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명 죽는 동안 1000억 재산 쌓였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04.0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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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은 평범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악행은 당대의 상식 바깥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여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도 마찬가지다. 27년 전 우리 사회를 경악시킨 후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오늘’을 추적했다.

시민의 인권이 짓밟힌 사건이었다. 군사정부의 왜곡된 사회복지 철학 그리고 시설 운영자의 사리사욕이 맞물리며 발생한 참극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3월 세간의 주목을 받을 때까지 무려 12년간 정부 당국의 수용 정책과 시설 운영자들의 경제적 타산이 빚어낸 끔찍하고 중차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다”(박태하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잊고 있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재조명받고 있다. 부산의 한 사회복지 시설에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자행된 인권침해 범죄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들끓는다. 당시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피해자는 합당한 배상을 받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잊혀졌다. 그 ‘묻힌 사건’의 여파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친다.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1987년 당시 구속된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앞줄 왼쪽)과 직원들. ⓒ 뉴스뱅크이미지
1987년 당시 부산 형제복지원 모습.
수억 원 횡령 적발하고도 추징액은 ‘0원’

여전히 피해자들은 울고 있다. 국가와 시설이 그들에게 가한 폭력은 심각한 내·외상을 남겼다. 고통으로 점철된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하지만 ‘나쁜 사람’은 더 잘 잤다. 인권침해의 당사자는 사회의 망각을 틈타 호화로운 삶을 지속해왔다.

사건의 중심에는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이 있다. 박 전 원장은 육군 상사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발생한 ‘부랑인’을 수용하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형제복지원의 전신인 ‘형제육아원’을 설립했다. 1962년 군을 전역하며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박 전 원장이 10년 이상 심각한 수준의 인권침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87년의 일이다. 경북 울주군의 한 작업장에서 강제 노역이 자행되는 현장을 검찰 관계자가 목격하면서다. 부산 형제복지원에 대한 압수수색이 단행됐다. 그 결과 “사회복지 시설이 아닌 완벽한 감금 시설”임이 확인됐다. 출입문마다 견고한 자물쇠 장치가 있었다. 복지원 수용자들이 대부분 멀쩡한 사람들임에도 납치되다시피 끌려와 감금돼 노임도 받지 못한 채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 사실도 확인됐다.

의식주 역시 지극히 열악했다. 구타와 폭행은 일상이었다. 병에 걸린 이들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로 인한 죽음은 은폐됐다. 1975년에서 1986년 사이에 복지원에서 사망한 수용자의 수는 513명에 달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굶주려 죽거나 맞아 죽은 것으로 추정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는 것이 당시 수사 검사의 말이다. 일부 시신은 300만~500만원에 대학병원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갔다.

시설 운영을 위해 국가가 지급한 보조금 중 상당액은 박 전 원장 일가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주무 관청인 부산시는 관리·감독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야당인 신민당 국회의원 6명이 포함됐던 진상조사단은 다음과 같이 보고서에 기록했다. ‘가히 인권 사각지대라 할 만큼 인권 말살 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됐고, 박인근 일가의 엄청난 부정과 비리 행위, 관계 당국의 직무유기 등이 조사 결과 나타난 데 대해 온 국민과 함께 경악과 충격을 금할 길 없었다.’

박 전 원장 등 핵심 인물 5명이 구속됐다. 그런데 박 전 원장의 기소 혐의는 특수감금, 횡령 등에 국한됐다. 인권침해 및 담당 공무원과의 유착 의혹 등 사건에 대한 전면적 수사가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재판을 거듭할수록 박 전 원장에게 선고되는 형량은 줄어만 갔다. 1989년 박 전 원장에게 내려진 최종 선고는 징역 2년 6월. 2심 재판부까지 인정했던 특수감금 혐의마저 대법원이 인정하지 않은 결과다. 결국 박 전 원장은 시설 수용자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나마 박 전 원장이 징역형을 받게 된 데는 국가보조금을 횡령한 사실이 적발된 게 컸다. 1심에서는 횡령액으로 지목된 6억8178만원을 국고로 환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2심 판결부터 횡령액 추징은 사라진다. 결국 3차례에 걸친 대법원 판결 끝에 징역형만 선고받았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김용원 전 검사(현재 법무법인 한별 변호사)는 이렇게 술회한다. “원장실에 있는 대형 금고에 각종 예금증서와 외환이 있었다. 액면가가 20억을 넘었다.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억원에 해당하는 액수다. 박 전 원장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결국 그 막대한 부의 형성 과정이 충분히 조사되지 못한 데다 그나마 혐의가 입증된 횡령금마저 고스란히 박인근 원장의 금고 속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1989년 7월 박 전 원장은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사건 직후만 해도 부산시는 박 전 원장의 대표이사 자격을 취소하고, 관선이사를 위촉해 시설을 운영했었다. 하지만 박 전 원장이 출소하자마자 곧바로 그의 ‘복권’ 작업이 진행됐다. 1990년 1월 부산시가 이름이 바뀐 박 전 원장의 사회복지법인 ‘재육원’에 중증 장애인 시설 신축 사업비를 교부했던 것이다. 이후 박 전 원장 일가는 부산 일대에서 사회복지 사업을 계속했다. 1991년 새로운 사회복지법인 ‘욥의 마을’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 ‘형제복지지원재단’, 올해 1월 ‘느헤미야’ 등으로 법인 이름을 바꿔왔다.

현재 재단에서 운영 중인 사회복지 관련 시설은 중증 장애인 요양 시설인 ‘실로암의 집’이 유일하다. 그런데 ‘실로암의 집’에서도 역시 우려할 만한 수준의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여준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에 따르면 “부산시의 인권침해 조사에 참여한 민간 조사원들이 ‘시설 폐쇄’를 제안했을 정도”라고 한다(상자기사 참조).

박인근 전 원장 일가의 최근 모습.
출소 후 복지사업 계속하며 탈법·비리 저질러

이뿐이 아니다. 박 전 원장 일가가 운영하는 재단은 온갖 탈법·비리 의혹에 지속적으로 휩싸였다. 2002년 8월에는 ‘실로암의 집’에 산사태가 발생해 무연고 10대 중증 장애인 4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런데 당시 형제복지지원재단은 준공 허가 신청도 하지 않은 채 중증 장애인을 무단으로 수용했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사 40도의 산허리에 무리하게 공사를 해 사고 위험이 상존해 있었다는 것이다. 애꿎은 시설 거주인이 사망하게 된 원인은 재단 측의 탈법적 운영에 있었던 셈이다.

2012년에는 재단의 비리 의혹이 대대적으로 불거졌다. 재단이 법인 소유 영리 시설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2005년부터 4년에 걸쳐 118억원을 장기 차입한 과정에 불법성이 있다는 내부 제보가 있었다. 2007년 이뤄진 대출에 대한 부산시의 허가가 2009년에야 뒤늦게 난 것, 장기 차입 관련 서류 및 대출 상환 계획 누락, 118억원의 사용처 등이 문제가 됐다. 재단 측의 차입금 횡령 및 시청 담당 공무원과의 유착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부산시의 특별 지도점검 결과, 법인 기본 재산을 매각한 대금 중 36억9600만원은 허가 조건을 위반했고, 14억5300만원은 개인 용도로 사용한 점, 허가 없이 임의로 장기 차입을 실시한 점 등 16건의 불법이 적발됐다. 2건은 형사 고발, 4건은 수사 의뢰하는 등 후속 조치가 뒤따랐다. 현재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다.

관련 제보를 입수해 부산시의 감사를 이끌어낸 박민성 부산사회복지연대 사무처장은 “장기 차입 허용은 시장이 결재를 해야 하는 사안이다. 금액도 무려 100억대가 넘는다. 일개 담당자 선에서 결정됐을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주무 관청의 지도·감독 책임에 대한 조사 및 처벌도 뒤따랐다. 징계 수준은 미미했다. 경징계 2명, 훈계 7명, 주의 7명에 불과했다. 허가 및 지도·감독 등에서 부적정한 내용 5건이 드러났음에도 “(유착 의혹은) 박 전 원장의 치매에 따른 입원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 사무처장은  “수십억씩 쪼개 수차례 일어난 장기 차입에 건건이 허가를 다 해준 정황을 보면, 부산시와 재단의 유착 가능성이 강하게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재단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박 전 원장 일가가 축적한 재산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법 처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박 전 원장의 재산은 단 한 푼도 환수되지 않았다. 금고 안을 가득 채운 외화, 33개 필지의 부동산 등은 출소한 박 전 원장의 개인 자산으로 남았다.

여기에 복지법인 사업에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영리 사업을 벌이며 재산을 크게 불렸다는 것이다. 재단 정관에는 수익 사업으로 부동산 임대 사업, 레저스포츠 사업, 유아·학원 교육 사업, 온천사우나 및 찜질방 경영 사업, 화장품 생산 사업 등을 명시하고 있다. 부산 사하구에서 레포츠센터, 사상구에서 온천 등을 운영하며 수익을 올렸다.

부산사회복지연대 측은 다양한 정보망을 통해 박 전 원장 일가의 재산을 추적한 결과 1000억대가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복지법인의 자산 규모만 221억 수준이며, 박 전 원장 슬하의 3남4녀가 소유한 동산과 부동산의 규모가 막대하다는 것이다. 대안학교 신영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신양원, 호주 시드니 소재의 골프연습장, 서울 강서구 및 울산 등지의 부동산 등이다. 부산 내 사회복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박 전 원장을 두고 ‘복지 재벌’ ‘복지 마피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재단 본연의 목적인 복지 사업보다는 영리 사업에만 열을 올려왔다는 것이다.

그동안 박 전 원장은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반성하는 빛을 내비치지 않았다. 1991년 3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비록 죄가 있다고 벌을 받긴 했지만 양심적으로 시설 운영을 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했는데도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뜻밖의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이런 입장은 2000년대 기독교계 언론과의 인터뷰 내용, 2010년 재단 측이 발간한 ‘형제복지원 운영 자료집’ 등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외부의 음해 때문에 억울하게 ‘파렴치범’으로 지탄받았다는 취지의 주장으로 일관한다.

닫혀버린 ‘입’, 들을 수 없는 ‘사죄’

형제복지원 사건에 관심을 기울여온 사회복지·인권 전문가들은 박 전 원장 개인에게만 사건의 책임이 전가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이어진 ‘부랑인’ 강제 수용 통치 전략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사회적 빈곤층을 ‘부랑자’로 분류해 민간 복지 시설에 강제로 수용했다. 재정적 지원을 할 뿐 관리·감독 책임은 방기했다. 그 안에서 ‘왕’이 된 복지법인 대표들은 각종 비리와 인권 범죄를 저질렀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이를 충격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김명연 상지대 법학부 교수는 “독일의 히틀러 시대와 같은 한국 현대사의 전체주의적 정치권력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지난 3월25일 ‘형제복지원 피해 사건 진상 규명 및 피해자 생활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 발의됐다. 국무총리가 소속된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해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을 대상으로 보상금, 의료 지원금, 생활 지원금, 주거복지 시설 등을 지원토록 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사건의 진상이 충분히 규명돼 피해자들의 생활 안정이 가능하게 될지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사건 피해자들이 가해자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현재 박 전 원장은 치매를 앓고 있다. 2009년 이후 재단의 경영은 그의 셋째 아들이 도맡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세월 동안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끔찍했던 일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럼에도 박 전 원장에게서 이에 대한 사과의 말이 나온 적은 없었다. 정신 질환으로 그의 입이 닫히면서,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사죄를 들을 수 있는 가능성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실로암의 집’ 거주인들 “나가서 살고 싶다”  

“36명의 중증 장애인이 거주하는데도 휠체어 리프트가 장착된 차량은 한 대도 없고,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지난해 이곳을 방문한 여준민 활동가는 시설 내 거주인들이 사실상 감금 상태에 있었다고 밝혔다. 시설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식단 또한 딱 3가지 반찬에 먹을 것이 없었고, 어묵 반찬은 상했는지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부실한 식단 탓인지 거주인들 대부분은 비쩍 말라 있었고, 그들의 일상은 그저 무기력하게 초점 없는 퀭한 눈으로 허공을 맴도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을 열어놓고 있었지만 모든 거주인의 방문 밖에는 잠금 장치가 걸려 있었고 침대 외에 개인 소지품이라고 볼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적·자폐성 장애가 아닌 지체·뇌병변 장애가 있는 거주인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과 같은) 의사를 표현했다. ‘나가서 살고 싶다’고. 그들은 박인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여전히 무섭다고 했다. 직원들을 함부로 때리고 몹시 아픈 거주인에게 병원 치료는커녕 ‘죽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을 한 것)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고 했다.”(형제복지원 진실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준), <형제복지원 사건 자료집>(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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