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의 ‘히든 챔피언’ 왕국
  • 독일 쾰른=강성운 통신원 (sungun.gang@gmail.com)
  • 승인 2014.03.26 14:0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일 대표적 중소기업 ‘루카스-뉠레’ 탄탄한 산학 연계 프로그램과 대기업 뺨치는 근무 조건

독일에서 중소기업(KMU)은 ‘경제의 척추’라고 불린다. 기업 수, 매출액, 고용 등 양적 측면뿐 아니라 연구·개발, 직업교육 등 질적 측면에서도 중소기업은 독일 경제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

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은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 1, 2, 3위를 기록하거나 위치한 대륙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30억 유로 이하의 연매출을 올리며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업’을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 즉 숨어 있는 승자라 불렀다. 독일에는 1300여 개의 히든 챔피언이 있다고 한다. 은둔한 무림의 고수, 히든 챔피언을 시사저널이 찾아 나섰다.

루카스-뉠레의 뮈스너 사장(가운데)과 직원들이 실험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강성운 통신원
번쩍번쩍. 어린 시절에 보던 공상과학 영화에는 항상 실험실이 등장했다. 사방이 온통 알록달록한 버튼과 모니터로 둘러싸인 새하얀 공간은 미래와 첨단기술의 상징이었다. 상상화 그리기 대회를 하면 한 반에 한두 명씩은 꼭 이런 실험실을 그려냈다.

지난 3월11일 독일 케르펜(Kerpen)에서 그 상상화 속 실험실과 조우했다. 그동안 기술이 진보하면서 영화 속 실험실은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 있는 어두운 공간으로 그 모습을 바꿨다. 그러나 루카스-뉠레사(社)의 전시실은 번쩍이는 버튼과 반쯤 내부를 드러낸 기계로 가득했다. 중앙홀에는 군데군데 속이 들여다보이는 자동차가 서 있었다. 주위에는 전선이 꽂혀 있는 조작판과 모니터가 설치돼 있었다.

“대학생들도 우리 장난감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루카스-뉠레의 연구·개발 책임자이자 경영진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뮈스너가 말했다. 밝은 갈색 머리가 희끗희끗 세기 시작한 나이지만 어딘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남아 있다. 그가 ‘장난감’이라고 부른 루카스-뉠레의 제품은 엔지니어 교육용 기기와 교육 프로그램이다. 인터폰, 조명 시스템부터 자동차, 냉각기, 풍력발전소 제어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계 모형을 직접 조작해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루카스-뉠레가 설립된 것은 1973년이다. 창업주 롤프 루카스-뉠레는 원래 가전제품 회사인 AEG에서 제품 교육을 담당했다. 칠판에 기계를 그려가며 설명을 하다 한계를 느낀 그는 어느 날 직접 작은 모형 기계를 만들어 수업에 활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교육에 참가한 직원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였고 교육 효과도 뛰어났다. 여기서 착안해 롤프 루카스-뉠레는 교육용 기계로 사업 분야를 바꿨다.

창업 4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 이 회사는 연매출 3000만 유로(약 446억원)를 달성했다. 네 명뿐이던 직원은 120명으로 늘어났다. 인구 6만명의 소도시에 위치한 작은 공장에서 만들어낸 상품은 공학·산업 교육용 기기 시장에서 미국과 스페인 경쟁사와 선두를 다툰다. 그럼에도 일반 소비자들은 루카스-뉠레를 잘 모른다. 히든 챔피언의 조건을 고루 갖춘 셈이다.

루카스-뉠레의 제품은 시뮬레이터일 뿐이다. 그럼에도 수요가 있는 것일까. 마케팅 담당자 크리스티아네 블룸은 ‘베그라이펜(begreifen)’이라는 단어로 루카스-뉠레의 핵심 가치를 설명했다. 베그라이펜은 ‘이해하다’ ‘파악하다’라는 뜻의 동사인데 어원을 살펴보면 ‘손에 쥐다’ ‘만지다’라는 뜻의 ‘그라이펜(greifen)’이 들어 있다. 즉,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져봄으로써 감각적으로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독일 직업교육의 강점이자 루카스-뉠레의 제품이 성공을 거둔 비결이기도 하다. 블룸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관통하는 브랜드 가치로 ‘메이드 인 저머니(Germany)’를 꼽았다. 독일 엔지니어링 기술에 대한 고객의 신뢰와 실제에 강한 독일 직업 교육의 정신이 루카스-뉠레의 브랜드가 가진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이다.

루카스-뉠레는 하드웨어인 기기와 소프트웨어인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판다. 기계가 오작동하도록 설정해놓으면 학생이 직접 점검을 하면서 원인을 파악하고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끔 하는 식이다. 기기마다 컴퓨터를 연결해 관련된 이론을 배우고 연습문제를 풀어볼 수도 있다. 1990년대 초까지 루카스-뉠레의 주 활동 영역은 독일이었다.

20여 년간 조금씩 성장해온 회사는 어느 날 횡재를 맞았다. 동·서독 통일이 이뤄진 것이다. 옛 동독 지역에 지원금이 풀리면서 루카스-뉠레의 제품을 찾는 구매자가 급증했다. 통일 직후 회사 매출의 80%를 국내에서 올렸다. 직원들은 회사의 고공비행을 즐겼다. 

해외 시장에 눈 돌려 위기 극복

그러나 ‘통일 대박’은 어디까지나 반짝 특수일 뿐이었다. 지원금이 줄어들면서 회사 매출은 반 토막 났다. 통일 특수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지나가면서 건실하게 가꾼 기업이 흔들렸다. 창립 이래 최대 위기였다.

루카스-뉠레는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직접 지사를 설립하는 대신 토박이 기업과 손잡았다. 현지의 언어를 말하고 현지의 문화를 이해하고 교육 과정을 잘 아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렇게 정한 수입처가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하나 둘 늘어갔다. 현재 루카스-뉠레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150개국에 파트너를 두고 있다. 경쟁사의 본거지인 미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올해는 두 개의 직업학교를 통째로 지을 예정이다. 매출액은 4000만 유로로 예상된다.

2000년대 들어 루카스-뉠레는 발 빠르게 제품군을 늘려갔다. 2001년에는 학습 프로그램을 발표했고, 전력 엔지니어링, 재생 에너지, 자동차, 냉각·에어컨디셔닝 등으로 제품 영역을 확장했다. 제품군을 한눈에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루카스-뉠레는 전문 영역이 아닌 부분은 과감하게 전문가에게 맡긴다. 루카스-뉠레에는 제품 영역마다 관리자가 따로 있다. 최근 신설한 냉각 기술 분야가 그 예다. 냉장 보관에 대한 법 규정이 점점 엄격해지면서 전기공학의 도움 없이는 정확한 온도 설정과 온도 유지가 불가능해졌다. 루카스-뉠레에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 셈이다.

 그러나 당장 채용 가능한 냉각 기술 전문가가 없었다. 일단 한 직원이 연수를 받아 냉각 사업 분야를 맡았지만 장기적으로는 냉각 전문가가 필요했다. 이때 힘을 발휘한 것이 독일의 산학 협력 시스템이다.

독일 전문대학에는 학업과 직업을 병행하는 ‘두알레스 슈투디움(Duales Studium)’이라는 제도가 있다. 학교와 직장을 3개월씩 번갈아 다니거나 학기 중 매주 일정한 시간을 회사에서 일하는 프로그램이다. 루카스-뉠레는 냉각 기술을 가르치는 한 직업학교와 계약을 체결하고 냉각 기술을 전공하는 학생 두 명을 육성하는 중이다. 이들은 학교에서는 냉각 기술 이론을 배우고 회사에서는 실습을 한다.

루카스-뉠레의 차량 점검 연습 시스템. 한 직원이 연수생들을 위해 교육용 기기를 테스트하고 있다. ⓒ 강성운 통신원
인재난 없는 중소기업, 산학 연계 ‘든든’

아무리 히든 챔피언이라지만 역시 한국의 중소기업처럼 인력난을 겪진 않을까 궁금했다. 독일에서도 인구 노령화와 고학력화로 인해 산업계에 젊은 피가 부족하다는 뉴스를 종종 접하기 때문이다. 뮈스너는 “우리 회사엔 그런 어려움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지난해에 처음 참가한 취업박람회도 “재미있었지만 앞으로는 나가지 않을 계획”이라고 했다. “젊고 유능한 공학도들에게 회사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라고 묻자 이번엔 블룸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했다. 상당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전시실을 돌아보는 도중에 한 젊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피에르 바서는 쾰른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루카스-뉠레에 취직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이미 이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수력발전 통제 시스템을 배웠다. 지금은 수력발전 통제 시스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행한다. 루카스-뉠레의 개발직 직원 중 절반가량은 이렇게 이미 대학 재학 시절에 회사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회사도 인재 확보에 적극적이다. 아르바이트나 인턴을 하러 온 대학생들을 눈여겨봤다가 졸업 논문을 회사의 프로젝트와 관련된 주제로 쓰도록 권하고 졸업 직후 채용하기도 한다.

지멘스(Siemens) 같은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진 않았는지 묻자 바서는 “난 대단한 커리어를 쌓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씩 웃었다. 과거 한 대기업 홍보팀에서 일한 블룸 역시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이 가진 장점을 나열했다. “대기업에서는 보통 아주 작은 직무를 맡지 않나. 중소기업에서는 평직원도 한 분야를 맡아 주도적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사업을 추진할 수 있어 동기 부여가 된다. 직급 간 위계질서도 엄격하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빠르고 효율적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이 적게 든다.”

문득 회사 입구에서 뮈스너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입구 직원이 반말로 “손님이 왔다”고 인터폰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흔히 좋은 직장의 조건으로 보수·사람·직무 세 가지를 꼽는다. 중소기업인 루카스-뉠레의 근무 조건은 대기업과 동등하다. 법에서 정한 노동 시간과 휴가 일수, 임금 규정을 따르고 있다. 휴가법상 주 5일 근무를 하는 독일 직장인은 연 20일의 유급휴가를 받게 돼 있다. 루카스-뉠레는 30일의 유급휴가를 준다. 바서의 말대로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는 ‘야망’의 문제지 ‘생존’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뮈스너는 “우리 회사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다. 아침에 아이가 보챈다거나 전날 과음을 해서 속이 안 좋으면 평소보다 늦게 출근해도 괜찮다. 단 정해진 총 근무시간은 채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촬영이 금지된 생산 라인을 돌아봤다. 아직 오후 4시인데 두세 명의 직원만이 남아 있었다. 낯선 취재진에게 편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무실 한편에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회사는 가족적”이라는 뮈스너의 표현이 빈말이 아닌 듯했다.

대기업으로부터 노하우와 거래처를 방어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묻자 뮈스너와 블룸은 의아해했다. “지멘스 같은 기업도 교육용 기기와 프로그램을 충분히 만들어 팔 수 있지 않나”라고 재차 묻자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지멘스는 직업 교육용 기기를 개발하는 부서를 자체적으로 운영했으나 경영상 이익이 남지 않는다고 판단해 폐지했다. 블룸은 “독일 대기업은 본래의 핵심 전문 분야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뮈스너 역시 “우리는 지멘스와 파트너 관계다. 지멘스가 우리 시장을 침투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 제품 제작을 자주 의뢰한다”며 신뢰를 표시했다. 한국 대기업의 공격적인 사업 분야 확장에 대해 설명하자 이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루카스-뉠레도 언젠가는 연매출 5000만 유로(744억원)가 넘는 대기업이 될 것이다. 뮈스너는 “우리 회사도 당연히 계속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급속한 성장은 원치 않는다. 2020년 매출액 6000만 유로(893억원)를 향해 완만하게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한 지역에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성장한 기업은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루카스-뉠레의 직원 중 90%는 케르펜 반경 50㎞ 이내에 있는 지역 출신이다. 케르펜 주민들은 주변에 무림의 고수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잘 모른다.  


“뛰어난 적응력이 독일 중소기업 강점” 


독일 본(Bonn) 소재의 중소기업연구소 유타 그뢰슐 대변인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중소기업의 강점으로 “뛰어난 적응력”을 꼽았다. 몸집이 작은 만큼 시장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 연방경제에너지부는 2008년 7월부터 중소기업 중앙 혁신 프로그램(ZIM)을 운영 중이다. 중소기업의 기술혁신을 지원해 경쟁력을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고용 창출 효과를 얻으려는 의도에서다. 독일에서 운영 중인 중소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과 협력하는 연구기관도 지원받을 수 있다. 직원 수 250명 미만, 연매출 5000만 유로(약 744억원) 또는 연수익 4300만 유로(640억원)인 기업의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한다.

ZIM의 지원 대상은 개별 프로젝트, 협동 프로젝트, 협동 네트워크로 나뉜다. 개별 프로젝트는 개별 기업의 신제품 혹은 새로운 프로세스 연구·개발 사업을 가리키며, 협동 프로젝트는 기업 간 혹은 기업-연구소 간 협동 사업을 의미한다. 협동 네트워크는 경영-연구·개발 간의 관계망을 뜻한다.

ZIM에 대한 중소기업의 반응은 뜨겁다. 2013년 말까지 3만6000여 개의 신청서가 쇄도했다. 이 가운데 2만4000여 개의 프로젝트가 지원 대상에 선정돼 총 31억 유로(약 4조6056억원)를 지원받았다. 이 중 7억1400만 유로(1조625억원)를 생산 기술 분야에 책정한 점이 눈에 띈다. 원재료 기술과 전기·측정·센서 기술, 정보통신기술 분야는 각 3억6000만~3억4000만 유로(5357억~5059억원)를 지원받았다.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 연구·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ZIM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1만1500여 개 기업은 이를 계기로 연구·개발비 유치에 물꼬를 트고 ZIM에서 받은 돈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을 연구·개발에 투자할 수 있었다. 정부 주도의 중소기업 지원이 중요한 이유다.

독일의 관료제는 악명 높다. 그러나 ZIM은 문턱을 낮췄다. 연중 상시 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고 인가를 받기 전에 프로젝트에 착수할 수 있다. 지원서 작성에 걸리는 시간도 대폭 단축시켰다. 당초 올해 말까지로 예정됐던 ZIM은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새 정부에서도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