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몸통 놔두고 깃털만 뽑을 건가
  • 유창선 | 시사평론가 ()
  • 승인 2014.04.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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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준 국정원장 재신임만 확인한 간첩 증거 조작 사건

결국 검찰은 국가정보원의 벽 앞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국정원의 간첩 증거 조작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이 내놓은 결론은 국정원 3급 대공수사국 처장이 4급 과장 두 명과 공모해 간첩 사건의 증거를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국정원장을 비롯한 그 윗선은 구체적인 보고를 받은 바 없고 지시·개입을 입증할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검찰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 떠들썩했던 증거 조작 사건은 이렇게 국정원 중·하위 직급 직원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분으로 종결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어느 곳보다 보고와 결재를 중시하는 국정원 조직의 성격을 감안할 때 검찰의 그 같은 결론을 수긍하기는 어렵다. 대선 개입 수사 때 국정원을 잘못 건드렸다가 자신들이 풍비박산 났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검찰에 그 이상의 기대를 했던 것이 애당초 무리였을까.

대통령 신임, 국민 시선보다 우선할 수 없어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무성한 가운데 끝내기 수순은 빠르게 진행됐다. 서천호 국정원 2차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시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즉시 수리했다. 다음 날 아침 남재준 국정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4월15일 남재준 국정원장이 증거 조작 관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연합뉴스
사과를 했고, 곧 이어서 박 대통령의 유감 발언이 나왔다. 물론 남 원장은 박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검찰 수사 결과 발표 직후 나타난 이 속전속결식 과정을 보노라면 사전에 정교하게 설계된 듯한 인상이 풍긴다. 이 발 빠른 대응이 겨냥한 것은 봐주기 수사에 대한 여론의 역풍을 조기에 차단하고 남 원장을 지켜주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일련의 과정이 갖는 의미는 ‘사과’ 자체보다는 사태의 ‘종결’에 있다는 해석이 많다.

검찰과 국정원 그리고 박 대통령은 이렇게 증거 조작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지만,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구속 기소된 3급 이 아무개 처장의 윗선에 대해서는 수사 마지막 과정에서 대공수사국장과 부국장에 대한 통과의례식 서면조사만 있었을 뿐이다. 남재준 원장, 서천호 2차장 등에 대한 조사는 손도 못 댔다. 그나마 있었던 조사 결과도 당사자들의 진술을 그대로 확인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렇게까지 정보기관의 수장은 검찰 수사의 성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을까. 적어도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권영해 안기부장은 대선 때 ‘총풍(銃風)’ 공작을 한 혐의로 사법처리된 바 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시절의 임동원·신건 국정원장은 불법 도·감청에 관련된 혐의로 노무현 정부 시절에 사법처리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김만복 국정원장은 정권이 바뀐 후 기밀 누설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렇게 국정원 내에서 조직적인 범법 행위가 발견됐을 때면 국정원장도 조사를 받았고 그 결과에 따라 사법처리되곤 했다.

남재준 원장이 조사조차 받지 않은 채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은 역대 정부에서 있었던 사례들과는 대비된다. 사법 체계를 부정하려 했던 중대한 사건을 검찰이 봐주기식 축소 수사로 덮으려 한 것이라면 야당이 요구하는 특검론이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증거 조작 사건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인식이다. 박 대통령은 증거 조작 사태에 대해 유감 표명을 했지만 이 일을 가리켜 ‘잘못된 관행’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것이 관행이라면 그동안 국정원은 증거 조작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것이 되며, 사법 체계를 부정한 범법 행위의 중대성을 너무도 가볍게 여겼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세상에 국정원이 증거 조작을 하는 일이 어떻게 관행일 수 있는가.

특히 박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정작 남 원장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 관용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그래서 남 원장은 이번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대통령의 확고한 신임을 재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역대 어느 국정원장도 이렇게 반복적으로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선 적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그 책임으로부터 이렇게 벗어나 있던 적도 없다. 이 전례 없는 상황의 배경에는 남 원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각별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남 원장의 확고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국정원의 대선 개입 논란이 불거지면서 국정원은 물론이고 박 대통령까지 곤혹스러운 상황에 내몰렸을 때 남 원장은 몸을 던지다시피 하면서 이를 막아냈다. 그는 NLL(서해 북방한계선) 관련 대화록 무단 유출을 통해 대선 개입 문제에 대한 야당의 공격을 차단하고 정국의 흐름을 바꿔놓는 역할을 해냈다. 또한 현재의 안보 라인에서 남 원장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을 생각할 때, 안보 상황에 대한 우려가 있는 지금은 그가 빠질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래서 남 원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은 남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를 든다 해도 남 원장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반복되고 있고, 더욱이 국정원이 사법 제도의 틀까지 뒤흔든 사실이 확인된 마당에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대통령 개인의 신임이 국민의 시선보다 우선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정원 ‘셀프 개혁’ 기대하는 사람 없어

남 원장은 사과를 하면서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아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뼈를 깎는 개혁을 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지난해 국정원 개혁론이 불거졌을 때 했던 얘기의 반복이다. 그러나 증거 조작 행위는 지난해 국정원 개혁 다짐이 있은 이후에 버젓이 이루어진 일이다. 남 원장이 이번에도 고강도 쇄신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그 방향이 국정원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과는 다를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박 대통령도 사과를 하면서 국정원의 환골탈태를 주문했지만 그 역시 지난해에 말했던 국정원 ‘셀프 개혁’과 닮은꼴이다. 검찰조차도 국정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현실에서, 남 원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재신임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굳이 의미 있는 국정원 개혁이 다시 시도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박 대통령의 60%대 지지율이 위력을 떨치고 있으니까 대통령이나 그 주변에서는 이런 결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른다. 국민이 지지해주고 있는데 뭐가 대수냐고 말이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는 지지율에 따라 국정을 운영할 일은 아니다. 박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이라는 것도 현재까지는 유지되고 있는 여러 기대들이 실제로 성과를 내느냐 여부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지지율처럼 허망한 것이 없음을 과거의 경험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지율이 높을수록 몸을 낮춰 대통령 자신과 그 주변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박 대통령의 ‘남재준 지켜주기’는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올 부메랑이 될지 모른다. 국정원 증거 조작 논란의 대미가 남 원장에 대한 재신임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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