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다치는 상황 좌시하지 않을 것”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4.03.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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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남재준 자진 사퇴’ 카드 만지작…검찰 피해 최소화 초점

“구룡산을 넘어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슨 말일까. 구룡산은 서울 서초구 염곡동에 위치한 산이다. 남동쪽으로는 내곡동, 북서쪽으로는 서초동이 있다. 국정원(내곡동)과 대검찰청(서초동)을 가로막고 있는 산이 바로 구룡산이다. ‘간첩 증거 조작 의혹’ 사건과 관련해 타깃이 국정원에서 검찰로 옮겨오는 것에 대한 여권과 사정 당국의 경계심이 배어 있는 말이다.

지금 초미의 관심사는 국정원은 물론 검찰도 증거 조작을 어디까지 알았고, 얼마나 깊이 관여했느냐 하는 점이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검찰도 국정원도 (사전에) 몰랐으며, 검찰이 엄중한 수사를 통해 국정원과 연관돼 있는 일부 관계자의 위법 행위를 낱낱이 밝혀내는 것”이란 희망이 여권에서 흘러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3월22일 청와대에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 연합뉴스
지난 3월9일 저녁 9시쯤, 국정원은 느닷없이 ‘국정원 발표문’이라는 이메일을 기자들에게 발송했다. “최근 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과 관련해 세간에 물의를 야기하고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송구스럽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발표문은 “조속히 검찰에서 진실 여부가 밝혀지도록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일요일 밤 급작스럽게 나온 국정원의 발표문은 다음 날인 10일 오전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되풀이됐다. 박 대통령은 “증거 자료 위조 논란이 일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검찰은 이번 사건에 대해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고 국정원은 ‘검찰 조사’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 차례는 새누리당이었다. 황우여 대표는 12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대통령께서도 엄정 수사 및 사후 조치, 문책 등을 강조한 만큼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린 후 그 책임 소재에 따라 문책하는 게 당의 입장”이라고 못 박았다.

‘남해박사’ 구호 등장…남재준 책임론 부상

국정원·청와대·새누리당이 돌림노래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선 검찰 수사, 후 문책론’이다. 세 곳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이 터진 지난 2월 중순 이래 한 달여 동안 침묵을 지키거나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해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2~3일 만에 입장을 급선회한 것이다. 심각함을 인식한 여권 내부에서 뭔가 대책 마련에 나섰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여기에는 청와대의 복잡한 셈법도 얽혀 있다.

우선 ‘후 문책론’이 주목된다. 이번 사건의 책임은 남재준 국정원장이 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민주당은 이른바 ‘남해박사’(남 원장 해임, 박 대통령 사과)라는 구호 아래, 남 원장 해임 촉구 결의안까지 제출할 기세다. 여당 내에서도 ‘비박(非朴)’ 의원을 중심으로 남 원장 책임론이 확산되고 있다. 6·4 지방선거를 전면에서 치러야 할 당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번 사건을 조기 수습해야만 한다. 자칫하다간 지방선거 참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쉽사리 남 원장을 경질할 수도 없다. 남 원장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박근혜정부를 이끄는 쌍두마차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래서 나오는 안이 남 원장의 ‘자진 사퇴’ 카드다. 간첩 사건의 증거 위조는 국가보안법상 무고·날조죄로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 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무고 또는 위증을 하거나 증거를 날조·인멸·은닉한 자’가 이에 해당한다.

남 원장을 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남 원장이 증거가 위조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위조된 증거를 고의적으로 법원에 제출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 원장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옷을 벗는 상황을 연출한다면 청와대의 부담을 줄이고 자신의 명예도 지킬 수 있는 1석2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여권이 이번 증거 조작 의혹 사건의 처리 방침에서 유독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선 검찰 수사’다. 이에 화답하듯 검찰은 박 대통령의 유감 표명 발언이 나온 지 7시간 만에 국정원에 대해 전격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문서 위조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 파견 직원 이인철 중국 선양 영사에 대해서도 허위 공문서 작성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다. 

그러나 검찰 역시 이번 증거 조작 의혹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까지 밝혀진 여러 정황을 볼 때 검찰은 국정원의 증거 조작에 대해 공조했거나 최소한 방조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런 검찰이기에 검찰 수사가 제대로 진행될 것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여권과 국정원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검찰 수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검찰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1월10일 대검찰청 별관에서 열린 2014년 검찰동우 신년교례회에 참석하고 있다. ⓒ 뉴시스
여권 “특검만은 막아야 한다”

이번 증거 조작 의혹 사건으로 국정원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현재 국정원은 개점휴업 상태로, 대공 수사 라인에 속해 있는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까지 책임론에 휩싸이면 박근혜정부의 사정 라인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지금 상황에서 국정원의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여기에 검찰까지 맞물리면 정국 운영이 위태로울질 수 있다. 청와대에서 ‘검찰만은 지켜야 한다’는 기류가 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청와대까지 나서 검찰 수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특검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2월 상설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당초 민주당에서는 이번 사건을 상설특검 1호 사건으로 다룰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설특검은 법안 통과 3개월 후인 오는 6월에나 시행될 예정이다. 이 때문에 별도의 특검법을 발의해 이번 사건을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다수당인 새누리당의 동의가 필요하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이 특검에 동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검찰이 증거 조작 의혹 수사와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 사건을 분리해 대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검찰이 만약 유씨에 대한 공소를 철회하게 되면 증거 조작을 검찰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 때문에 검찰은 유씨의 항소심 재판에 전산 전문가를 증인으로 세우기로 했다. 이와 동시에 일부 언론을 통해 검찰발 기사로 유씨의 간첩 혐의 내용이 계속 보도되고 있다. 야권에서는 검찰이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김 실장이 지난해 8월 청와대에 입성한 후 검찰은 채동욱 전 총장이 낙마하고 현재의 김진태 총장 체제로 전환됐다. 야당은 김 총장 취임 당시 “김 실장 최측근 인사”라며 “김 실장이 검찰 조직을 장악하려는 시도”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를 보여주듯 김 총장 취임 이후 공안 라인이 대거 중용됐다. 검찰 관계자는 “지난 3월11일은 김 총장 취임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검찰 내 위기감이 상당하다. 만약 증거 조작 의혹 사건에 검찰이 연루된 것으로 나오면 검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질 것이고, 공안 라인 검사들이 줄줄이 옷을 벗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김 실장이 이를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정원은 어차피 그렇게 됐지만 검찰의 피해는 최소화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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