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도 제때 못 주면서 국가 비상사태 어찌 대처하나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4.06.1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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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 환자 치료 원자력병원 파산 위기…재난 관리에 구멍

원자력병원 재무팀은 5월20일 전체 부서에 공문을 전달했다. 5월 직원 급여를 전액 지급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그 공문에는 ‘전년도 적자에 대한 차입 건이 해결되지 않아 자금 운용이 어려운 중에, 정부 출연금이 20일 이전에 배정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출연금 배정이 예상보다 늦어져 20일 현재 급여 지급에 필요한 자금이 확보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정기급여일인 21일에는 현재 가용 자금 범위 내에서 60%를 지급할 예정이다’고 적혀 있다. 올 1월에도 월급의 50%가 며칠 연체된 바 있다.

우수한 의사 빼앗기며 암 병원 전문성 상실

국내 최초의 암 병원인 원자력병원이 직원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았다. 원자력병원은 평상시에는 암 환자를 진료하고, 원자력발전소 사고나 원자력 테러 등 비상 상황에는 방사능 피해를 당한 환자를 치료하는 국가 의료기관이다. 단순한 급여 연체가 아니라 국가 비상사태에 따른 대응력을 상실하는 상황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한국원자력의학원. ⓒ 시사저널 최준필
원자력병원은 1968년 방사선의학연구소 부속병원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최첨단 진료기기를 갖추면서 ‘암 진료=원자력병원’이라고 인식됐다. 사실상 이 병원은 국내 최초로 암 치료에 특화된 국가 의료기관이다. 서울대 의대를 나온 의사는 이 병원으로 가는 게 정석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의료진이 모였다. 그러나 1989년 서울아산병원이 생겼고, 1994년 삼성서울병원 등 대형 사립병원이 생기면서 원자력병원 의료진은 대거 대학병원으로 이동했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1990년대 우수한 의료진이 대학병원으로 이동하는데도 원자력병원은 그 의사들을 잡지 못했다”며 원자력병원의 무능함을 꼬집었다. 2000년대에는 대학병원들이 암 병원을 만들었고, 이 시기에 국립암센터도 설립됐다. 우수한 의료진이 있는 암 병원이 많아지자 암 환자들로선 굳이 원자력병원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이때부터 이 병원의 재정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특히 2007년 ‘부속병원’ 간판을 떼고 독립한 이후에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재정 상태가 이어졌다.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 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영업이익은 -144억원, 부채는 1940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매출 1677억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빚을 갚는 데 사용해도 어림없는 규모다. 세금도 4년째 내지 못하고 있다. 과세표준 금액이 2010년 -75억원에서 지난해 -350억원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사립기관이라면 이미 파산 상태인 셈이다. 원자력병원 관계자는 “이번 달 월급도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병원에 불안감이 팽배하다”며 “정부 출연금은 연구 분야(방사선의학연구소 등)에 사용되기 때문에 병원은 벌어서 먹고살아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이 병원의 재무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진 지난 몇 년 동안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의 지적이 반복됐다. 2009년에는 스타급 의료진의 이직이 심해 경쟁력 약화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지난해에는 공공의료기관으로 안정적인 수익 창출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적을 받았다. 담당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과거 교육과학기술부)는 줄곧 원자력병원에 수익을 높일 방안과 공공성을 확보할 계획을 마련하라고 요구해왔다. 지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원자력병원은 인력을 줄였다. 그럼에도 차입금은 매년 늘어나 지난해에만 937억원을 넘어섰다. 원자력병원 관계자는 “정부가 공공의료와 수익 증대라는 상반된 주문을 하고 있다”며 “우리는 외부로부터 돈을 빌려 겨우 먹고사는 방법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세월호 사태보다 심각한 상황 생길 수도”

원자력의학원(원자력병원·방사선의학연구소 등) 노동조합은 5월27일 과천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미래부가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의 하나로 병원에 경영 개선안만 요구해왔을 뿐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였다. 정연준 노조위원장은 “미래부는 병원에 돈벌이를 강조하며 직원들에게 인력 감축, 구조조정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며 “이는 환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노조는 조철구 의학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여 그 결과를 미래부에 전달했다. 정 위원장은 “지난달 급여일 하루 전에 월급의 60%만 지급한다는 공문을 받고 당황스러웠다”며 “그럼에도 기관장은 아무런 비전과 약속을 제시하지 못해 직원들의 불신과 불안이 쌓이고 있어 의학원장 퇴진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미래부는 “정부는 원자력의학원에 일방적으로 경영 개선을 강요한 적이 없다”며 “병원에 대한 지원 부분은 기획재정부와 협의를 거쳐 진행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원자력병원은 원자력발전소 사고나 원자력 테러 등 국가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방사능 피폭자를 진료하는 국가기관이다. 그러나 전문 의료진이 이 병원을 떠나고 재무 상태마저 위태로워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교수는 “한국의 의료수가는 의료 행위의 75% 수준이어서 원자력병원을 포함한 모든 국·공립 의료기관은 이미 의료 행위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는 단계”라며 “병원이 돈벌이에 내몰리다 보면 환자 생명과 안전에 소홀하게 돼 앞으로 세월호 사태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병원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전국 10개 국·공립 병원의 재정 상태는 모두 적자다. 기획재정부 고시 자료를 보면,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곳은 서울대병원(분당서울대병원 포함)이다.

한국의 원자력의학원과 유사한 기관이 일본의 방사선의학종합연구소와 미국의 국립암연구소다. 일본과 미국의 연구소는 2012년 각각 1778억원과 5조2000억원의 예산을 사용했다. 예산의 80%는 정부가 지원하며, 환자 치료로 번 돈은 잡수입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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