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이 미술계 ‘큰손’으로 뜬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08.0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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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잡지 아트뉴스 ‘세계 200대 컬렉터’와 포브스 부자 순위에 공통으로 23명 올라 한국인으론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유일

세계의 부(富)가 아시아로 움직이고 있다. 현대에서 부를 나타내는 또 다른 척도는 고가의 미술품 컬렉션이다. 미술품 컬렉션은 돈이 모여야만 할 수 있다. 부의 성취가 이뤄지면 자연스레 명예도 함께 쌓을 수 있는 미술품 컬렉션 같은 공익적인 사업을 벌이는 것.

미국에 ‘아트뉴스’라는 미술 전문 잡지가 있다. 이 잡지는 1990년부터 매년 ‘세계 200대 컬렉터’를 발표한다. 컬렉터와 딜러, 경매 관계자, 큐레이터 등을 상대로 ‘영향력 있는’ ‘열심히 모으고 있는’ 정도의 기준으로 컬렉터를 선별한다. 컬렉션의 규모나 거래액 등 수치적인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것이다. 발표 명단도 알파벳 순이다.

❶ 월 마트의 상속녀 앨리스 월튼이 설립한 크리스털 브리지 뮤지엄 오브 아메리칸 아트.❷ 에스테 로더가 건립한 노이에 갤러리.❸ 우크라이나의 부자 빅토르 핀축이 건립한 핀축아트센터.❹ 미술관을 건립해 미국 LA시에 기부하기로 한 억만장자 엘리 브로드가 짓고 있는 미술관 투시도. ⓒ정준모 제공
최근 발표된 2014년 자료에는 여전히 산업혁명 이후 부를 독식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 지역의 컬렉터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아시안 컬렉터들이 7.5%를 차지하며 3위에 올라 있다. 아시안 컬렉터가 향후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최근 부의 흐름 때문이다. 경제 전문 잡지 ‘포브스’가 실시간으로 발표하는 세계 200대 부호 순위를 보면 북미계가 36%, 유럽계가 32.5%, 아시아계가 20.5%를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일본 부자의 수에는 큰 변동이 없는 가운데 중국과 홍콩, 싱가포르, 타이완 등 범(汎)중국계가 약진하고 있고 한국과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슈퍼리치가 속출하며 세계 부의 지도를 바꿔놓고 있다.

또 다른 자료를 보자. 씨티그룹이 발표한 ‘2012년 부(富)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말 재산 1억 달러 이상의 슈퍼리치는 세계에 6만3000명이 있고 이 중 아시아에 2만1000명, 북미에 1만7000명, 유럽에 1만7000명, 남미에 5000명, 중동에 2000명이 살고 있었다. 부의 저변에서는 이미 아시아가 유럽과 북미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쌓은 부를 바탕으로 슈퍼컬렉터로 변신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200대 컬렉터 중 60명 유럽인…소비업종 51명

슈퍼컬렉터는 단기간의 성과가 아니라 안목과 재력과 누적된 컬렉션의 총합이고, 그들에게는 문화의 수호자와 공익의 기여자라는 명예가 붙는다. 컬렉션을 미술관에 기증 또는 장기 대여하거나 자체적으로 미술관을 설립해 일반에 공개하기 때문이다. 슈퍼컬렉터가 되기 위해선 돈만큼이나 오랜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즉 지금 현재 세계 부의 지도와는 시간 격차가 발생하고 있는 것. 그래서 200대 컬렉터 리스트에는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세계 돈의 중심이었던 유럽계 컬렉터가 상대적으로 돋보인다. 

오늘의 제국인 미국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확고부동한 패권을 차지하면서 200대 컬렉터 중 105명을 배출했다. 이 중 46명이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어 뉴욕이 세계 부의 중심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유니클로 회장, ‘아트뉴스’ ‘포브스’ 동시 올라

포브스의 200대 부호 순위는 재산 규모로 줄을 세운 것이다. 200대 컬렉터들이 대개는 엄청난 부호지만 포브스 200대 부자 리스트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포브스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재산을 131억 달러로 평가하고 부자 순위 89위로 올렸다. 이건희 회장의 리움컬렉션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포함해 국내 최고의 컬렉션으로 꼽히고 있고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컬렉션이다. 그럼에도 200대 컬렉터 리스트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미술계 인사들은 몇 년 전 <행복한 눈물> 파동 이후 이 회장 일가가 거의 컬렉션에 나서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과거의 누적된 컬렉션만 소장하고 있고 새로 컬렉션에 나서지 않고 있으면 순위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 리스트에 든 사람은 김창일 아라리오갤러리 회장이다. 충남 천안 쪽에서 부동산과 건설 사업을 벌이는 아라리오그룹 회장이기도 한 그는 7년째 200대 컬렉터 명단에 포함됐다. 국내 재계 순위에서는 중소기업인 또는 지역 기업인으로 분류되지만 그는 아라리오갤러리를 통해 국내의 대표적인 컬렉터로 자리매김했다. 작품을 모으기도 하지만 천안과 서울에 각각 전시공간을 두고 있는 화상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지난해 말 서울 계동의 공간 사옥을 인수해 오는 9월께 이 건물에 미술관을 열 예정이라 서울 쪽에서 지명도가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200대 리스트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 23명이 있다. 또 미술품 컬렉션에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미술품 200대 컬렉터 리스트가 또 다른 세계 부의 지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유럽 컬렉터의 국적을 따져봐도 이 순위가 개인의 부는 물론 나라 전체의 경제력과 무관치 않음이 드러난다. 

200대 컬렉터 중 60명이 유럽인이고 이들의 국적을 따져보면 산업화에 앞섰고 20세기 초반 식민 경영에 앞장섰던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이 압도적으로 많다. 최근 들어 유럽연합(EU)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적 존재감은 약해진 반면 독일의 존재감이 압도적으로 커지고 있다. 유럽의 부가 독일로 이동하고 있는 것. 앞으로 10~20년 후에는 유럽의 컬렉터 지도도 독일을 중심으로 다시 그려질 가능성이 크다.

이들 컬렉터가 어디서 돈을 모았는지 직종별로 따져보면 화장품이나 의류, 소매점 등 소비업종 관련자가 51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이어 투자업(50명), 제조업(34명), 부동산(26명), 금융기관(22명), 상속부자(15명), 미디어와 통신(10명), 첨단 기술 업종(6명) 등의 순이었다. 아직도 전통적인 업종인 소비업종이나 제조업의 비중이 높다. 반면 20세기의 금융 산업이 양산한 헤지펀드 매니저 등 금융 투자자들이 2위라는 점, 또 출판 미디어와 IT 부자가 숫자는 적지만 영향력이 크다는 점에서 20세기 후반 전 지구를 좌지우지한 펀드 자본주의와 IT 혁명의 위력을 실감케 해준다.

주목할 만한 인물은 세계 부자 1위 자리를 놓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와 다투는 멕시코의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 헬루 회장이다. 그는 최근 포브스 부자 순위에서 빌 게이츠를 누르고 1위 자리를 차지했다. 부자이기도 하지만 그는 1조원을 들여 미술관을 짓고 이를 대중에게 공짜로 개방한, 명실상부한 최대의 컬렉터이기도 하다. 당연히 200대 컬렉터 자리에도 이름을 올렸다.

세계 부자 1위 헬루 회장 미술관 공짜 개방

멕시코와 미국에 200개가 넘는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그가 빌 게이츠와 다른 점은 빌 게이츠는 사회 공헌을 기부를 통해 하고 있지만 헬루는 미술품 수집을 통해 하고 있다는 점이다. 빌 게이츠도 다빈치의 드로잉이나 국내 작가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을 사들이는 등 미술품 컬렉터로도 명성이 높지만 헬루 회장만큼은 아니다. 2011년 1조원을 들여 죽은 아내의 이름을 딴 소마야(Soumaya) 미술관을 멕시코시티에 건립한 헬루 회장은 지난 5월에는 1925만 달러를 투입해 아쿠아리움 인버사(Aquarium Inbursa)를 열기도 했다. 소마야 미술관에서는 그가 평생 모은 르네상스 미술품, 인상주의 작품, 근현대 미술품, 라틴 미술품을 입장료 없이 감상할 수 있다.

그가 특히 열광하고 있는 것은 로댕이다. 로댕 작품의 최대 개인 컬렉터일 정도다. 그는 2012년 4월 한국 방문길에도 일화를 남겼다. 삼성생명 앞에 있는 삼성미술관 플라토는 세계에서 8번째로 문을 연 로댕 작품 상설 전시관이다. 로댕의 팬인 헬루가 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는 플라토를 방문해 “나도 소장하지 못한 로댕의 <지옥의 문>이 서울 시내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라는 소감을 남겼다. 그의 플라토와 리움 투어에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동행했다. 비즈니스와 미술이 함께 어우러진 경우다.

부자 순위와 컬렉터 순위에 동시에 이름을 올린 인물 중 대표적인 아시아 사람은 일본의 야나이 다다시 유니클로 회장이다. 현대미술과 컨템포러리(포스트모던)에서 그는 큰손으로 통한다.

한편 이들 컬렉터의 취향을 보면 컨템포러리 컬렉션이 166명, 현대미술이 90명, 근대 이전 대가의 작품이 25명 순(중복 집계)이었다. 이는 거래 여건과도 관련이 있다. 중세의 종교화부터 레오나르드 다 빈치나 루벤스, 렘브란트 등 알려진 대가의 작품은 이미 대부분 귀족이나 부호의 손을 몇 번 거친 후 유럽의 여러 나라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돼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가 없는 것들이다. 다만 현대미술이나 20세기 이후의 컨템포러리 작품은 개인 컬렉션 소유가 많은 까닭에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어 큰손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부자들이 미술품을 수집하고 일반에 공개하는 것 자체가 사회와 문화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미술품 기부에 세제 혜택 등 적극적인 동기부여를 해줄 필요가 있다. 대형 명품 컬렉션 자체가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되고 국격을 올려준다. 우리도 이런 문화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보완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술 컬렉션은 그 자체가 세계 부의 흐름이다. 노쇠한 제국 유럽의 18~19세기 유산이 박물관과 갤러리에 고여 있고, 그것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모인다. 한국에서 고미술 컬렉션을 제외한 변변한 현대미술 컬렉션이 있는 곳은 리움 하나뿐이다. 그것이 세계 문화 지도에서의 한국 좌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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