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이 시진핑에게 “미국이 꼼짝 못하는 거 봤지”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4.03.2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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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전에서 연패하는 오바마…패권 전쟁 벌이는 중국 자극할 수도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로 하루아침에 갈아타는 게 쉬울 턱이 없다. 크림자치공화국의 수도인 심페로폴에는 요즘 기대와 혼란이 뒤섞여 있다. 압도적인 찬성으로 러시아에 합병되기로 한 것은 기대 요소다. 3월18일 러시아와 크림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합병 조약에 따르면, 크림공화국의 명칭은 이제 ‘러시아 연방 크림공화국’이 된다. 주민들에게는 모두 러시아 국적이 부여되는데, 1개월이 지나도록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면 현재의 국적을 계속 유지한다. 12월 말까지 갖게 될 전환기에는 법률 및 금융 서비스 등을 러시아와 통합한다. 공용어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타타르어다. 크림공화국의 현지시간 역시 2시간 앞당겨져 모스크바와 같아진다.

기대가 큰 만큼 크림반도의 현재는 불안하다. 신선한 식료품이 떨어져가고 있다. 이제는 남남이 된 우크라이나 본토에서 받아오던 상품도 동나고 있다. 물, 전기, 가스 등도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 의존도가 80%에 달했는데 만약 이게 차단된다면 당장 생활에 타격을 입는다.

ⓒ AP 연합
우크라이나계 은행들은 현금 부족 사태에 빠졌다. 현금인출기에서 뽑을 수 있는 현금은 한 사람당 1일 500그리브나(약 5만원)로 제한하고 있다. 식당 등에서는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 크림공화국은 우크라이나 통화인 그리브나를 내년 말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루스탐 테미르갈리예프 크림공화국 제1부총리는 아예 4월부터 그리브나를 폐지하고 러시아 루블화로 바꿀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도 크림의 불안 요소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군 기지를 포함한 국가 자산을 접수할 경우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 자산을 접수하겠다”고 밝혔다. 어떤 모양새를 띠느냐에 따라 두 국가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위험이 존재한다. 

푸틴, 러시아와 유럽 사이 명확한 선 긋기

크림반도에 이런 기대와 불안을 전파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분명한 방법으로 그는 크림을 장악했다. 유럽연합(EU)은 당황했고 미국은 대서양 건너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한때 러시아령이었던 크림반도의 지배권을 신속하게 복구하면서 푸틴 정부의 기반은 공고해졌다. 크림공화국 합병에 찬성하는 러시아인이 80%가 넘는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 패배감에 사로잡혔던 러시아인들은 강한 지도자를 은연중에 원했고, 푸틴은 이를 만족시키고 있다. 다음 초점은 러시아의 확대 야욕이 어디까지 가느냐다. 친(親)러시아 주민이 많은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도 개입할 것인지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국제법이 아니라 무력의 법칙에 따르는 것을 좋아한다.” 푸틴은 3월18일 러시아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크림반도 전역에 군대를 보낸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의 경고를 무시하고 단번에 합병조약까지 체결했다. 그동안 러시아는 주도면밀하게 크림공화국의 분리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사 소식통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3월 초까지 크림반도 전역에 보내진 러시아군은 특수부대와 군 정보기관 정예부대가 중심이 됐는데 이들은 충돌을 피해가며 빠르게 크림반도를 장악했다. 

푸틴 대통령이 크림 편입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로 미국과 유럽에 대한 불신이 꼽힌다. 푸틴의 시각은 이렇다. 그는 친EU 세력이 중심이 된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의 배후에 미국과 유럽의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이반 크라스테프 리버럴전략센터 이사장은 “푸틴이 크림 문제를 군사력으로 해결한 것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양의 게임 규칙을 바꾸고 싶어서”라고 분석했다. 크라스테프 이사장은 푸틴 대통령이 크림공화국 문제의 해결법을 통해 서양에 결투장을 내밀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서양의 근대적 가치를 거절하고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려고 한다. 푸틴에게 크림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크림은 정말 시작일까.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이 지역에서는 친러시아 주민들이 연방제 등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잇따라 주도하고 있다. 충돌로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면서 러시아가 주민 보호를 이유로 개입에 나설 가능성도 커졌다. 푸틴의 ‘군사 개입’은 우크라이나 새 정부를 흔들어 서방 세력의 확대를 눌러버릴 수 있는 꽃놀이패다. 새로운 정권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압력을 높이고 중·장기적으로는 친러시아파 정권의 수립을 목표로 삼고 있다. 크림공화국 합병과 우크라이나 개입 확대가 결국 러시아에 이익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 보수파의 푸념 “푸틴이 진정한 지도자”

“푸틴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고, 의사결정과 실행에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그의 명령을 따른다. 그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다.” 푸틴을 예찬한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의 발언은 물의를 빚었지만, 이에 은근히 동조하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 줄리아니의 행간에는 “오바마 대통령은 푸틴보다 의사결정 속도가 느리고 실행력도 떨어진다. 미국의 지도자로서 문제”라는 의도가 다분히 포함됐다.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피터 브룩스 선임연구원은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 노력 여부에 따라 러시아의 군사 개입을 저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군사 행동을 취하기 전에 오바마 대통령에겐 반드시 대처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용서했다. 예방 외교라는 점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러시아 정책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방정보국(DIA)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사실상 장악한 3월1일 전날까지도 러시아군의 크림반도 침공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상원과 하원의 정보특별위원회는 2월27일 CIA와 DIA의 분석관들을 불러 우크라이나 정세에 관한 브리핑을 들었다. DIA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지만 크림 침공에 이용하진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CIA 역시 “러시아의 개입 징후는 있지만 개입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지 않다”고 분석했다. 다음 날인 28일 DIA는 “앞으로 24시간 동안 러시아의 움직임은 없다”고 결론 내렸고, CIA는 모호하게 “러시아 침공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정도로만 의견을 냈다. 그런데 다음 날, 러시아군은 신속하게 크림반도를 점령했다.

‘잘못된 푸틴의 완승’. AP통신의 제목이다. 거꾸로 말하면 오바마 행정부의 다국 협조주의 외교는 푸틴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을 저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한계만 드러냈다. 잘못된 정보기관의 판단이 바탕이 됐다. “오바마 정부는 당초 러시아군이 크림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푸틴의 자세를 과소평가했다”(전 오바마 정부 관계자)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3월14일의 런던.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났다. 유럽의 국경선 문제를 두고 마지막 담판을 벌여야 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라브로프 장관이 모스크바에 의견을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는데, 푸틴 대통령은 이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가 결과를 기다리는 담판 시간 동안 일어난 이 사건은 오바마 행정부가 러시아 권력의 중심에 파고들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부각시켰고, 미국이 푸틴의 계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 부각시켰다. 

오바마를 상대로 거둔 푸틴의 승리는 어떤 형태로든 나비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오렐 브라운 하버드 대학 정치학부 객원교수는 “이란과 시리아 그리고 아시아에서 미국과 패권을 다투고 있는 중국에 ‘미국에 도전해도 리스크는 작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다. 러시아와 대립 구조가 고착화되고 중동이 불안정해질 경우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중시 전략이 재검토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 오바마를 상대로 하는 푸틴의 외교적 승리가 우리 한반도에도 마냥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는 이유다.

ⓒ AP 연합

“도미노를 막아라”…구소련 국가들의 고민 


우크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구소련 국가들은 주름살이 늘어만 간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손에 떨어지는 과정을 바라보며 “그렇다면 우리도”라며 경계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계 주민이 많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크림처럼 자치공화국 명칭을 쓰며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친러시아파 지역도 포함하고 있다. 크림을 먹은 러시아가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고 개입하거나 거꾸로 친러시아 지역이 러시아와의 합병을 요구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다.

이미 ‘도미노 현상’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인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 의회는 러시아와의 합병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러시아 하원에 보냈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인구 55만명의 작은 나라로 1991년 몰도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전례가 있다. 공식 언어는 러시아어인데 2006년 주민투표에서 이미 97%가 러시아 편입에 찬성한 적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가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몰도바뿐만이 아니다. 조지아(그루지야)의 자치공화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의 분리 움직임은 매번 뜨거운 감자다. 러시아는 2008년 그루지야 분쟁 이후 두 지역의 독립을 승인하고 사실상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크림공화국처럼 실제로 합병하진 않고 있는데 그 가능성이 이제는 생긴 셈이다.

소련 붕괴 후 독립했지만 여전히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스도 고민 중이다. 이들은 러시아와 관세동맹을 맺으며 경제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지만 크림 사태에 대해서는 입장 표명을 피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인구의 4분의 1이 러시아계이며 국민 대다수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중국이나 서방과의 경제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 벨라루스는 주권에 예민한 국가다. 1994년 대통령 자리에 올라 지금까지 물러나지 않은 탓에 독재자로 비난받는 알렉산드로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외부 국가의 참견에 진절머리를 내는 사람이다. 러시아와 관세동맹을 맺을 때도 “우리의 주권은 반드시 유지한다”는 다짐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했을 정도다. 

구소련 국가들이 러시아를 경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8년, 앞서 언급한 그루지야 두 지역의 독립을 러시아가 승인했을 때 이 결정을 지지한 국가들 중 구소련에서 독립한 곳은 단 하나도 없다. 푸틴의 러시아는 구소련의 경제 공동체인 ‘유라시아 연합’ 결성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크림 합병이 오히려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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