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동문의 ‘한밭 결투’
  • 김현일│대기자 ()
  • 승인 2014.05.1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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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박성효·새정치연합 권선택 후보 대전고·성균관대에 행시 관료까지 닮은꼴 이력

대전(大田)은 옛 지명 ‘한밭’을 한자화한 것이다. 한적한 시골이었던 이곳은 일제 강점기 경부선과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교통 중심지로 부상했고, 1989년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됐다. 대한민국 중심부에 위치해 중도(中都)라고도 불리는 대전은 정치적으로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곳이다. 직할시로 승격된 이후 실시된 14대 대선(1992년) 이래 이곳에서 승리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에서다. 이는 영호남처럼 어느 한 정파에 붙박이로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도 6개 국회의원 선거구를 여야가 3개씩 나눠 가진 사실 또한 ‘정치적 균형’이 이뤄져 있음을 말해준다. 대전 유권자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선택을 달리해온 것이다. 이런 연유로 중앙 정치권은 임박한 ‘한밭의 결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새누리당 박성효 후보 ⓒ 연합뉴스새정치연합 권선택 후보 ⓒ 연합뉴스
여론조사 지표상 박 후보가 앞서

<OK 목장의 결투>에 등장하는 건맨들과는 달리 넓은 들판 결투의 양 당사자는 가깝다면 아주 가까울 수 있는 대전고 동문이자 성균관대 동문인 동갑내기다. 새누리당 박성효 후보는 대전고 52회다. 이에 맞서는 새정치민주연합(새정치연합) 권선택 후보는 대전고 53회다. 모두 1955년생이지만 생일이 9개월여 빠른 박 후보가 고교 1년 선배다. 사실 이 지역에서 대전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현재 6명의 국회의원 중 박 후보를 포함해 4명이 대전고 출신이다. 강창희 국회의장(중, 44회), 박병석 국회부의장(서 갑, 50회) 등 면면도 쟁쟁하다. ‘작은 대전고’인 대전중학교 출신 이상민(유성) 의원까지 합치면 5명인 셈이다.

게다가 박성효·권선택 두 후보는 성균관대 동문이기도 하다. 박 후보는 행정학과, 권 후보는 경영학과로 과만 다를 뿐이다. 두 후보 모두 행정고시에 합격한 관료 출신이라는 점까지도 닮았다. 다만 박 후보가 거의 모든 공직 경력을 대전시에서 쌓은 반면, 권 후보는 충남도 기획관을 지낸 후 내무부와 청와대 행정관·비서관 등을 거친 게 다르다. 박 후보의 경우 대전 서구청장·경제국장·기획관리실장·정무부시장·광역시장 등을 지냈다. 권 후보도 대전 정무부시장을 역임했다.

출생연도, 고등학교, 대학교, 행정고시 등 거의 모든 게 일치하는 이들의 관료 이후 경력도 우열을 가늠하기 곤란할 정도다. 박 후보는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민선 4기 대전시장을 지냈다. 지난 19대 총선 때 대덕구에서 당선해 처음 국회에 입성했다. 권 후보는 19대 총선에서는 강창희 국회의장에게 패했으나, 중구에서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재선 의원이다. 자유선진당 대표까지 역임한 바 있다. 같은 대전 지역을 기반으로 여러 번 선거를 치렀지만, 두 후보가 정면으로 맞붙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넓은 들판을 차지하려는 두 맞수를 드러난 면면만으로는 저울질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현재의 여론조사 지표상으로는 박 후보가 조금 앞서가는 양상이다. 중앙일보의 5월4일 여론조사는 박 후보가 41.9%로 27.0%의 권 후보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당 지지도에서도 새누리당이 새정치연합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새누리당 지지율이 다소 하락하는 추세지만, 충청권의 정당 지지율을 보면 새누리당은 40%인 반면, 새정치연합은 18%로 나타났다. 현재 권 후보가 기대하는 것은 정치 쓰나미다. 

상정할 수 있는 쓰나미는 ‘제2 핫바지 파동’ 수준의 민심 들끓기다. ‘핫바지 파동’이란 과거 민자당 김종필(JP) 대표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떠밀려 자민련을 창당했던 1995년 즈음의 일이다. 당시 JP의 자민련은 장래를 전혀 기약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그런 마당에 김윤환 민자당 사무총장이 ‘핫바지’를 언급했고, JP는 이를 “다른 지역에서 충청도를 핫바지로 보고 있다”는 논리로 확대시켜 충청 유권자의 소외 감정에 불을 지폈다. 가뜩이나 영호남 대결 구도 속에 겉돌며 불만이 가득 찼던 당시 충청권은 “핫바지라고? 그래 핫바지다 어쩔래”하며 총궐기했다. 여간해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충청인들이지만 일단 마음먹으면 무시무시하다.

자민련은 기본 구색도 갖추지 못한 창당 직후에 맞은 1995년 1기 지방선거에서 충청 지역을 싹쓸이했다. 이어 1996년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자민련이 5·18특별법에 분노한 대구·경북의 표심까지 엮어 50개 의석을 차지해 제2 야당으로 급부상했다. 충청권을 싹쓸이한 것은 물론 대구에서만 13석 중 8석을 따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1997년 15대 대선에서 DJP연합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등 현대 한국 정치사에 최대 이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10여 년 동안 자민련은 ‘호남의 민주당’처럼 충청권을 대표하는 정치 세력으로 군림했다. 훗날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또 한 차례 붐을 일으킨 것도 자민련의 여진 덕이 컸다.

자민련의 약진은 ‘충청도 대통령’ 출현을 꿈꾸는 충청인들의 여망이 JP를 향함으로써 가능했던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미 실망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애증이 교차했던 JP였던 만큼 ‘핫바지’ 발언이 결정적 촉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청 유권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핫바지’ 한마디가 한국 정치 흐름을 뒤바꾼 것이다. 

‘제2 핫바지’ 돌출 여부가 막바지 변수

대전의 국회의원 지역구는 인구 6만이 적은 광주광역시보다 2개 적다. 40만명이 적은 울산광역시와 같은 의석 수다. 대전·충청 유권자들이 한국 사회를 영호남의 나눠 먹기식 패권주의로 이해하는 한 사례다. 일각에서 ‘호남 푸대접’ 소리가 나오면 “배부른 소리, 우리는 무대접”이라고 거칠게 반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8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같은 학교 출신이 국회의장·부의장을 맡은 전례가 없었다. 그런데 대전고 출신 강창희 의장과 박병석 부의장이 생겨났다. 이것만으로도 대전·충청 유권자들의 손상된 자존심은 일부 회복됐고, 충남 부여·청양 출신의 이완구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되면서 응어리는 더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영남과 호남에 비해 정치적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충청 지역 정서는 무시하기 어렵다. 새정치연합 후보로 충남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대망론’이 먹히는 것도 그런 충청민의 기대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비교적 탄탄하고, 새누리당의 정당 지지율도 새정치연합을 앞서고 있는 터라 현재 박 후보가 다소 여유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선진당 대표를 지낸 권 후보의 저력도 무시하기 어렵다. 지역 정서를 파고드는 법을 누구보다 잘 꿰고 있는 권 후보이기에 박 후보는 전역을 앞둔 병사처럼 떨어진 나뭇잎 밟는 것조차 조심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한밭을 다시 한 번 챙기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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