에 터를 잡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식이 열렸다. 3시경부터 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문화예술계 인사와 미술인들은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며 새 미술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 그 기분은 마치 뉴욕이나 런던 또는 베를린의 미술관을 들어가는 듯했다. 나라 살림이 폈다고는 하나 국민 개개인의 주머니 사정은 늘 그렇듯 빠듯한데 이날만큼은 풍성한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이런 것이 국격(國格)일 게다. 내 주머니는 좀 허전하지만 마음은 든든한, 이것이 문화의 힘이고 또 존재 이유다.

마을 어귀를 산책하듯 마당을 따라 걸어 들어서니 전시장으로 이어졌다. 전시장은 넓고 시원했다. 경복궁이 마주하고 있어 건축적 제약 때문에 지하에 자리 잡은 전시 공간도 건축가 민현준이 솜씨를 부려 전혀 지하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전시도 공간을 최대한 살리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꾸며졌다. 총 5개의 전시가 개관을 위해 준비됐다. <연결-전개> <알레프 프로젝트>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 서도호·장영혜·최우람이 각각 자신의 구역이나 전시실을 꾸민 <현장제작 설치 프로젝트> 그리고 <미술관의 탄생>이 그것이다.

국내외 작가 30명이 참여하는 <알레프 프로젝트>는 요즘 관심을 끄는 융·복합 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장제작 설치 프로젝트>는 서도호와 장영혜 그리고 최우람이 공간에 맞추는 커미션 워크인 셈이다. 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서울대 교수 정영목이 기획한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전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맥락화하고 있다. 또 서울관이 개관하기까지의 과정을 작가적 시각에서 다큐멘터리처럼 엮어낸 <미술관의 탄생>이 있다.

ⓒ 시사저널 전영기
현대미술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5개의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지향하는 ‘개방과 소통’의 의지를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1팀장인 최은주·양민하,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시작해 현재 테이트 모던의 리서치 큐레이터로 있는 이숙경·리 밍웨이, 미국 뉴뮤지엄의 큐레이터 리처드 플러드와 작가 킴 존스, 일본 도쿄도 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유코 하세가와 모노하의 대표 작가 키시오 스가, 테이트 모던의 앤 갈라허와 마크 리, 인도 KHOJ의 디렉터 푸자 수드와 아마르 칸와르 그리고 독일 ZKM의 큐레이터 베른하르트 제렉세와 필립 비슬리 등 국내외 큐레이터 7인이 추천한 14명의 작가 중 토론을 거쳐 총 7인의 큐레이터와 최종 선정한 7인의 작가가 참여했다. 가히 글로벌한 멤버 구성이다.

이는 서울관의 재정 여건상 국제적인 작가의 소장품 확보가 어려운 현실을 프로젝트별로, 이른바 참신한 기획으로 현대미술의 이슈메이커와 담론 생산을 통해 국제적인 미술 중심으로 도약하려는 고육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제 미술관이라는 전시 시설보다 내용에 예산과 인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격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면, 정부나 민간의 재정적 지원이 시급하다. 좋은 자동차를 마련했는데 기름값과 운전할 이가 없어 세워두는 우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7인 작가들의 작품은 하나의 주제로 엮여 있기보다는 다원적이며 다층적이다. 하나의 특정한 흐름을 보여주기보다는 다양한 현장을 시각적으로 제공하고 경험하도록 한다. 시끄럽고 번잡스럽고 때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타이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리 밍웨이의 작품은 따뜻하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의 속성을 드러낸다. 그는 작지만 아름다운, 소소한 것에 감사하고 감동하는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따뜻하고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의 작품에서 꽃 한 송이를 취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전해줄 수 있다면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그런 점에서 베트남 전쟁에 해군으로 참전했던 스산하고 절박했던 경험을 드로잉과 각종 산업용 자재, 건축재 부산물로 구성해 보여주는 킴 존스의 <전쟁 드로잉>은 리 밍웨이의 작품과 대조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연결-전개>전에서는 큐레이터 최은주·양민하가 함께해 서울관이 보유한 역사적 맥락을 보여주는 ‘엇갈린 결, 개입’을 선보였다. 필립 비슬리의 <착생 식물원>은 마치 건드리면 반응하는 미모사처럼 반응한다. 작품의 의미와 주제를 항상 고민하는 우리 관객에게는 작품을 보고 즐기는 또 다른 방식이 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는 생경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낯익고 익숙하다면 이미 현대미술이라 할 수 없다.

우리가 미술관을 찾고 현대미술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는 그 생소한 환경에서 스스로 반응하고 그 반응을 스스로 확인하고 느끼는 것, 즉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곧 첫눈이 내릴 것이다. 아무리 감성이 메마른 이라 할지라도 첫눈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미술은 첫눈 같은 것이다. 여름에도 눈을 맞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미술관이다. 도심을 걷다 문득 낯선 곳으로 들어가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곳, 거울이 있는 집이 미술관이다.

최우람의 (위)와 현장설치 작업 서도호의 .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번듯한 외관 채울 창의력 필요한 때

같은 작품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반응하고 생각한다. 그것이 개성이고 독창성의 발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현대미술관을 ‘창의력의 보고’라 하고, 현대미술을 ‘독창성의 단초’라고 하는 것이다.

서울관의 위용을 만나면서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1995년 처음 역사적 상흔의 땅 기무사 주둔지를 지우고 미술관을 건립하자는 의견을 냈던, 지금은 세상을 떠난 시인 조병화, 건축가 장세양, 화가 이두식, 화랑 경영주 김창실 등이 그들이다. 개관식에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며 우리만 아는 미소를 나누었던 이들도 있다. 미술사가 김홍남, 현대화랑 설립자 박명자, 학고재 화랑의 우찬규 등이 그들이다. 이날 참석은 못했지만 미술사가 유홍준과 예맥화랑의 정근희 대표도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여기에 서울관의 개관을 위해 서명운동에, 청원에, 전시회에 동참한 수많은 시민·화가·예술인·언론인 그리고 건축계와 문화계 인사의 노력과 협력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주요했다. 또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한 서울관 건립 요구가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러 완성되기까지 역대 문화부장관을 비롯한 관료들의 노고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공은 미술관과 문화예술계로 돌아왔다. 이 미술관을 정말 세계적인 미술관 문화 융성의 거점 그리고 21세기 한국 문화를 창조하고 집적하는 기지로서 역할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모두가 내 일처럼 나서야 할 것이다. 새롭게 발걸음을 뗀 서울관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해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자. 잠시 숨을 고르고 기다리며 지켜보자. 첫술에 배부르기를 바라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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