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소수자에게 손을 내밀다
  • 허남웅│영화 평론가 ()
  • 승인 2014.08.28 14: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송희일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야간비행>

한국에서 소수자로 산다는 건 다수를 대상으로 한 투쟁에 가깝다. 여기서 ‘투쟁’의 의미는 단순히 싸우는 것을 넘어 존재를 알리고 연대를 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영화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요 몇 년 전부터 성 소수자의 현재를 알리고 현실을 개선하려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 다양하게 개봉되고 있다. 

<야간비행>은 이송희일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다. 데뷔작 <후회하지 않아>(2006년)는 계급 차이로 야기된 엇갈린 사랑을, <탈주>(2009년)는 군대 내 폭력을 견디다 못한 청춘의 탈주를, <백야>는 성 소수자라는 점 때문에 이유 없이 폭행당한 남자와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자 간의 하룻밤 사랑을 다뤘다. 이송희일 감독은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증)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성 소수자의 사랑을 그려왔다. 학교를 배경 삼은 <야간비행>을 통해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건 당연한 절차였던 셈이다.

ⓒ 엣나인필름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교양인을 길러내는 본연의 임무는 제쳐둔 채 성적에 따라 우등한 학생과 열등한 학생을 가려내는 엘리트 양성소로 전락했다. 그런 환경에서 동성을 사랑하는 용주(곽시양)와 해고 노동자를 아버지로 둔 기웅(이재준)과 오타쿠 기질이 있는 기택(최준하)은 낭만적인 학교생활을 영위하기 힘들다.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곧잘 어울리곤 했던 이들인데 지금은 소원한 상태다. 기웅은 말보다 주먹으로 의사 표현을 대신하는 문제아가 됐고, 기택은 ‘펀치 머신’이라는 별명처럼 친구에게 얻어터지기 일쑤며, 용주는 기웅을 향한 사랑을 남몰래 간직할 뿐이다.

“10대에게 희망 메시지 전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어긋난 이들의 우정을 보면서 생뚱맞을지 모르겠지만 홍콩 영화 <첩혈가두>(1990년)가 생각났다. <첩혈가두>는 우정으로 똘똘 뭉친 세 친구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자 이를 피해 베트남에 갔다가 전쟁에 휘말려 순수를 잃게 되는 이야기다. 영화 내내 총알이 빗발치고 포연이 자욱한 <첩혈가두>와 다르게 <야간비행>에는 물리적 폭력이 노골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송희일 감독은 우등생과 낙오자를 철저히 이분화하는 작금의 한국 학교 시스템을 사회로 확장해 남근처럼 하늘로 뻗은 고층 빌딩과 건설 현장의 살풍경 속에서 순수함을 찾으려는 용주와 기웅의 사랑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아우른, 연대의 의미를 갖는다. 영화는 용주와 기웅과 기택의 사연 중간중간 비정규직 노동자의 시위 현장을 노출한다. 성 소수자와 비정규직은 약자라는 점에서 관심을 두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지만 강자 독식이 내면화된 우리 사회에서 이들은 무시당하고 배제되기 일쑤다. 전교 1, 2등을 다투는 용주가 게이라는 소문이 돌자 담임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너 혹시 게이냐? 다 필요 없고 서울대만 가.” 이는 마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제주 강정마을과 밀양 주민들, 용산 참사 피해자, 납북자 가족, 장애인, 세월호 유족 등 권력과 자본의 힘에 탄압받고 피해 입은 약자의 관심을 호소할라치면 민생고 해결이 우선이라는 논리로 모든 현안을 무력화하는 사회 지도층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이송희일 감독은 “학교는 그 사회의 얼굴이다. 입시 경쟁만을 추구하는 한국은 학교 폭력의 천국이다. 공부 외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낙오자와 왕따가 도처에서 발생한다. 그들을 이렇게 만드는 데는 기성세대가 한몫하고 있다. 사회에 강력한 일침을 던짐과 동시에 10대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말했다. 연대라는 희망의 메시지. 가정사 때문에 좀체 마음을 열지 않는 기웅을 향해 용주는 이렇게 말한다. “친구가 없으면 이 세상은 끝이잖아.” 이에 화답하듯, 기웅은 용주를 괴롭히는 학교 폭력에 맞섬으로써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용주에게 마음을 엶으로써 연대의 손을 잡는다.

영화 ⓒ 엣나인필름
짧지만 파란만장한 한국 퀴어 영화 역사

<야간비행>은 성 소수자의 불합리한 현실을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로 풀어나가면서 어둡고 신파적인 분위기를 띤다. 하지만 성 소수자를 다룬 영화가 모두 이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를 제작했던 김조광수는 현재 감독으로도 활동 중인데 그가 연출한 작품은 성 소수자를 향한 사회적 편견의 얼음장을 좀 더 밝고 코믹한 방식으로 녹이려 한다. 사실 김조광수 감독은 <후회하지 않아>의 언론시사회 당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부터 영화를 통한 성 소수자의 환경 개선에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 활동 덕에 지금은 성 소수자를 다룬 영화도 많아지고 다양해지면서 우리 사회에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퀴어 영화’로도 불리는 성 소수자 관련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의 시작은 <내일로 흐르는 강>(1996년)으로 보는 편이다. 이 영화는 커밍아웃한 중년의 아들 때문에 혼란을 겪는, 지극히 한국적인 가정을 조망한다. 성 소수자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하고 서로의 주먹에 입을 대고 키스하는 방식으로 당시의 검열을 피해갔다. 그렇더라도 경직된 사회 분위기상 <내일로 흐르는 강>은 동성애 논란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말하자면, 성 소수자를 다룬 한국 영화의 역사는 곧 논쟁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1997년 한국에서 처음 개최될 예정이었던 ‘퀴어영화제’가 당국의 압력으로 무산됐고 한국 영화는 아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제목으로 심의를 받았던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는 동성애를 다뤘다고 해서 상영 불가 판정을 받았다(왕가위 감독이 직접 문제 장면을 편집한 후에 국내 개봉이 이뤄졌다). 이후 한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애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인의 삼각관계를 그린 <로드무비>(2002년) 같은 영화가 개봉됐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퀴어 영화가 본격적으로 관객들에게 호감을 사기 시작한 건 <후회하지 않아> 때부터다. 비주류 영화로는 드물게 당시 5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후회하지 않아>는 ‘동인녀’라 불리는 누나 관객의 열렬한 호응을 얻으며 새로운 소비 계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동성애 자체보다 그 주체인 미소녀에 열광하는 팬덤 문화는 성 소수자를 다룬 영화가 한국 관객과 무리 없이 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김조광수 감독은 <친구 사이?>(2009년),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2012년), <원 나잇 온리>(2014년) 등 장·단편을 오가며 작품을 발표했고 소준문 감독은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2011년)을 선보이며 퀴어 영화의 다양성에 일조했다.

다양한 성 소수자 관련 영화의 출현으로 성 소수자를 향한 사회의 시선은 부드러워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편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성 소수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투자를 꺼리고 출연을 망설이는 이도 많고 간신히 제작돼도 개봉관을 잡는 게 녹록지 않은 게 작금의 퀴어 영화가 처한 현실이다. <야간비행>이라는 제목은 햇빛이 완전히 찾아오지 않은 밤의 세계에서 비밀을 속삭인다는 의미로 지었다. 그에 비유해, 주류 영화가 극장을 완전히 장악한 현재 퀴어 영화와 같은 작은 영화는 아는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는 문화로 저공 ‘비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