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에서 죽음의 게임 펼쳐지다
  • 허남웅│영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07.0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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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바둑 소재 조범구 감독의 <신의 한 수>

요즘 한국 영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60~70%를 상회할 정도의 한국 영화 점유율을 보여주지 못해서가 아니다. 예전만큼 관객의 이목을 끌 만한 대중영화를 찾기 힘들어진 이유가 더 크다. 그와 같은 볼멘소리의 중심에 <우는 남자> <하이힐> <황제를 위하여> 등과 같은 폭력 묘사가 과도한 액션영화가 자리하고 있다. 극 중 폭력이 왜 필요한지 이야기로써 설득하지 못해 흥행 면에서나 작품성 면에서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빈약한 이야기를 자극적인 폭력 묘사로 가린다는 비판이 흘러나온다.

<신의 한 수>는 그런 걱정을 날릴 만큼 대중적으로 잘 빠진 오락영화다. 기자시사회에서 무대 인사에 나선 정우성은 이 영화를 일러 “기본에 충실한 성인 액션 오락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액션이 중심에 서는 <신의 한 수>는 앞서 언급한 영화처럼 폭력의 수위가 꽤 높다. 그런데 운용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내기바둑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 과정을 액션으로 치환해 보여주는 것이다. 대신 영화는 ‘착수(바둑판에 돌을 놓다)’ ‘곤마(적에게 쫓겨 위태로운 돌)’ ‘계가(바둑을 다 두고 승패를 가리다)’ 등과 같은 바둑의 전개 순서를 고스란히 챕터로 삼아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 쇼박스 미디어 플렉스 제공
프로바둑 기사 태석(정우성)은 살수(이범수)가 팀을 운영하는 내기바둑 판에 끼어들었다가 형을 잃고 심지어 살인 누명까지 쓴 채 교도소에 복역하는 지경에 이른다. 수감 생활 동안 태석은 살수에 대한 복수 의지를 불태우고 출소 후 내로라하는 내기바둑 선수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술을 좋아하는 장님 바둑꾼 주님(안성기), 수다로 상대방을 교란하는 꽁수(김인권), 바둑 내기로 한쪽 팔을 잃은 허목수(안길강)로 팀을 꾸린 태석은 패배가 곧 죽음으로 직결되는 살수와의 마지막 한 판 승부를 준비한다.

기본 충실한 성인 ‘바둑’ 액션 오락물

내기바둑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신의 한 수>는 기본적으로 돈과 물질에 대한 인간 군상의 욕망을 해부한다. 돈이라면 활활 끓는 지옥 불에도 뛰어드는 부나방의 세계에서 폭력은 인간의 욕망을 가장 즉각적이고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필수 요소다. 충무로에는 이와 같은 욕망을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에 빗대 특화한 장르가 있다. 바로 ‘사기 누아르’다. 주로 화투와 같은 도박의 세계를 배경으로 액션을 가미한 작품을 말하는데 최동훈 감독의 <타짜>(2006년)가 큰 인기를 모으면서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최동훈 감독은 <타짜> 외에도 <범죄의 재구성>(2004년), <도둑들> (2012년)과 같은 사기 누아르를 전문으로 만들고 있고, 그 바통을 이어받아 강형철(<과속스캔들>(2008년), <써니>(2011년)) 감독은 올 추석 개봉 예정으로 <타짜-신의 손>을 만들고 있다. 또한 같은 사기 화투를 소재로 올해 <고스톱 살인>이 개봉했고, 작전 세력과 600억원 주식 전쟁을 전면에 내세운 <작전>(2009년)이 화제를 모은 적도 있다. 하지만 바둑은 화투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급(?) 인구가 적은 데다 판세를 한눈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아 그동안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별로 없다.

공교롭게도 올 상반기에만 <스톤>과 더불어 <신의 한 수>까지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가 두 편 개봉했다. <신의 한 수>를 연출한 조범구 감독은 프리프로덕션에만 5년을 할애할 정도로 자료 조사를 방대하게 해 바둑 기보만 100여 개 가까이 만들어 그중 상당수를 영화에 반영했다. 단수와 급수를 설정해 극 중 캐릭터에 맞게 표현했다고 하니 바둑을 아는 이에게는 수를 보는 재미가 있다. 수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판세가 액션으로 대체되니 바둑을 모르는 이라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다.

<타짜> <도둑들> 계보 잇는 ‘사기 누아르’

이런 식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의미하는 ‘사활’ 챕터에서 태석과 살수는 목숨을 건 최종 대결을 펼친다. 이때 태석은 흰색 양복을, 살수는 검은 양복을 입고 인간 바둑돌이 되어 내기를 하던 중 바둑을 다 두고 승패를 가리는 ‘계가’를 주먹과 칼이 맞붙는 액션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신의 한 수>가 주는 재미가 있다.

태석이 주먹을, 살수가 칼을 사용해 벌이는 싸움은 곧 이들이 바둑을 둘 때 보이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우연하게 내기바둑의 세계에 들어간 태석은 팀을 꾸리고도 마지막 순간 살수의 조직과 홀로 맞붙는 주먹처럼 우직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 살수는 따로 몰래 마련한 방에 내기바둑 판의 꽃이라 불리는 배꼽(이시영)을 숨겨두고 그녀의 지시에 따라 태석과 맞서며 불리할 때면 폭력도 서슴지 않는 칼과 같은 잔인무도함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려 든다.

사실 바둑을 영화로 옮기기 쉽지 않았던 것은 정적인 스포츠, 즉 두뇌를 이용한 게임인 까닭에서다. 조범구 감독은 여기에 동적인 액션을 가미하면 흥미진진한 오락 액션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바둑이라는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죽고 사는 사활이나 목숨을 걸고 육체와 육체가 맞붙는 액션이나 승부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조화의 핵심이다. <신의 한 수>가 최근 유행하는 잔인한 폭력영화에 묶이지 않고 2000년대 중반 이후 형성된 사기 누아르의 계보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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