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판알 튕기며 장외로, 물타기로 판 흔들기
  • 엄민우 기자·양정대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4.02.2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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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 따른 여야의 지방선거 대처법

정국이 다시 한 번 소용돌이치고 있다. 큰 선거를 앞둔 시점에 불거진 대형 비리 의혹은 여야 정치권을 들썩이게 하기 마련이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의혹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야권에 활기가 돌고 있다. 민주당은 그야말로 때아닌 호재를 만났다는 분위기다. ‘김용판 1심 무죄’ 논란을 선거 이슈로 키워보려 했지만, 막상 여론의 힘을 받지 못하자 고민에 빠져 있던 차였기에 더욱 고삐를 당기는 모습이다. 이번 기회에 아예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반면 높은 여론조사 지지율로 내심 ‘지방선거 완승’까지 꿈꾸던 새누리당은 사건의 불똥이 여권으로 튀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다.

2월21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김한길 대표(왼쪽)·전병헌 원내대표. ⓒ 연합뉴스
■ 민주당, ‘호재’ 만났으나 계파 갈등이…

민주당이 이번 간첩 증거 조작 의혹 사건에 바짝 매달리는 것은 그 파급력이나 사건이 갖는 성격 때문만이 아니다. “확실한 물증이 있다”는 점이 민주당으로 하여금 이번 건에 온 동력을 집중하게 하고 있다. 이번 논란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민주당 관계자는 “간첩 증거 조작 건에 총력을 모으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건보다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공세적으로 정국을 이끌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이석기 공판 건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굳이 ‘종북 사건’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우선 장외투쟁과 함께 국정조사를 실시하고 나중에 특검을 도입하자는 것이 민주당의 작전이다.

민주당은 이번 증거 조작 의혹 사태가 ‘국가정보원(국정원)과 검찰의 합작품’이라며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물론, 남재준 국정원장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공세를 펼친다. 특히 국정원이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국회 국정원개혁특위 야당 간사 문병호 의원은 “간첩 조작 사건은 거짓말이 또 거짓말을 낳는 형국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정작 조작의 핵심에 있는 국정원이 계속 침묵을 지키는 것은 위조를 시인하는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은 이번 사건을 국정원 댓글 대선 개입 의혹과 더불어 국기 문란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모두 ‘국정원’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화력을 한곳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민주당 관계자의 설명이다.

민주당이 넘어야 할 산은 내부에 있다. 현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그것이다. 이는 현재 민주당의 주류인 ‘비노(非盧)’ 진영도 마찬가지다. 비노 계열의 한 민주당 관계자는 “장외투쟁을 하고 왔지만 현재 지도부가 과연 이번 건을 폭발력 있게 끌고 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매번 수비수가 예측 가능한 슛을 때려 번번이 방어벽에 부딪쳤다. ‘친노(親盧)’가 물러나고 비노가 당권을 잡으면 뭔가 잘되겠지 싶었는데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친노 진영의 정청래 의원이 공개적으로 당 지도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정 의원은 증거 조작 논란이 한창이던 2월20일 국회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지금 당 지도부 얼굴로 6·4 지방선거를 치를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하고 있고, 조기 선대위를 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민주당은 위기이자 전시 상황인 만큼 전투형 리더십이 필요하다. 문재인 의원이 구원 등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해묵은 계파 갈등으로 날려버리는 것은 아닌지 당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2월19일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대화를 나누는 황우여 대표(오른쪽)·최경환 원내대표. ⓒ 연합뉴스
■ 새누리당, 지방선거 파장 차단 고심

“왜 이렇게 악재가 자꾸 터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진짜로 뭐가 잘못된 건지 검찰 수사를 통해 확인해보자’고 얘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서울시청 간첩 사건의 증거 조작 의혹에 대해 한 새누리당 핵심 당직자가 한숨을 내쉬며 한 얘기다. 당분간은 의혹 자체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6월 지방선거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서다. 실제로 이번 논란이 불거진 후 시간이 지날수록 새누리당의 대응은 강경해지는 듯한 분위기다. 처음에는 “의혹이 있으면 밝혀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입장이었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중국 정부가 밝힌 ‘위조’의 의미가 절차상의 문제일 수 있다는 식으로 논점을 흐리기 시작했다. 중국 대사관이 공문을 통해 밝힌 출입경 기록 위조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국정조사와 특검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으로 바뀌었다. 초반만 해도 새누리당 내에선 “특검은 몰라도 국회 차원의 진상 조사는 필요할 것 같다”(법사위 소속 한 의원)는 분위기가 일부 있었다. 하지만 “검찰이 수사를 통해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게 먼저”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국정조사와 특검 모두에 대해 ‘절대 불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여기엔 이번 사안이 6월 지방선거에 미칠 파장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정치적 판단이 깔려 있다.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국정원 댓글 사건 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국정원과 검찰이 연루된 증거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여권에는 악재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친박계 실세 의원은 “그렇잖아도 국정원과 검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쟁점화된다면 지방선거는 해보나 마나 아니겠느냐”고 우려했다.

새누리당은 이번 증거 조작 의혹에 색깔론을 덧씌우는 데에도 주력하고 있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2월19일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민주당을 향해 “서울시 공무원으로 잠입한 간첩 혐의자를 편들어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증거 조작 논란을 ‘공안 이슈’로 확대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한 발언이다. “민주당이 간첩 사건 자체가 조작됐다는 식으로 몰아간다”(정우택 최고위원)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제명안을 고리로 민주당을 압박하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민주당을 공안 이슈 안에 묶어놓음으로써 여권 지지층의 결속을 끌어내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원내대표실 관계자는 “민주당 내부에서 이석기 의원 제명안 처리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더라”며 “이번 사건을 제명안 처리 문제와 패키지로 묶을 경우 민주당도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이번 논란과 관련해 사실상의 ‘물타기 전략’으로 일관할 가능성이 크다. 검찰이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중국 정부의 문서에 대해 당사자인 중국 정부가 위조라는 의견을 밝혀왔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순간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 붕괴의 결정판’이라는 야당 측 주장이 민심을 파고들면서 6월 지방선거에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신 새누리당 지도부는 최근 청와대 측에 한중 외교 라인의 적극적인 가동과 함께 민생 현안에 대한 파격적인 정책 제시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민생 문제로 돌려세우기 위함이다. 한 친박계 중진 의원은 “이번 사안의 성격상 당에서 방어를 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며 “무엇보다 정부가 이 문제를 빠른 시간 내에 중국 측과 외교적으로 매듭짓지 않으면 우리가 난처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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