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공돌이·공순이, 노동의 새벽 열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4.07.24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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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발전의 전진기지’ ‘노동운동의 메카’ 구로공단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변화와 발전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곳은 아마도 구로공단이 아닐까. 1960년대에 논과 밭이었던 이곳에 공단이 조성돼 한국 수출 산업의 전진기지가 되더니 첨단 산업이 입주하면서 이름을 구로디지털단지로 바꾸고 ‘IT 한국’의 위상을 뽐내는 곳으로 변했다. 아무리 ‘상전벽해’라지만 한국의 ‘급속 성장’ ‘압축 성장’ 결과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구로공단 말고 또 어디 있을까. 

대한민국은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개발도상국가에서 선진국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성장의 이면에는 분배와 불균형이라는 성장통이 가려져 있지만, 그래도 ‘잘살아보세’라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 탑승한 것이다.

구로공단은 1964년 5월20일 한국산업단지공단의 전신인 사단법인 한국수출산업공단이 공단을 조성하면서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주로 봉제공장이나 제조업, 경공업이 중심을 이뤄 전성기인 1970년대 후반에는 약 11만명이 근무하는 대단위 공단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산업 구조가 개편되면서 재벌기업이 주도하는 중공업 단지로 변모하면서 기계화·자동화가 이뤄졌고 인력난으로 입주 기업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해 1995년에는 근로자가 1970년대의 절반인 4만50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정부는 IT 첨단 산업 단지로 육성해 이름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었다. 이후 일명 ‘G-밸리’로 불리며 1만여 개 업체, 14만여 명이 일하는 대한민국 IT 산업 밸리로 각광받고 있다. 외양도 변해서 나지막한 제조업 중심의 공단이 고층의 아파트형 공장으로 바뀌어 새로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 1974. 작자 미상. ⓒ 정준모 제공
이런 외형적 발전과 변화의 이면에는 우리 언니·누나·형님들의 땀과 눈물이 녹아들어 있다. 당시 봉제공장과 가발공장 그리고 전기·전자 부품, 금속과 완구, 잡제품이 수출과 내수를 책임지던 시절 그 중심에 있었던 이들을 ‘공순이’ ‘공돌이’라 불렀다. 이들은 청운의 꿈을 품고 일자리를 찾아 ‘이촌향도(離村向都)’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특히 전국을 강타한 1960년대 대형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닥치고 흉년이 거듭되면서 많은 농촌의 처녀·총각, 심지어 10대 소년·소녀들까지 일단 서울로 가면 배는 곯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고, 배운 것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가장 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은 구로공단과 평화시장의 가발공장·봉제공장뿐이었다. 

근로자의 70%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딸로 태어나 서울에 올라와 큰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어 고향집에 보내 동생들 공부시키고 소와 돼지를 사서 키우도록 하는 장한, 게다가 수출 산업 역군으로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자랑스러운 아들딸이었다.

구로공단, 1964년 생겨 1970년대 11만명 근무

구로공단이 만들어진 지 10여 년이 지난 1977년까지도 구로공단 산업 인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근로청소년 중 50%가 조금 넘는 숫자가 겨우 초등학교를 마쳤을 뿐이었다. 그래서 1976년부터는 산업체에서 일하는 근로 청소년들에게 학력과 교양 그리고 근로의욕을 북돋워주며, 나아가 산업 활동에 필요한 진보적인 직업 기술을 습득하도록 ‘산업체 특별학급’을 설치해 수업료와 입학금, 기타 공납금을 일절 내지 않고 중등교육을 받도록 했다. 말 그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은 신파 같은 이야기지만 여동생이 구로동이나 평화시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 오빠를 대학에 보내는 근대적 남성우월주의 시대를 그대로 답습하는 시절이었다. 오늘날의 노동법이나 여권 신장 같은 것은 사회적으로 ‘사치’에 불과했다. 

당시 근로 청소년들의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야근과 특근은 기본으로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 것이 일과였고, 잠 안 오는 약을 먹어가며 밤을 새워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예사였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생기는 법. 국가는 조국 근대화를 이루며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산업화의 그늘은 더욱 짙어만 갔고 그 바탕에는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구로공단과 평화시장을 상징하는 봉제업은 노동 집약적 산업으로 옷감에서 나는 특유의 먼지와 날염 때문에 냄새가 진동했고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로 소음이 그칠 새가 없었다. 당시 이들의 수입을 살펴보면 경력 3년 차, 17세 여공의 월급봉투를 보면 생리휴가도 없이 일요일까지 일해서 받는 한 달 월급이 초과수당 3000원을 포함해 총 2만2000원에 불과했다. 지출은 방세 5000원, 쌀값·점심값으로 1만3000원, 전기·수도 요금 700원, 버스비 2100원을 지출하고 나면 수중에는 겨우 1200원이 남는 열악하다 못해 최저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악조건이었다. 평화시장의 봉제공 ‘시다보조’들에 비하면 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평화시장 인근의 봉제공장들은 이른바 기술을 배울 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유일한 노동에 대한 보상이었다. 봉제공장 주인들도 이들과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일했다. 가내수공업 수준의 공장과 숙소와 식당이 집적(?)된 공장, 먼지구덩이에서 주인과 직공이 한 몸이 돼 재단을 하고 재봉틀을 돌렸으며, 그러다 기술을 배우면 또 다른 영세 봉제공장을 차려 나가 독립했다. 하지만 주인이 됐다고 그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 2005. 임옥상. 박노해 시집 . 1984. ⓒ 정준모 제공
‘학생운동가’ 김문수·심상정·원희룡 위장 취업

봉제공들이 공장에서 먹고 자고 일할 때 구로공단 공순이들은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미로처럼 돼 있는 ‘벌집’에서 살았다. 벌집은 5·16쿠데타 이후부터 1961년 말까지 도심에 있던 불량 주택을 철거하고 미아동·망원동·구로동으로 분산해 거주시키면서 탄생한 주거 양식이다. 1961년 당시 서울시는 구로동에 공영주택 600동과 간이주택 275동을 세웠다. 공영주택은 시멘트 블록을 사용해 부엌을 가운데 두고 방 2개가 연립으로, 간이주택은 부엌 하나에 4가구를 이어 붙여 짓고 제비뽑기로 무주택 영세가구에 무상으로 주었다. 이런 공영·간이 주택이 공단의 여공들에게 보금자리가 되었다. 외관상으로 단독주택이지만 호당 10~30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방과 부엌이 병렬로 계속 이어지는 구조였다. 보통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2평이 채 안 되는 방 한 칸에 4~5명이 함께 사는, 그래서 가스 중독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런 구로공단은 ‘산업 발전의 전진기지’인 동시에 ‘노동운동의 메카’ ‘민주화의 성지’라는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곳이 됐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 대학생과 종교인, 재야 운동가 등 지식인들은 야학과 위장 취업 등의 방식으로 구로공단으로 향했고, 이들은 노동운동을 전개하면서 반(反)유신 투쟁을 병행했다. 이에 구로공단의 ‘공순이’들도 다시 세상에 눈을 뜨면서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저항을 시작했다. 1985년 대우어패럴 사건으로 입주 노동자들이 연대해 처음으로 동맹파업을 벌인 곳도 구로공단이다. 종교인 인명진 목사, 정치가 김문수·심상정·원희룡 같은 이들은 구로공단이 낳은 산업역군이 아니라 민주투사들이다.

하지만 구로는 산업화·민주화의 성지이기 전에 예술의 본향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1984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시작으로, 신경숙은 1978년부터 구로공단의 공순이로서의 삶을 토대로 <외딴방>(1994년)을, 영화로는 김응천의 <불타는 소녀>(1978년)를 시작으로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 <어둠을 뚫고 태양이 솟을 때까지>(1987년), <구로아리랑>(1989년), <장미빛 인생>(1994년), <박하사탕>(1999년), <눈물>(2000년), <가리베가스>(2005년) 등이 제작됐다. 그때 그 시절 대한민국의 오늘을 일구어낸 국가유공자 공순이들은 과연 오늘을 예술처럼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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