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 경제인 / 이재용, ‘경제권력 지도’ 새로 그리다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4.09.0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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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있는 경제인’ 4위 급부상 이건희·최경환·정몽구, 1~3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신경영’을 선포한 지 올해로 21년이 지났다. 이 회장은 불량 제품을 ‘암 덩어리’에 비유했다. 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하면 해당 생산 라인을 즉시 중단시켰다. 시중에 깔려 있던 무선전화기 15만대를 수거해 화형식을 가졌다. 이 회장의 ‘신경영’은 삼성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선진국에서  3류 취급을 받던 삼성 제품들이 세계 1등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소니·히타치 등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삼성 제품이 정상에 올랐다.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1993년 29조원에서 2013년 390조원으로 14배 가까이 증가했다. 순이익은 같은 기간 8000억원에서 40조원으로 50배나 늘어났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신경영 선포 2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했다. 삼성이노베이션포럼과 국제학술대회 등을 열어 신경영 성과를 외부에 알렸다. 올해는 사내 방송을 통해 신경영의 의미를 되새기는 선에서 조용히 21주년을 보냈다. 특별한 행사도 없었다. 이 회장이 병중이라는 점이 반영됐다. 이 회장은  5월10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현재 삼성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입원한 지 100일이 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의료원은 8월27일 “이 회장이 눈을 마주치고 손과 발 등을 움직일 정도로 건강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회장의 건강이 언제쯤 회복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재용 ⓒ 시사저널 임준선,  최경환 ⓒ 시사저널 구윤성
재벌 총수 밀쳐내고 경제 관료 대약진

그러는 사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삼성전자는 8월 들어 두 건의 대형 M&A(인수·합병)를 성사시켰다. 8월15일 미국의 사물인터넷 기술 업체인 스마트싱스(SmartThings)를 약 2억 달러(2029억원)에 인수했다. 8월19일에는 북미 가전제품 유통업체인 콰이어트사이드(Quietside)도 사들였다. 이 부회장이 두 건의 M&A를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사정에 정통한 재계 인사는 “사물인터넷 분야는 이 부회장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이라며 “업계 1위 업체인 미국 시스코의 존 체임버스 회장과 최근 만나 사업 협력을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대외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 7월 삼성전자 전시관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안내했다. 건강한 상태였다면 이 회장이 직접 나서야 하는 비중 있는 자리였다. 8월17일에는 중국 난징에서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과 만나 올림픽 후원 계약 연장에 합의했다.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경영 수업을 받던 것과 다른 모습이다. 삼성의 현안까지 이 부회장이 직접 챙기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와 애플이 최근 미국 이외 지역에서의 특허 소송을 전격 철회한 데도 이 부회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그룹의 3세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임준선
시사저널이 해마다 실시하는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문가 설문조사에도 이런 활동이 반영됐다. 이건희 회장은 올해도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인(경제 관료 포함)’ 1위에 올랐다. 각 분야 전문가 1000명 중에서 758명(복수 응답 포함)이 이 회장을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인으로 꼽았다. 1993년부터 22년째 1위 자리를 유지한 것이다.

하지만 영향력은 예년만 못했다. 이 회장의 지목률은 매년 상승세를 보여왔다. 지난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지목률이 90%를 넘어섰다. 2위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의 격차는 60%포인트에 달했다. ‘이건희=경제 대통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올해 지목률은 75.8%로 지난해에 비해 16%나 하락했다. 대신 이재용 부회장이 올해 처음으로 10위권에 진입했다. 이 부회장은 11.5%로 최경환 경제부총리(39.8%)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28%)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재계 3세 중에서는 이 부회장이 유일했다. 전문가들조차 삼성이 이재용 체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다. 

올해 조사에서는 경제 관료들의 약진도 눈에 띄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2위)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5위), 신제윤 금융위원장(11위), 최수현 금융감독원장(13위), 안종범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14위) 등이 상위권에 대거 이름을 올렸다. 그동안 조사에서 재계 총수들이 상위권을 독차지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초이노믹스’로 통하는 최 부총리의 경우 지목률이 39.8%에 달했다. 최 부총리는 최근 실물 경제를 살리기 위해 연말까지 40조원의 돈을 풀겠다고 밝혔다. 주식시장이 먼저 반응했다. 코스피 지수는 2050~2100선을 오가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부동산 시장도 꿈틀거리고 있다. 여름철 비수기임에도 주택 거래가 급증했다. 7월 전국의 주택 매매는 7만700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서울 강남 3구의 거래량은 204.6%나 폭증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 ⓒ 시사저널 이종현
허창수·구본무·최태원 회장 7~9위

물론 ‘최경환 효과’로 시장의 우려가 모두 해소되지는 않았다. 외국인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사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 ‘팔자세’로 돌아설지 알 수 없는 상태다. 부동산 매매 또한 현재까지는 강남 3구의 고가 아파트에 몰려 있다. 두 달 만에 초이노믹스의 효과를 평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분명한 사실은 최 부총리의 의지에 따라 일부지만 시장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순위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경제 관료의 약진으로 올해 재계 총수들의 순위가 밀렸다. 매년 조사 때마다 2위를 지켰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올해 3위(28%)로 떨어졌다. 지난해 4위였던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8위(2.5%), 지난해 5위였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9위(1.5%)로 밀려났다. 전경련 회장인 허창수 GS그룹 회장만 지난해 8위에서 올해 7위(2.6%)로 지목률이 상승했다.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몽준 전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6위(5.1%)를 유지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각각 9위(1.5%), 12위(1.0%), 15위(0.8%)를 차지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삼성그룹 사옥. ⓒ 시사저널 포토
대한민국 전문가 집단은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으로 삼성그룹을 꼽았다. 1000명의 응답자 중 986명(98.6%)이 삼성그룹을 지목했다.

삼성그룹의 주력 회사인 삼성전자의 실적은 최근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2분기 영업이익은 7조1900억원으로 전 분기 대비 5.33%나 감소했다. 삼성전자 주가는 연중 최저가 기록을 계속 갈아치우고 있다. 최근 3개월 사이 삼성전자 주가는 143만3000원에서 124만2000원으로 13.3%나 하락했다. 3분기 실적은 더 나빠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을 담당하는 IT·모바일(IM)사업부는 올 1분기보다 영업이익이 31%나 떨어졌다. IM사업부는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IM사업부의 실적 악화는 삼성전자의 추락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우려가 더 크다. 시장조사 업체 IDC에 따르면 올 2분기 삼성전자의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25%로 지난해 같은 기간(32%)에 비해 7%포인트나 감소했다. 중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도 현지 업체 샤오미(小米)에 내줬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8월19일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이 예상보다 크게 부진해 영업이익률이 10% 이하로 하락하는 경우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 경제에서 삼성그룹이 차지하는 위상은 여전하다. 지난해 삼성그룹의 매출은 390조원을 기록했다. 삼성그룹이 지난해 낸 법인세는 15조1000억원으로 우리나라 전체 법인세(43조9000억원)의 34.4%를 차지한다. 삼성의 수출액 또한 1572억 달러(159조4480억원)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6171억 달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취업 시장에서도 삼성의 영향력은 컸다. 한 해 동안 채용 증가 인원 1만7669명 중 삼성그룹에 속해 있는 전자·물산·전기 등 주요 3개 계열사의 비중이 36.7%(6448명)를 차지했다. 삼성그룹 상장사의 시가총액 비중은 한국 증시 전체에서 약 30%에 달한다.

삼성그룹에 이어 영향력 있는 그룹 2위는 현대차그룹이 차지했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의 자산과 매출은 각각 174조원과 150조4000억원을 기록했다. 덕분에 1000명의 응답자 중 751명(75.1%)이 현대차그룹을 지목했다. 다음은 LG그룹, SK그룹, 포스코, 현대중공업그룹 순이었다. 하지만 삼성그룹이나 현대차그룹과의 격차는 컸다. 벤처기업 중에서는 네이버와 다음카카오가 각각 7위와 11위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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