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마천루에서 국민의 자존심을 보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4.06.2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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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빌딩·세운상가·정부종합청사 등 대형 빌딩 잇따라 들어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빌딩은 경제 개발과 선진 조국을 한눈에 보여주는 심벌이자 근대 도시에서 현대 도시로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이미지이자 실체였다. 6·25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안정과 질서를 되찾아가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5·16 이후에는 국제주의적 경향, 즉 모더니즘 건축이 새로운 시대적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세련된 선진 조국의 상징으로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국민의 자존심으로 비쳤다.    

전후 복구 사업은 건축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54년 남대문교회 설계 공모와 공모작 전시회가 열려 건축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또 김윤기의 한국문교서적 인쇄 공장이 준공되면서 공장 건축이 건축의 중심을 이루게 됐다. 운크라(UNKRA·유엔 한국재건위원회)와 유네스코(UNESCO)의 지원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립된 이 공장은 연간 3000만권의 책을 찍어 문맹을 퇴치하는 데 기여했다. 또 같은 해에 문경 시멘트 공장, 배기영의 제일모직 공장, 충주 비료공장, 인천 판유리공장(1955년) 등이 세워졌다. 특히 철골조의 대구 제일모직 공장(현 대구오페라극장 옆)이나 1959년 김중업이 설계한 안양 유유산업 공장은 대표적인 공장 건축으로 그 어렵던 시절 이런 호사(?)를 누렸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세운상가 ⓒ 정준모 제공
권력자 지시로 국회 지붕에 돔 올라가

1955년 김태식의 남산 국영 제1방송국, 정인국의 인하공대 기공관과 기숙사, 공군본부 청사를 시작으로 1956년 강윤의 이화여대 강당과 송민구의 동국대 본관, 1957년 강명구의 수원 소재 서울대 농대 기숙사 등 각 대학이 환도 후 서울로 올라오면서 학교 건축도 활황을 이룬다.

1953년 육군공병단은 반도호텔을 복구했다. 반도호텔은 지하 1층, 지상 8층 건물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이 건물에는 미국 시카고 출신의 노만 데 한이 한국 최초로 실내 디자인 개념을 적용했고, 강명구가 참여하면서 건축과 별개로 인테리어 디자인이 자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54년 서울 종로의 계영빌딩(강명구)은 기하학적인 구성의 외관을 갖춘 모더니즘풍의 건물이었다. 벽돌과 내력벽 구조의 부족한 재료와 기술력에도 당시 건축가들은 합리적인 모더니즘 건축의 외양을 완성해냈다. 또 단성사·대한극장·국제극장·을지극장 등 여러 영화관이 세워지면서 서울은 현대적인 풍경으로 채워졌다.

5·16으로 시작되는 1960년대에는 경제 개발에 따라 건축 수요가 급증했다. 가장 큰 건축주는 정부였다. 변화는 시대적 화두였고 내부의 변화보다는 외적인 변화가 더욱 강조됐다. 김정수가 국내 최초로 알루미늄 새시와 커튼 월 공법으로 설계한 가톨릭대학성모병원(명동, 1958~63년)과 기독교청소년회관(YMCA회관, 1960년)은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그 후 배기형의 명동 유네스코회관(1959~66년)과 이천승의 서울시민회관(1961년), 김희춘 등의 워커힐(1962년) 등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1964년에는 이광노의 한양컨트리클럽, 강명구의 예총회관, 이천승과 정인국의 조흥은행 본점이 세워졌다. 그 후 김희춘이 경기도청(1967년), 이희태가 절두산 순교기념성당(1967년) 등 국제주의적 양식의 건물을 설계했다.

특히 김중업과 김수근의 귀국을 계기로 한국 건축은 다변화하며 새로운 건축 미학이 실천에 옮겨졌다. 김중업은 유유산업 공장을 시작으로 프랑스대사관(1960~62년)·서강대 본관(1960년)·제주대 본관(1964년)·삼일빌딩(1969년)을, 김수근은 워커힐 힐탑바(1961년)를 시작으로 자유센터·정동 문화방송 사옥(1965년)·타워호텔(1967년)·홍릉 과학기술연구소(1969년) 등을 완성하면서 건축계는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이런 국제주의적인 양식에 대한 반성과 한국적인 건축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을 계기로 한국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스타일은 창조했지만 미학적인 완성에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세운상가(1966~68년)는 일찍이 ‘선진 조국’과 ‘조국 근대화’를 통해 서울의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이 윤락업소가 즐비하던 종로와 퇴계로 일대에 대한 정비 사업을 할 때 김수근은 종로3가와 퇴계로3가를 공중 보도로 연결하는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는 뜻의 주상복합건물 세운상가를 설계했다.

이즈음 한국 건축은 대형·고층화의 시대로 접어든다. 비좁은 중앙청을 정부청사로 사용하면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중앙 부처를 한 곳에 입주시켜 행정의 효율과 국민 민원 편의를 제공하고자 정부는 지하 3층 지상 22층의 건물을 정부종합청사(1967~70년)로 건립했다. 이 건물은 원래 나상진의 안이 당선됐으나 돌연 미국의 PA&E 안으로 바뀌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공법인 슬립폼 공법, 일명 활동식 거푸집 공법으로 지어져 수직성이 강조되는 외관을 갖추었다.

① 1967년 건립 당시의 유네스코회관 ②옛 서울도큐호텔(현 단암빌딩) ③박득순 , 1949년, 캔버스에 유채 98 x 162cm, 타워호텔 소장 ⓒ 정준모 제공
세종문화회관은 설계자 의도 제대로 반영

김중업이 설계한 삼일빌딩(1968~71년)은 세운상가 및 삼일고가도로와 함께 1970년대 수도 서울의 풍경을 책임지는 건물이었다. 지상 31층으로 지상 높이가 110m에 달하는데, 1985년 63빌딩이 완성될 때까지 대한민국 최고 높은 빌딩이었다. 목재 사업과 해운업으로 부를 일군 삼미그룹이 당시 30억원을 투입해 세운 이 건물은 철골과 유리를 사용해 현대적 건축 공법을 자랑하기도 했다. 20층의 조선호텔(1967년), 화재 사고로 유명해진 대연각호텔(1969년) 등이 이즈음 들어섰다. 그 후 플라자호텔(1976년), 남산의 하얏트호텔(1978년)과 반도호텔 자리에 건설된 롯데호텔(1979년)이 서울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갔다. 또 박춘명의 동방생명빌딩(1976년)이나 서울역 앞 대우센터(1976년) 등 업무용 빌딩도 ‘선진 조국’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 일조했다. 

남산에 건립될 예정이었던 국회의사당은 1959년 설계 현상공모까지 마쳐 유학생이던 김수근·박춘명·강병기·정경·정종태의 안이 선정됐지만 자유당 정권 붕괴와 5·16으로 백지화됐다가 1969년 여의도에 국회의사당(1969~75년)을 건립한다. 하지만 설계자 선정을 싸고 지명·사퇴·제명 등 잡음이 그치지 않았다. 결국 본 설계안이 확정됐지만 권력자의 사공 노릇에 의해 난데없이 지붕 위에 돔이 올라가고, 건물의 비례도 부서져 1975년 여의도 의사당이 준공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엄덕문의 세종문화회관(1973~78년)은 설계자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된 운 좋은(?)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고건축의 기둥을 차용해 열주를 사용한 고전적 근대주의와 한국 전통 건축의 기둥과 문, 처마와 지붕, 창살 무늬, 추녀선 등의 세부를 현대적으로 반영해 ‘전통 건축의 현대적 해석’을 요구하는 당시 관제 건축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 위주의 현대 감각에 고유의 정서를 가미한 디자인’을 고수함으로써 한국 현대 건축의 백미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특히 건물 외벽의 격자 무늬 장식과 김영중의 벽면 좌우에 자리한 ‘날아오르는 비천상’은 웅장한 건물을 날아오르듯 가볍게 만들었다. 또 전통과 현대라는 시간의 초월을 이뤄낸 김찬식의 ‘노래하는 대장군상’ , 유화가 권옥연과 변종하가 각각 만든 극장 무대막 그림, 엄덕문이 디자인하고 전뢰진이 조각한 2층 중간층 귀빈용 로비의 십장생 벽화 등을 통해 당대 문화의 총체적 결집체로서 호사를 누린 건물이다. 하지만 부동산 붐이 과열되면서 한국에서 건축은 사라지고 건물과 부동산만 남아 여전히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언제쯤 다시 건축을, 문화를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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