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괜히 키워줬나” 후회하는 백악관
  • 김원식│미국 통신원 ()
  • 승인 2014.03.0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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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미국 불신 분위기 확산…오바마 4월 방문이 분수령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좋은 패자(good loser)’로 대우받는 데 신물이 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패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 국제공공정책대학원 교수인 아키야마 노부마사의 이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 우익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대변한 발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베 일본 총리는 지난해 12월26일 취임 1주년을 기념해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미국 워싱턴 정가는 충격에 빠졌다.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로 명명된 아시아 중심 정책을 표명한 미국은 기나긴 중동전쟁에서 발을 빼고 급성장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모든 힘을 아시아로 재분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펴고 있다. 대니얼 러셀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미국에 의해 수십 년 동안 제공됐던 ‘안보 우산’이 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보장해왔다”며 “균형(balance) 정책은 중국의 영향력이 팽창하는 시기에 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미국 행정부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2013년 9월25일 미국을 방문한 아베 총리가 뉴욕증권거래소를 향해 가고 있다. ⓒ AP연합
“‘나 홀로 군사 대국’ 지향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미국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현실적으로 중요한 게 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삼각 동맹이 부드럽게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가장 심각한 건 중국의 반발이 아닌, 한국의 반발이다. 워싱턴 정가가 아베 총리의 신사 참배 당일이 휴일이었음에도 주일 미국 대사관을 통해 “실망했다(disappointed)”고 밝힌 사실은 불안정한 삼각관계에 대한 우려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참배 직전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말을 믿고 있었던 터라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베의 돌출 행동을 보면서 ‘아베와 함께 동아시아 패권 유지 전략을 전개해갈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동맹 전략을 최우선시하는 미국을 두고 아베 정부가 ‘나 홀로 군사 대국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쉴라 스미스 미국 외교관계위원회(CFR) 선임연구원은 “문제는 아베 총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의 전략적 목표가 무엇인지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아베 총리에게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가 확실한 계획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게 스미스 연구원의 지적이다.

물론 일본에 대한 워싱턴 정가의 입장이 확 바뀐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돌출 행동으로 “일본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등장시킨 것은 분명하다. 백악관의 한 고위 관계자가 “존 케리 국무장관은 일본을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돌발적 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50년대 이후 미국은 지금 아베가 주장하고 있는 재무장을 통한 군사력 강화를 늘 일본 측에 주문해왔다. 그렇기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베가 이번 사태로 잃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60여 년 동안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평화헌법’을 내걸고 공짜로 국가 방위를 해왔다. 그런데 아베가 미국의 군사적 부담을 짊어지겠다고 나서니 미국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두통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베는 이 점을 노리고 ‘일본이 계속해서 미국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던지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측면도 있다”는 게 FT의 분석이다.

미국 언론들도 오바마 정부의 딜레마를 비슷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베 정부가 초강수를 던지고 나오자 중국과의 관계 개선과 견제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아시아 동맹들과의 관계를 강화시키려던 미국의 전략이 흔들리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시각이다. 일리 라트너 미국안보센터(CNAS) 연구원은 “현실 세계에서는 한쪽과의 갈등 없이 양쪽을 동시에 관리할 수 없다. 당연히 중국과 전통적인 아시아 우방과의 관계를 모두 강화하려는 ‘균형 정책’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고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정책을 비판했다.

미국만 중국을 견제하려는 게 아니다. 중국이 급팽창하자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일본의 커지는 두려움은 미국을 난처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미국 국방부 고위 관리 출신인 호주과학원의 휴 화이트 교수는 “중국이 성장하면서 일본으로선 중국의 파워에 대한 걱정이 커졌고, 미국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며 “지금 일본은 미국이 일본을 방어해줄 것인지, 아니면 1945년 이후 금지된 자체적인 군사력 독립을 가능하게 해줄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 입장에서는 일본의 민족주의가 불러올 반작용에 대해 어느 정도 조바심이 있다. 중국은 미국에게 ‘중국과 대립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일본이라는 이익을 희생하라’고 요구한다”고 밝혔다.

도쿄의 일본 내각 안에서는 “미국이 사실상 중국의 일방적인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적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친중파 인사들이 오바마 주변에 배치되면서 지일파 인사들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는 분위기도 있다. 일본 역시 미국에 대한 불신 분위기가 퍼지는 셈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점증하는 군사비를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처지다. 일본은 오랫동안 국방비를 국내 총생산(GDP) 대비 1% 이내로 묶어뒀지만 지금은 기꺼이 국방비를 증액할 의사가 있는 아베 총리가 관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가는 반드시 받겠다는 게 아베의 생각이다. 일본을 아예 ‘통제(control)’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워싱턴 정가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4월 아시아를 방문하는 오바마가 어떤 묘안을 가지고 올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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