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보기관이 정치 행위자여선 안 돼
  • 박명호 | 동국대 정치학 교수 ()
  • 승인 2014.03.1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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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에게 부담 안겨…국정원 지도부 개편해야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우선 사건의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처음 출발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이었는데, 지금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의혹 사건’이다. 다음은 국정원의 말 바꾸기다. 지난 2월 중순 주한 중국 대사관의 “공문서가 위조됐다”는 통보 이후, 이에 대한 국정원의 설명은 일관성이 없었다. 처음 국정원은 문제의 공문서를 “중국 선양 주재 총영사관을 통해 입수했다”고 했다가, “정식으로 발급 요청을 한 것은 아니지만 위조는 아니다”고 했다. 국정원은 “같은 인장도 힘의 강약 등에 따라 굵기가 달라진다”는 설명을 하기도 했다. 결국 국정원은 협력자가 공문서 위조를 시인하고 자살을 시도한 후에야 “우리도 속았다”고 했다. 다음에 보여줄 것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국정원 압수수색, 현 정부에서 ‘연례행사’

우선 여기에서 두 가지는 분명하게 짚어야 한다. 물론 수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최종 결론은 유보한다. 엇갈리는 주장과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범위를 최대한 좁혀 국정원 협력자의 진술과 자살 시도 때의 유서 내용을 중심으로 보자.

남재준 국정원장이 야권과 여권 일각에서 퇴진 요구를 받고 있다. 요즘 국정원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원훈이 무색하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 시사저널 포토
첫째, 서울시 공무원의 간첩 혐의 증거는 조작된 것인가? 현재 여러 정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국정원 협력자가 “국정원에 준 자료는 위조됐고 국정원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정원 협력자의 폭로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국정원이 공문서의 조작 사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문서 조작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정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제기하듯 국정원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항소심 중반 전후부터 문건 조작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면, 이에 대해 국정원 지도부에 어떤 식으로든 보고가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증거 조작 의혹 사건의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국정원은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된다. 만약 국정원이 간첩 혐의를 입증할 증거 자료에 대해 내부 검토와 교차 스크린 등을 거쳤음에도 그것이 위조됐다는 것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라면? 국정원의 ‘무능(無能)’이다. 만약 국정원이 공문서가 조작된 것을 사전에 알았으면서도 간첩 증거로 제출했거나 조직적으로 증거 조작을 주도했다면? 국정원의 ‘부도덕(不道德)’이다. 결국 이는 대한민국 국가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결정하는 문제다. 국가 정보기관으로서 국정원의 능력에 대한 국민적 의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 유우성씨는 간첩인가?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고 그가 간첩이라는 결정적 물증은 없다. 더구나 그의 간첩 혐의를 뒷받침할 공문서는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간첩이 아닌가? 물론 아직 모른다. 국정원 협력자는 “유씨는 간첩이 분명하다. 증거가 없으니 처벌이 불가능하다면 추방하라”고 했다. 국정원과 검찰에서 그의 간첩 혐의를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여러 증거 중 하나에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혐의 자체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이렇게 보면 현재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과 ‘간첩 증거 조작 의혹 사건’이란 두 개 사건이 진행 중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대통령이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은 “증거 자료의 위조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검찰은 이번 사건을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고 국정원은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박 대통령은 “수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등장은 불가피했다. 국정원에 사실상 무한 신뢰를 보내준 박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이 난처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정원은 세 번의 검찰 압수수색을 당했다. ‘국가 정보기관 굴욕 사건’이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국가 정보기관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일은 흔치 않다. 검찰의 국정원 압수수색은 박근혜정부에서만 벌써 두 번째다. 연례행사가 된 것이다.

대다수 국민은 국정원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어찌 보면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에 필요한 불가피한 일을 하는 곳이 국가 정보기관이기 때문이다.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 국정원은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지난 1년은 ‘국정원 주도’의 정국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답이 보인다. 무엇보다 박근혜정부 1년 동안 국정원이 대한민국 정치의 주요 행위자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첫 출발은 ‘국정원의 대선 댓글 개입 의혹’이었다. 이는 현 정부 출범 전의 일이었지만,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이 때문에 박근혜정부의 출범 초기 국정 동력은 크게 위협받았고 정치적 후유증도 깊었다.

국정원이 스스로 정치적 논란의 한복판에 선 것은 지난해 6월,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공개가 계기였다.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 이후 정치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관련 발언을 했는지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물론 이 논란은 여야의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부합했지 아무런 국가적 이익도 국민적 공감도 없었다. 그 후에도 국정원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설(說) 뒷조사 개입 의혹에도 휘말렸다. 지난 1년은 ‘국정원 주도의 정국’이었다. 6·4 지방선거를 3개월 정도 앞두고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의혹 사건으로 국정원은 다시 한번 정국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결국 국정원발(發) 정치적 부담은 고스란히 박 대통령에게 향하고 있다. 이제 박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국정원 지도부가 가볍게 해주어야 한다. 국정원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도 이전만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검찰의 국정원 압수수색이 대통령의 증거조작 의혹에 대한 유감 표명과 문책 언급 직후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렇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국정원에 이른바 ‘셀프(self) 개혁’을 주문했고 이는 대통령이 국정원 지도부에 대한 정치적 신임을 유지하고 있다는 징표로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정원 지도부는 대통령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은 그 책임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 한다.

국가 정보기관이 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기능하고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을 준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국정원은 지금부터 국가 정보기관으로서 자신들의 도덕성과 능력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첫 출발은 국정원 지도부 개편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국정원의 재탄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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