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농업기업 공세 시작된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4.08.0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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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정보·환경공학 접목해 장악력 키워

2015년 국내 쌀시장이 개방된다. 피하기 어려운 대세라는 게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문제는 단순히 국산과 수입 쌀의 경쟁이 아니다. 농민과 농업 전문가들은 다국적 농업기업의 힘과 경쟁력을 우려하고 있다. 이른바 ‘곡물 메이저’로 불리는 해외 농업기업들은 10년 전부터 한국 쌀시장을 정조준해왔다. 세계 각국 지사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고, BT(생명공학)·IT(정보공학)·ET(환경공학)를 동원해 세계 곡물시장을 주무르고 있다.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약 23%다. 옥수수와 밀은 1%를 밑돌고 대두도 10% 안쪽이어서 그나마 쌀 자급률(89%)로 버티고 있다. 쌀시장이 곡물 메이저에 넘어가면 한국 농업은 일개 기업에 의해 흔들리는 신세가 된다. 한국인에게 쌀은 주식인 만큼 그들은 쌀을 볼모로 다른 통상 문제를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다.

생명운동연대는 2013년 5월 서울 종로구에 있는 몬산토코리아 앞에서 GMO(유전자변형식품) 반대 시위를 했다. ⓒ 연합뉴스
우리 정부나 국내 기업들이 외면하는 사이 다국적 곡물 메이저들은 쌀시장 진입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2004년 WTO(세계무역기구) 쌀 협상 때 한국에 불리한 조항을 만든 배후가 곡물 메이저들이다. 이를테면 쌀 소비량의 10%를 의무적으로 수입하며, 그 가운데 30%는 가정용 쌀을 수입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수입 쌀을 식탁에 올려 한국인 입맛을 빼앗으려는 의도다. 또 국내 도매상은 국산과 수입 쌀을 모두 취급해야 한다는 항목도 있다. 의도적으로 수입 쌀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다. 농민의 고령화·영세화로 명맥이 위태로운 한국 농업의 현실도 곡물 메이저에 유리한 상황이다. 통상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는 “곡물 메이저가 10년 전부터 쌀 협상에 정교한 장치를 마련해둔 이유는 국내 농업, 특히 쌀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장기적인 사전 포석”이라고 분석했다.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카길의 한국법인(카길애그리퓨리나)은 국내 곡물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카길, 인공위성으로 세계 작물 상황 파악

연 5조원 이상의 곡물을 수입하는 세계 5위 수입국인 한국에 곡물 메이저들은 일찌감치 진출했다. 대표적인 곡물 메이저는 ‘카길(cargill)’이다. 회사명은 생소하지만 한국전쟁 후 식량 원조로 막대한 이윤을 챙겼던 기업이다. 63개국에 지사를 두고 쌀·밀·옥수수·콩 등 모든 농산물을 유통하면서 국제 곡물시장을 좌지우지한다. 1865년에 설립됐고 한국에는 2001년 법인을 만들었다. 2007년 국내 사료업체를 인수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사료 공장을 충남 당진에 마련하면서 현재 사료시장 1위 자리를 꿰찼다.

이들은 각국에 ‘힘들게 농사짓지 말고 자신들을 통해 농산물을 구매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그들이 원하는 가격을 지급할 때의 얘기다. 1980년 냉해로 흉작을 맞은 한국이 쌀을 수입하려고 하자 곡물 메이저는 톤당 200달러에서 550달러로 올렸다. 한국은 그 가격에 구걸하다시피 쌀을 수입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것도 5년 동안 수입한다는 조건이었다. 특히 한국인이 먹는 쌀 품종(자포니카)은 세계 교역량이 매우 적어 수입선을 바꾸기도 마땅치 않다.

곡물 메이저가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세계 각국의 작황을 손금 보듯이 들여다본다는 점이다. 카길은 인공위성으로 세계 주요 곡창지대의 작황을 매일 세 차례씩 점검한다. 미국 CIA(중앙정보국)도 이 기업의 정보를 얻어 사용할 정도다. 여기에 각국에 뿌려놓은 지사를 통해 입수한 정보까지 합해 세계 농업 흐름을 한눈에 파악한다. 또 이들의 로비력은 세계시장을 좌우할 정도로 세다. 2003년 “WTO 협상은 카길 협상”이라는 비판이 일 정도로 WTO 협상에서 카길이 내놓은 의견이 미국 정부 안에 그대로 반영됐다.

일각에서는 규모가 작은 한국 쌀시장은 곡물 메이저에 매력적인 먹잇감이 아니라고 본다. 높은 관세율로 쌀시장을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고, 집에서 먹는 쌀 소비가 줄어들기 때문에 수입 쌀이 발을 못 붙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태훈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곡물관측실장은 “가격·관세율·환율 등을 종합해보니 수입 쌀이 비싸서 국산보다 많이 팔리지 않을 것 같다”며 “따라서 당장 곡물 메이저의 쌀시장 간섭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곡물 메이저가 시간을 가지고 쌀시장을 장악해나갈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실제로 국내에 진출한 곡물 메이저들은 농대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공생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박환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곡물 메이저가 당분간 국내 쌀시장을 장악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농가의 고령화·영세화로 5~10년 후 쌀 생산량이 감소하면 곡물 메이저의 공세가 본격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송기호 변호사도 “고관세라도 곡물 메이저는 덤핑 등으로 얼마든지 판매 가격을 조절할 수 있다”며 “미국 캘리포니아산 쌀은 경기미나 이천 쌀보다 맛이 뒤지지 않는 데다 포도당을 강화한 기능성 쌀로 우리 입맛을 공략하면 대책이 없다. 가정용 쌀 소비는 줄어도 떡·쌀과자 등 가공용 쌀 수요는 있다”고 말했다.

곡물 메이저는 한국이 벼농사를 하려면 로열티를 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1997년 국내 최대 종자회사인 흥농종묘·중앙종묘를 인수한 ‘몬산토(monsanto)’는 고추·무·배추 등 수십 가지 종자 특허도 손에 넣었다. 그런 탓에 수백 년 동안 재배해온 청양고추를 심을 때마다 우리 농가는 이 회사에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국내에서 재배되는 작물의 4분 1만 재래종이고 나머지 종자는 몬산토 등 외국 기업에 넘어갔다. 한국이 앞으로 10년간 지급할 로열티와 수입액을 합치면 8000억원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시사저널 우태윤
외국에 로열티 주고 쌀농사 짓게 될 수도

1901년 설립된 몬산토는 과거 살충제(DDT)와 고엽제를 팔아 기반을 다진 업체다. 1982년 세계 최초로 식물 세포의 유전자 변형에 성공한 후, 생명과학 사업에 집중했고 세계 최대 유전자변형식품(GMO) 기업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 GMO의 90%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국산 쌀 종자가 몬산토의 손에 들어가면 GMO 쌀을 먹게 된다는 우려가 나왔다. 현재 한국은 GMO 쌀 유통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사례를 보면 한국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미국은 일본과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을 통해 미국산 쌀에 대한 유전자 변형 검사제를 폐지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GMO 쌀이 시중에 풀려도 한국인은 GMO에 민감하므로 그 쌀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에 대해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미국 쌀 95%에 여주 쌀 5%를 섞어 팔면서 수입 쌀이라는 문구를 작게 표기한다”며 “GMO 쌀도 일반 쌀과 혼합하고 GMO 표기를 작게 하면 소비자는 속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해성 논란은 접어두고라도 실제 GMO가 한 나라의 농업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남미의 대표적인 농업 국가 아르헨티나는 곡창지대인 팜파스에 옥수수·밀·해바라기·대두 등 각종 채소와 과일을 재배했다. 1990년 적은 생산량으로 인해 수확량을 늘릴 방법을 찾다가 몬산토가 공급한 GMO 대두를 심었다. 제초제에 내성을 갖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종자였는데, 엉뚱하게도 제초제에 저항력을 가진 슈퍼 잡초가 생겼다.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지고 제초제로 가축이 죽는 등 피해가 발생하자 2004년까지 농민 15만명이 농업을 포기했다. 카길과 몬산토 등 다국적 곡물·종자 회사와 연계한 자본가들이 그 농토를 차지했고, 아르헨티나는 식량 주권을 잃었다.

인도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가 2009년 허핑턴포스트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인도에도 몬산토의 GMO 면화가 공급됐지만 생산성이 기대에 못 미쳤고, 과거 kg당 7루피이던 종자 가격이 2009년 1만7000루피로 올랐다. 10년 사이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 20만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곡물 메이저는 농업에 과학을 접목해 국제 곡물시장에 대한 장악력을 견고히 하고 있다. 몬산토는 지난해 빅데이터 벤처기업(클라이밋)을 약 1조원에 인수했다. 구글 출신 과학자들이 2006년 창립한 이 회사는 날씨 예측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몬산토는 농민들이 날씨에 따른 작황 변화에 민감하다는 점에 착안해 미국 전역을 잘게 나눠 지역별로 기온과 강수량 등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 밖에 쌀 유전자 정보까지 해독한 ‘신젠타(syngenta)’도 2001년 한국에 진출해 전북 익산에 농화학 공장을 세웠고,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ADM)’, ‘벙기(bunge)’, ‘루이드레퓌스(LDC)’ 등 다국적 곡물 메이저들이 한국 시장을 노리고 있다.

한국판 카길 사업 가능할까?

2008년과 2010년 곡물가 급등에 놀란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대안은 ‘한국판 카길’ 사업이었다. 유사시에 외국으로부터 곡물 메이저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곡물을 조달한다는 구상이다. 2010년 민·관 합동으로 사업 계획을 검토했으나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민간 기업 중 곡물 구매와 판매 등 핵심적 역할을 맡기로 했던 CJ가 채산성을 맞추기 어렵다며 막판에 불참을 선언했다. 우여곡절 끝에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주도하고 삼성물산(곡물 무역)·STX(해상 운송)·한진(육로 운송)이 참여했다.

2011년 4월 세계 곡물의 80%가 거래되는 미국 시카고에 사무소(aT그레인)를 설립했다. 그러나 곡물 저장·운송 설비 확보나 현지 곡물 기업 인수 등 모든 사업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한국판 카길 사업은 사실상 실패했다. 이대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해외농업개발팀장은 “aT그레인의 실패는 국제 곡물시장 경험이 부족한 탓”이라며 “민간 주도의 곡물 종합상사를 설립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곡물을 조달하려는 시도보다 국내 농업을 튼실하게 만드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박환일 수석연구원은 “쌀은 주식이어서 한 번 무너지면 사회·경제적 파급력이 크다”면서 “최소한의 경지 면적과 농민을 확보하는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호 의장도 “건강한 먹거리를 원하면 농민이 수매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쌀시장 개방했지만, 곡물 메이저 무력화시킨 일본 


일본은 1999년 쌀시장을 개방했지만 곡물 메이저가 힘을 못 쓰는 나라다. 40년 전부터 식량 안보를 강조하며 해외 산지에서 농산물을 직접 조달하는 체계를 갖췄다. 한국의 농협과 같은 조직인 ‘젠노’(전국농업협동조합연합회)와 민간 종합상사가 협력했다. 일본 쌀에 대한 품질 연구는 물론 수확·도정·유통 전 단계에 걸쳐 쌀 생산의 경쟁력을 향상하고 유통 시스템 표준화와 품질 등급화를 통해 일본 쌀이 고급 쌀이라는 이미지도 구축했다.

현재 일본은 400톤, 한국은 40만톤의 쌀을 수입하고 있다.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우리는 쌀독을 외국에 둔 채 숟가락만 들고 그들이 주는 대로 먹어야 할 지경”이라며 “세계 곡물시장 뒤에 곡물 메이저가 도사리고 있는 점을 국민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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