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가다 만화처럼 세계 영화판 뒤집다
  • 허남웅│영화평론가 ()
  • 승인 2014.04.30 17: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블 코믹스, 8000여 개 캐릭터로 초대박 영화 쏟아내

만화 출판사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를 원작으로 ‘마블 스튜디오’가 만든 영화가 세계 박스오피스를 맹폭하고 있다. 국내만 하더라도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캡틴 아메리카 2>)가 3월26일 개봉한 이후 4주 연속 흥행 1위를 차지했으며 4월23일 개봉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가 바통을 이어받아 순항 중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는 <엑스맨>을 시작으로 2000년 이후 만들어진 마블 코믹스 원작의 33번째 영화다. 하지만 제작사는 마블 스튜디오가 아니라 소니픽처스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마블 코믹스는 슈퍼맨·배트맨 등을 창조한 DC 코믹스와 함께 미국의 코믹스를 양분하는 회사다. 마블 코믹스는 현 명예회장인 스탠 리를 영입한 1960년대부터 <판타스틱 4>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데어데블> <엑스맨> 등으로 쇠락해가던 코믹스 시장을 되살려냈다.

ⓒ 마블스튜디오 제공
마블 코믹스의 자산은 8000여 개에 달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경쟁사인 DC 코믹스가 <슈퍼맨>(1978년)과 <배트맨>(1989년)의 연이은 성공으로 주가를 올리는 동안 마블 코믹스는 고작(?) 캐릭터 장난감 사업에 열을 올리며 급기야 파산 직전에 몰리게 된다.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찾은 것이 바로 영화. 더 정확히는 자사의 캐릭터를 원작으로 한 영화 판권 장사였다.

마블 코믹스의 대표 캐릭터는 기울어진 사세를 세우기 위해 여기저기로 팔려갔다. 스파이더맨과 고스트 라이더는 소니로, 엑스맨·판타스틱4·데어데블·엘렉트라는 20세기 폭스로, 루크 케이지는 콜롬비아로, 네이머는 유니버설로 영화화 판권이 넘어가며 마블의 캐릭터들은 속속 영화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 세계 흥행 수입에서 <엑스맨>은 4억2400만 달러, <스파이더맨>(2002)은 이를 훌쩍 넘어선 8억2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마블 코믹스가 영화판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임을 증명했다.

세계 최강 영화 스튜디오로 부활

<엑스맨> <스파이더맨>의 성공엔 각 작품의 연출을 맡은 브라이언 싱어와 샘 레이미의 공이 컸다. 그전까지 인디 영화에서 활약했던 이들은 블록버스터의 새 바람을 일으키며 마블 슈퍼히어로의 할리우드 공습을 이끌었다. 하지만 마블 코믹스 원작 영화에서 감독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프로듀서다. 그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현재 마블 스튜디오의 대표로 있는 케빈 파이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년)의 서울 촬영을 주도적으로 밀어붙이며 직접 양해각서를 체결하기도 했던 케빈 파이기는 <엑스맨>의 프로듀싱 능력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엑스맨>은 <어벤져스>(2012년) 이전에 이미 다수의 슈퍼히어로를 등장시키고 이를 통해 스핀 오프의 가능성도 열어두며 시리즈물로 구상했는데 케빈 파이기는 이와 같은 전략이 앞으로 할리우드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중요한 트렌드라고 예측했다.

케빈 파이기는 <스타워즈> <스타트렉> 같은 시리즈물에 열광했고 무엇보다 마블 코믹스를 단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은 열렬한 팬이었다. 케빈 파이기에게 마블 코믹스 원작의 <엑스맨>은 코믹스 팬으로서 가졌던 애정을 영화라는 사업으로 승화시키는 본격적인 작업이었다.

날고 기는 재능이 넘쳐나는 할리우드에서도 팬의 순수함과 직업인의 냉철한 판단력을 겸비한 케빈 파이기는 보기 드문 인재다. 당시 마블 코믹스에서 영화 부문을 담당하던 아비 아라드 현 마블 엔터테인먼트 CEO는 케빈 파이기를 영입해 좀 더 공격적인 영화 사업을 선보였다. 소니가 <스파이더맨2>(2004년)까지 성공시키자 케빈 파이기와 아비 아라드는 영화화 판권 장사 대신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더 남는 장사라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새로운 방식의 프랜차이즈 영화로 흥행력 과시

이들은 캡틴 아메리카, 닉 퓨리 등의 캐릭터를 담보 삼아 세계적인 증권사 메릴린치로부터 5억2500만 달러를 투자받아 2005년 마블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마블 스튜디오의 대표로 올라선 케빈 파이기는 자신을 비롯해 회사의 중역이 영화 제작에 깊이 관여하는 방식의 시스템을 만들어갔다. 이는 할리우드의 제작 관례로 봤을 때 이례적이었다.

할리우드의 대형 스튜디오는 대중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감독의 창작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쪽을 선호한다. 그래서 프로듀서로는 대개 외부 인사를 영입하기 마련인데 마블 스튜디오는 철저히 내부 인사가 제작에 관여하며 오로지 대중성에만 초점을 맞춘 영화 만들기 전략을 선택했다. 이들은 이름값이 전혀 없는 감독인 존 파브로와 루이스 리터리어를 영입해 각각 <아이언맨>과 <인크레더블 헐크>(이상 2008년)의 현장을 맡겼다.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 역할을 맡은 에드워드 노튼은 감독과 배우의 창작권을 불허하는 마블 스튜디오의 방침에 크게 반발하며 촬영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케빈 파이기의 입장은 확고했다. 감독이나 배우가 예술을 하겠다며 고집을 부릴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라는 것이다. <엑스맨>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마블의 캐릭터가 각자의 영화를 배경으로 하는 가운데, 필요에 따라 헤쳐 모이는 방식으로 거대한 우주를 이루는 희대의 프랜차이즈를 구성했다.

케빈 파이기의 전략은 틀리지 않았다. 마블 스튜디오의 첫 번째 영화 <아이언맨>은 전미 흥행 수입만 3억 달러를 넘겼고 전 세계적으로 6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마침 정체성으로 고뇌하는 슈퍼히어로에게 관객이 지쳐가던 참이었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게다가 유머 감각까지 갖춘 새로운 유형의 슈퍼히어로였다. <아이언맨>의 성공은 <어벤져스> 프로젝트로 확대 재생산됐다. 

마블 스튜디오는 <아이언맨 2>(2010년)와 <토르> <퍼스트 어벤져>(이상 2011년)를 차례로 선보였다. <토르>와 <퍼스트 어벤져>를 영화화하는 것에 대해 마블 스튜디오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의 캐릭터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는 것이 불만의 요지였다. 케빈 파이기의 생각은 달랐다. <어벤져스>를 통해 드러나게 될 ‘마블 유니버스’를 위해서라도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를 선보이는 것은 중요했다.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들이 주로 현재 시점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것에 반해 토르는 신의 영역에 속한 존재였다. 캡틴 아메리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맞서던 1940년대의 영웅이었다. 이 둘이 <어벤져스>에 합류하게 된다면 마블 유니버스는 인간의 영역에서 신의 영역까지, 1940년대부터 현재까지, 말 그대로 거대한 우주를 아우를 수 있었다. 게다가 스파이더맨·엑스맨·데어데블 등의 영화화 판권을 타사에 팔아넘겨 마블이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의 존재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마블의 캐릭터에 주목한 디즈니가 2009년 마블 스튜디오를 무려 40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케빈 파이기의 계획은 더욱 힘을 받게 됐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반대에 부닥쳤던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도 각각 북미에서만 1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입을 올리며 케빈 파이기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기세를 이어 <어벤져스>는 전 세계에서 15억 달러가 넘는 초대형 흥행 수익을 거둬 <아바타> <타이타닉>에 이어 전 세계 최고 흥행 영화 톱 3에 드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지금까지 케빈 파이기가 참여한 마블 영화의 흥행 수익은 90억 달러를 훌쩍 넘어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케빈 파이기가 진두지휘하는 마블 유니버스의 활약상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케빈 파이기는 최근 미국 현지 인터뷰에서 마블 스튜디오의 이후 라인업이 2028년까지 계획되어 있다는 발언으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올해만 해도 5월에 마블 코믹스 원작으로 20세기 폭스가 제작에 참여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개봉할 예정이다. 8월엔 마블의 새로운 영웅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선보일 계획이다. <앤트맨> <닥터 스트레인저>(이상 2015년 개봉 예정)와 같은 새로운 캐릭터에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기존 캐릭터까지 가세한다. 마블이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 세계 상업영화 시장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주목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