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언론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진실이 모든 것에 앞서는 가치라는 진실에 대한 신앙이다.”
지난 2월4일 별세한 언론계의 거목이었던 박권상 전 KBS 사장은 평소 이렇게 강조하곤 했다. ‘진실에 대한 신앙’으로 요약되는 그의 언론관은 언론의 본령이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말해주는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그가 말하는 ‘진실’은 ‘사실’과는 다르다.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나타난 사실들을 둘러싼 포괄적이고 완전한 진실’이 그가 말하는 ‘진실’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가 날로 힘들어지는, 보도에 있어서 정치적인 편파성이 두드러지는 지금에 돌아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규정이다.
정론직필로 언론의 책임과 자유 위해 헌신
그러나 군부 정권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동아일보 논설주간으로 있던 1980년. 그는 신군부의 검열에 맞서 5월16일부터 5일간 신문에 사설을 게재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언론 사상 초유의 ‘무사설(無社說) 사건’, 즉 ‘무사설 저항’이었다. 그해 7월, 신군부의 압박 속에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과 관련해 쓴 “공정한 재판으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사설이 그의 마지막 사설이었다. 계엄사는 검열에서 전문을 삭제했고, 고인은 한 달 뒤인 1980년 8월 강제 해직됐다.
1989년 시사저널 창간과 더불어 편집인 겸 주필로 언론계에 돌아온 고인은 정론직필의 필봉을 휘두른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1998년부터 5년간 KBS 사장으로서 공영방송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남북한 합동 생방송을 성사시키고, 언론사 사장단 대표로 방북하는 등 남북 교류에 이바지했다. <일요스폐셜> 같은 교양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보도에서 중립성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KBS <9시 뉴스>가 MBC <뉴스데스크>를 앞서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영국 BBC를 모델로 한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영국 신사’라고도 불렸던 고인은 숱한 칼럼과 <자유언론의 명제> <영국을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대권이 없는 나라>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또 국제 흐름에 밝은 언론인이었다. 지난 2007년 방문했던 그의 자택은 책과 신문 자료, 외국 방문 사진 등으로 뒤덮여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다. 언론계의 큰 별이 졌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올 컬러 인쇄의 정통 시사지를 표방한 데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언론인의 표상으로 인정받는 박 전 사장이 창간을 주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사저널은 창간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진정한 언론의 출현에 목말라 하던 해직 기자 등 수많은 지원자가 시사저널 편집국에 몰려들었음은 물론이다. 시사저널이 창간 이후 1년 만에 정기 구독자 10만명 돌파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데에는 이처럼 든든한 박 전 사장의 크나큰 존재감과 브랜드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박권상 브랜드’는 또 시사저널이 창간 직후 잇달아 추진했던 스티븐 호킹, 빌리 브란트 등 세계적 석학·정치인 초청 행사의 성공에도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
박 전 사장이 추구한 새로운 시사주간지의 방향은 ‘참언론’이었다. 이는 그가 시사저널 창간호에 쓴 ‘디오게네스 철학과 참언론’이라는 제목의 시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언론인에게) 아마도 가장 소중한 것은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추구했다는 ‘진실’에 대한 신앙이 아닐까. 그것은 어떤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나타난 사실을 둘러싼 포괄적이고 완전한 진실이다.”
박 전 사장은 정론직필이라는 언론의 사명을 편집국에 전파하면서 동시에 취재 시스템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취재원과의 관계 정립이다. 박 전 사장은 시사저널 기자들에게 절대로 취재원의 접대를 받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취재원에게 식사 대접이나 향응을 받으면 자칫 인정에 치우쳐 진실을 알려야 하는 기자의 소명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취재 비용은 얼마든지 청구하라는 지시를 덧붙였다. 기자들은 대환영이었다.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당당하게 취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를 비롯한 시사저널 기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이런 지침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당시로서는 낯선 취재원 접근이었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놀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대우는 처음 받아본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취재하는 기자나 취재에 응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만족할 수 있고 당당해질 수 있는 혁신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사저널 편집국에서 지켜본 박 전 사장은 오랜 영국 생활이 몸에 배어서인지 매우 합리적인 모습이었다. 영국 신사 같은 풍모가 강했다.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어조는 강했고, 한번 결심하면 대부분 관철했다. 무엇보다 독자를 중시해야 한다는 신념이 투철했다. 모든 것이 ‘독자 우선’이었다. 독자에 대한 친절함이 기자에게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전 사장의 합리성과 독자 우선 철학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일화가 필자의 기억에 남아 있다. 필자는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들어와 두 번의 시작호와 창간호 제작 등에 참여하고 1년여 동안 시사저널 기자로 지내다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무렵에는 정치부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떠나기 전 기사 한 편을 써야 했다. 그런데 기사가 나갈 즈음에는 이미 회사에 사표를 낸 상태이기 때문에 글 쓴 기자 이름을 밝히는 ‘바이라인’ 표기 문제가 아리송해졌다. 그때 명쾌하게 해답을 내려준 이가 박 전 사장이다. 박 전 사장은 필자의 바이라인에 기자라는 명칭 대신 ‘프랑스 유학 준비 중’이라는 타이틀을 내려주었다. 영국 등 해외 언론들에서는 일반적인 관행이라는 설명과 함께. 기사 내용은 물론 바이라인과 같은 세세한 부분에서도 독자에게 정확한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박 전 사장의 몸에 밴 합리성이 새삼 되새겨지는 기억이다. 김재태│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