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일가, ‘화들짝’ 놀라 ‘꼼수’ 부리나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3.11.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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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이사 연봉 공개 앞두고 줄줄이 사퇴…“돈만 챙기고 책임 안 진다” 비판도

베일에 싸여 있던 대기업 임원의 고액 연봉이 내년부터 공개된다. 1년에 5억원 이상 버는 고액 연봉자는 누구인지, 또 구체적으로 얼마나 받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관련법 개정에 따른 것이지만,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처럼 등기이사가 아닌 일부 재벌 총수의 연봉은 공개 대상에서 빠진다. “국회 논의를 거쳐 법률을 개정한 만큼 제대로 정착되도록 엉성한 그물코를 정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삼성전자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3분기 사업보고서를 보면, 등기이사 9명(사내이사 4명, 사외이사 5명) 가운데 올해 3분기 사내이사에게 지급된 금액만 총 159억원으로 1인당 약 39억7000만원이다. 총액은 알 수 있지만 개인별 연봉 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총 159억원을 사내이사 4명으로 나눠서 산정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LG는 구본무 회장 등 등기이사 3명에게 75억원이 넘는 보수를 지급했다. 한 해 전인 2011년보다 25억원 정도 늘어났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얼마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박성경 이랜드그룹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담철곤 오리온 회장(왼쪽부터)은 등기이사 연봉 공개 법안 개정이 한창인 올해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 시사저널 임준선·박은숙·연합뉴스
내년부터는 임원 개인의 연봉을 구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정부는 최근 자본시장법 개정안 시행에 따라 기업에서 연봉 5억원이 넘는 액수를 받는 임원들의 보수를 공개하도록 했다. 보수 총액은 급여·상여금·퇴직금 외에 주식 매수 선택권(스톡옵션)을 행사해서 얻은 이익금도 포함한다. 보수 규모를 공개해야 하는 기업은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 제출 의무가 있는 법인 2050곳(상장 기업 1600여 개 포함)이고, 상장회사 기준으로 5억원 이상의 보수를 받는 등기이사는 623명이다. 여기에는 재벌 총수 일가가 등기이사인 93명도 포함돼 있다. 현직 임원은 물론 그해 퇴직한 임원의 보수도 공개하도록 했다. 현직 때는 조금만 받다가 ‘퇴직위로금’으로 큰돈을 받아 가는 꼼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서태종 금융위원회 자본시장국장은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일부 기업의 임원에 대한 비정상적인 고액 보수 지급 관행이 개선됨으로써 기업 경영의 투명성이 제고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제도 시행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현직 임원만 대상으로 할 경우 거액의 퇴직금을 주는 방식으로 보수를 낮출 수 있어 퇴임자도 포함시켰다”고 덧붙였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금감원)은 그동안 지적돼온 일부 기업의 임원에 대한 비정상적인 고액 보수 지급 관행이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 실적이 나쁜데도 임원은 꼬박꼬박 고액을 챙겨 가는 행태에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김승민 금융위원회 자본시장국 공정시장과 사무관은 “국회 논의 과정에서 기준을 5억원으로 정한 이번 개정안으로 투자자의 알 권리를 확보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줄줄이 등기이사에서 사퇴하는 오너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재벌 총수, 예를 들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년 동안 얼마나 벌었는지도 알 수 있을까. 이번 제도가 시행돼도 이 회장의 연봉은 공개되지 않는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회장일 뿐 등기이사가 아니어서 얼마를 받는지 공개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등기이사란 이사회에 참석해 기업 경영과 관련된 주요 의사를 결정하고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갖는 임원을 말한다. 비등기이사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 회장은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책임 경영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14개 상장 계열사의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2005년 전문경영인 체제하의 책임 경영을 한다면서 삼성전자를 제외한 다른 계열사의 등기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어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 사건이 불거진 직후인 2008년 경영 은퇴를 선언하며 삼성전자 등기이사직에서도 이름을 뺐다.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에 복귀했지만 삼성전자는 물론 다른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 회장은 집무실, 전용기, 개인 차량 등 업무에 필요한 지원만 받고 월 급여는 받지 않는다. 다만 주식 배당액으로 지난해 375억원을 받았다. 이인용 삼성 커뮤니케이션팀장(사장)은 11월20일 기자들을 만나 “최근 삼성 등기이사의 보수를 공개할 때 이 회장의 보수는 왜 공개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왔다”며 “이 회장은 연봉을 받지 않기 때문에 공개할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건희 회장 외에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김재열 삼성엔지니어링 경영기획총괄 사장 등 삼성 오너 일가는 모두 비등기이사여서 개별 연봉을 공개할 의무가 없다. 삼성가에서 연봉 공개 대상자는 호텔신라의 등기이사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유일하다.

30대 그룹에서 비등기이사로 있는 총수 일가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허연수 GS리테일 사장,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박용현 연강재단 이사장, 박태원 두산건설 부사장,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조현상 효성 부사장, 최창영 고려아연 대표이사 회장, 정상영 KCC 명예회장 등이다.

재벌가 오너가 비등기이사는 연봉을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상 허점을 악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기업 오너 임원들이 줄줄이 등기이사직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2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신세계와 이마트 대표이사직을 사임했다. 3월에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롯데쇼핑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6월에는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이 지주사와 계열사 등기이사직을 내놓았다. 메리츠금융지주의 대주주(지분율 74%)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조 회장은 지난해 메리츠금융지주 11억원, 메리츠종금증권 28억원, 메리츠화재 50억원 등 모두 89억원의 보수를 받았다. 여기에 배당금 47억원을 합하면 한 해에 벌어들인 돈이 136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메리츠금융지주 당기순이익 960억원 가운데 14%에 해당한다.

8월에 레저·외식 부문 계열사인 이랜드파크 대표이사직을 떠난 박성경 이랜드그룹 부회장은 11월18일 지주회사 격인 이랜드월드 대표이사직에서도 사임했다. 그룹 내 핵심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서 모두 물러난 셈이다. 박 부회장은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의 동생이다. 박성수 회장은 2008년 건설 계열사인 이랜드건설 등기이사직을 사임하는 등 경영 일선에서 일찌감치 물러났다. 오너인 남매가 계열사 대표이사직에서 모두 빠진 셈이다. 2015년 3월까지 임기가 남은 담철곤 오리온 회장과 부인 이화경 부회장도 11월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았다.

총수 일가, 등기이사 사퇴해도 지배력 여전

이들 기업은 오너가의 등기이사직 사임 배경에 대해 ‘전문경영인 체제 강화’라고 설명했다. 그룹의 외형이 커져 오너 일가는 총괄 개념으로 그룹을 경영하고 각 계열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책임 경영을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 앞으로 해외 사업 등을 챙기는 등 주로 글로벌 경영에 주력한다는 게 해당 기업들의 공통된 해명이다.

그러나 세간의 해석은 다르다. 오너 가족이 경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상법상 주식회사의 대표이사는 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영 실패나 불법 행위로 인해 오너가 처벌받으면 그룹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1986년 이랜드 대표이사였던 박성수 회장은 이후 홈에버·킴스클럽 등 유통업체 인수·합병(M&A) 과정에서 노사 갈등으로 대표이사의 책임 문제에 직면했다. 당시 박 회장은 노조와 법적 대응 당사자로 나서야 했다.

또 경제민주화 바람과 대기업 오너 일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시대적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이번 제도 변경은 정치권을 중심으로 대주주와 대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경제민주화법의 일환이라는 시각이 강하다.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때 내놓은 경제민주화법 관련 내용에 기업 임원의 연봉 공개도 있었다”고 말했다.

오너 일가가 등기이사직에서 떠났다고 해서 그룹의 경영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다. 회장·부회장 직함은 유지하면서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연봉을 공개하지 않고,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지휘봉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에 재벌 총수 일가가 등기이사직을 떠나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번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더라도 회사 지배력은 크게 훼손되지 않기 때문에 등기이사 사퇴가 도미노 현상처럼 번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보수 공개 대상을 비등기이사와 집행이사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연봉 공개 대상을 비등기이사나 집행이사까지 확대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선을 그었다.

임원의 보수를 공개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제기하며 기업 임원의 연봉 공개로 파생될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아무리 기업 임원이라지만 개인의 수익을 밝히는 것은 가혹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여론 재판을 통해 당사자에게 망신을 주고, 대중에게는 불만을 자극하거나 좌절감을 안기는 결과로 귀착될 수도 있다. 노조와 시민단체가 임원 보수 문제에 끼어드는 일도 예상된다.

무엇보다 반(反)기업 정서가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깊다. 성과에 대해 피드백을 주는 기존 보상 시스템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책임 경영이 후퇴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 비등기이사인 오너 일가는 회사의 경영 실패 등에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재계 “환경 변화에 대기업 적응할 시간 줘야”

그러나 기업 임원의 보수 공개 제도는 세계적 흐름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했고 일본도 2010년부터 임원의 연봉을 밝히고 있다. 국내 경제는 상장사, 특히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만큼 대기업들의 경영 투명성이 절실한 상황이다. 주주나 투자자뿐만 아니라 국민에게도 대기업 총수 일가를 포함한 경영진이 떳떳하게 보수를 밝힘으로써 경영 성과에 비해 과다하게 돈만 챙긴다는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재 재벌 총수 일가의 등기이사직 사퇴는 정부에 바뀐 기업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기업정책실장은 “제도 도입이 늦은 감이 있지만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면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그룹의 지배구조가 더 음성적으로 변할 우려가 있다”며 “임원 연봉 공개 범위가 앞으로 비등기이사와 집행이사로까지 확대될 것으로 기업들도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환경 변화에 적응할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자동차·SK·LG·롯데·현대중공업·한진·한화 등은 대주주가 등기이사로 있다. 따라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비롯해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허동수 GS그룹 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등의 보수가 공개될 전망이다. 부영·한진중공업·미래에셋·대성은 등기이사 평균 연봉이 5억원을 넘는 500대 기업 계열사가 없거나, 대주주가 등기이사로 올라 있지 않아 대상에서 제외된다.


등기이사 연봉 공개 세계적 추세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서구에서 임원의 연봉 공개는 전문경영인에 대한 주주의 감시 장치로 고안됐다. 이 제도는 미국·영국·독일·일본 등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세계적 형태이기도 하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는 보수 금액의 상한도 제한하는 추세다.

1933년부터 자본시장 관련 제도를 재정비하면서 이 제도를 도입한 미국은 등기 여부와 관계없이 CEO·CFO 등 주요 고액 연봉자의 보수를 공개한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는 구제 자금을 받은 AIG 등 금융사가 임원들에게 고액의 보너스를 지급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월가 점령 시위’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영국과 독일은 한국처럼 등기이사만 공개 대상이지만 보수 금액에 대한 제한은 없다. 연봉 금액과 상관없이 모든 등기이사는 보수를 공개하게 돼 있다. 일본도 2010년 법을 개정해 1억 엔(약 10억7000만원) 이상 보수를 받는 상장사 등기이사의 보수액과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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