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맥주는 맛없어, 내가 만들어 마신다”
  • 김지영 기자·조아라 인턴기자 (abc@sisapress.com)
  • 승인 2014.08.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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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에도 맛이 있다. 수십 개에서 수백 가지 맥주 맛의 스펙트럼은 넓다. 그런데 한국인은 이 사실을 몰랐다. 여태까지 마셨던 노란 빛깔 맥주(라거 맥주)만이 맥주의 맛이라 믿고 살았다. 그 세월이 언 80여 년이다. 한국 맥주 소비자들이 뿔났다. ‘밍밍한’ 한국 맥주가 ‘맛없다’며 자신만의 맥주를 찾아나선 것이다. 그 현장을 들여다봤다.


제주도에서 건설업에 종사하는 강호씨(49). 그는 매주 토요일만 되면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3시간짜리 수제 맥주 강의를 듣기 위해서다. 그렇게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지금까지 그가 항공권에 들인 돈만 총 152만원, 수강료 55만원까지 하면 200만원이 넘는다.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이종만씨(49)도 최근 수제 맥주 제조 과정을 알려주는 ‘수수보리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원래 주 1회 평일반만 등록하려고 했다. 그런데 수제 맥주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은 욕심에 주말반도 끊었다. 수강료만 총 130만원이다. 집에서 수제 맥주를 만들기 위해 산 홈브루잉(home brewing) 장비와 재료비만도 수십만 원이 들었다.

용산구 이태원의 ㄹ수제맥주점. ⓒ 시사저널 박은숙
강씨와 이씨는 요샛말로 ‘브루어(brewer)’들이다. 와인처럼 맥주를 직접 만들어 먹는 이들을 뜻한다. 수제 맥주교육기관 ‘수수보리아카데미’ 전은경 실장은 “지난해에 처음 수제 맥주 강의를 시작했을 땐 주류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이 대다수였는데 올해는 20대부터 40~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이 많다”며 “인기에 힘입어 한 반에 20명이던 정원을 올해부터는 25명으로 늘리고 8월에는 고급 과정까지 개설했다”고 설명했다.

 40~50대, 수제 맥주 맛에 취하다

수제 맥주(하우스 맥주·크래프트 비어)는 자신만의 제조법으로 공들여 만드는 술이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제조법이 달라 취향에 따라 수백 가지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카스와 하이트처럼 대기업에서 대량 생산해 장기간 보관하는 ‘라거’(저온에서 하면발효 방식으로 생산한 맑은 빛깔의 맥주)와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이다.

수제 맥주는 2012년 출고량 기준(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자료)으로 보면 아직 국내 전체 맥주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3%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20~30대 ‘맥덕’(맥주 마니아를 뜻하는 조어)만 알고 있던 수제 맥주가 요즘에는 세대의 벽을 허물고 한국의 새로운 술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서울 이태원의 유명 수제 맥줏집 ‘더 부스’나 ‘맥파이’에서 최근 한 달 평균 팔리는 맥주는 3만잔이 넘는다.

처음엔 맥주 마니아들만 알았던 ‘성지(聖地)’ ‘펍 크롤링(Pub Crawling)’ 같은 수제 맥주와 관련된 신조어도 대중적으로 회자되고 있다. 서울 이태원 경리단 길에 모여 있는 국내 유명 수제 맥줏집 거리가 맥주의 성지다. 이곳을 둘러보며 여러 수제 맥주를 맛보는 행위가 ‘성지순례’ 혹은 ‘펍 크롤링’이다.

 주목할 점은 올해 들어서 수제 맥주를 즐기는 연령대가 40~50대 이상 장년층까지 넓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8월8일 이태원 경리단 길에서 만난 40대 직장인 김 아무개씨도 ‘크래프트 웍스→라일리스 탭하우스→로비본드’ 순으로 ‘성지순례’를 하고 있었다.

지난해 이태원 해밀톤호텔 인근에 문을 연 ‘서울 홈브루’에서 수제 맥주 재료 및 제조 장비를 사는 연령대도 40대 장년층이 많다. 서울홈브루 박상갑 매니저 얘기다. “최근 한국 손님이 20~30% 정도 늘어났는데, 의외로 40대 장년층 남자 손님들이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며 “최근에는 아이피에이(IPA)나 노멀 에일(Normal Ale) 등 영국식 수제 맥주(에일)를 만드는 제조 장비가 잘 팔린다”고 전했다.

신혼여행을 가서 200여 종의 맥주를 마시러 돌아다닐 정도로 맥주 마니아인 양성후(남)·김희윤 부부. 용산 이태원에 ㄷ수제 매장을 개점했다. 손에 든 맥주는 이 부부가 직접 만든 맥주. ⓒ 시사저널 구윤성
“한국 맥주 맛없다”는 맥주 마니아들

취미활동으로 시작했다가 수제 맥주 맛에 빠져 창업한 경우도 종종 있다. 지난해 12월 말 해방촌에 수제 맥줏집 ‘락스피릿’을 연 정태훈씨(37)가 대표적이다. 그는 10년 동안 다닌 외국계 자동차 부품회사를 그만두고 맥주 교육기관에서 수제 맥주 제조 기술을 배운 후 아예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정씨가 직접 만든 맥주 ‘갤럭시IPA’는 10번의 실패를 거쳐 나온 작품인데 최근 인근에서 테이크아웃을 요청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무엇이 40~50대 아저씨들까지 한국 국민주(酒) 경지에 오른 카스·하이트를 버리고 수제 맥주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일까. 대답은 한결같이 “국산 맥주는 맛이 없어서”였다. 맥주 마니아 강호씨(49)는 “시골에 사는 어머니가 올해 65세인데 최근에 ‘코젤’이라는 체코 흑맥주를 맛보여 드렸더니 지금은 그것만 찾는다. 나이 드신 분들도 좋은 맥주를 알아본다”며 “하다못해 소주나 막걸리도 각 지역마다 맛이 다른데 맥주는 전국 어디를 가나 카스 아니면 하이트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맥주는 재료를 아끼고 물을 타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도 있다. 직접 집에서 맥주를 만들어 마시는 권중현씨(32)는 “직접 만들다 보니 맥아·효소 등 맥주 원료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며 “한국 맥주는 들어가야 할 재료를 원가 때문인지 아끼는 것 같다. 국산 맥주 업체가 맛보다는 돈벌이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하다”고 말했다.

국내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국산 생맥주의 맛이 싱겁다는 평가도 있다. 해방촌 수제 맥줏집 ‘락스피릿’에서 만난 윤영호씨(28)는 “국산 맥주는 물을 진짜 타는 건지 밍밍하다”며 “생맥주의 경우 라인(필터) 청소를 제대로 안 하면 오래된 맥주가 계속 생맥주 통 안에 남아 있어 맛이 싱거워진다고 들었는데 위생관리가 잘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국산 맥주에 대해 내놓는 평가는 더욱 박하다. 이태원 ‘로비본드’에서 만난 한 30대 캐나다 여성은 “한국 맥주는 솔직히 역겹다(disgusting)”고 평가절하했다. 이태원에서 수제 맥줏집 ‘더 부스’를 운영하는 김희연씨(27)는 “외국인 손님들 가운데 심지어 한국 맥주를 ‘고양이 오줌’이라고 말한 분도 있다”고 전했다.

물론 국산 맥주 업체는 맥주가 맛없다는 평가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국내 맥주 1위인 OB맥주의 오영섭 홍보팀 차장은 “내부 고객 선호도 조사에서 소비자가 카스 같은 가벼운 라거 스타일을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특히 요즘 젊은 층은 콜라나 사이다를 접하면서 자란 세대라 탄산이 강한 국산 맥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런 국산 맥주 업체의 반박에도 이태원 수제 맥줏집의 ‘성지순례’는 끊이지 않고 있다. 기자가 찾은 8월8일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맥파이’의 지하 50석은 오후 6시가 되기도 전에 사람들로 꽉 찼다.

ⓒ 시사저널 이종현
수제 맥주의 인기 비결은 다양성

그렇다고 수제 맥주의 인기 요인을 단순히 국산 맥주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수제 맥주의 무한한 종류다.

“수제 맥주에는 ‘이름’이 없고 ‘스타일’만 있을 뿐이다.” 이태원 경리단 길 ‘맥파이’를 공동 운영하는 에릭 씨의 말은 수제 맥주의 철학을 보여준다. 제품에 브랜드(이름)를 붙인다는 것은 그 브랜드로 제품의 맛이나 형태 등이 똑같아진다는 의미다. 예컨대 서울에서 파는 카스와 제주도에서 팔리는 카스의 맛은 같다. 카스를 만드는 제조사가 ‘카스 맛’을 내는 획일적인 레시피로 대량 생산하기 때문이다. 결국 카스를 만드는 OB맥주와 하이트진로가 96%를 차지하는 국내 시장에서는 ‘노란색의 맥주’가 한국인이 먹을 수 있는 맥주라는 얘기다.

반면 수제 맥주는 각각의 스타일, 즉 방식이 중요하다. 수제 맥주를 만드는 사람들은 수제 맥주를 ‘요리’에 비유한다. 맥아·효모·물·홉은 기본적으로 들어가지만 누가, 언제, 상황에 따라 얼마만큼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맛은 천 가지도 될 수 있다. 또 여름철이냐 겨울철이냐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수제 맥주 종류도 다르다. 수제 맥주는 카스와 하이트 같은 라거 맥주와 달리 고온에서 만들어져서 쉽게 변질되는데 이로 인해 오래 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수제 맥주의 종류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실제로 이태원 경리단 길에 있는 수제 맥줏집은 최소 2개 이상 자체 개발한 맥주를 팔고 있다. 현재 ‘맥파이’에서는 6가지 맥주를 팔고 있다. 맥파이 공동대표 에릭 씨는 “지금은 6가지 맥주를 팔지만 수제 맥주의 양조 일정에 따라 종류가 수시로 바뀐다”며 “최근 새로운 제품 개발자 및 양조 공장과 계약해 맛이 더 다양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메이드인 퐁당’은 4종류, ‘더 부스’는 3종류, ‘로비본드’와 ‘라일리스 탭하우스’는 2종류의 수제 맥주를 선보이고 있다.

수제 맥주가 인기를 끌자 국내 업체들도 수제 맥주 스타일의 신제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하이트는 지난해 9월 ‘퀸즈 에일’을, OB맥주는 지난 4월1일 ‘에일스톤’을 내놓았다. 롯데칠성음료도 최근 카스와 하이트 같은 라거(LAGER) 스타일이지만 맛이 좀 더 진한 ‘클라우드’를 출시했다.

전문가들은 국산 맥주 시장이 한국 스타일의 맥주가 없는 ‘식민지 시장’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국내 1호 술평론가인 허시명씨는 “한국에서 소비되는 술 가운데 55%가 맥주인데 국내 업체들은 우리나라 원료와 제조 방식이 아니라 외국을 따라가는 식이다”며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우리만의 차별화된 맥주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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