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되면 과거는 털고 ‘졸병’이 돼야 해”
  • 이규대 기자·손가영 인턴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09.1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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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의 신(新)인류 도시 노인 20명 심층 인터뷰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평균수명이 100세에 육박하는 신(新)인류를 뜻한다. 2009년 유엔이 발표한 ‘세계 인구 고령화’ 보고서에 등장하며 화제를 모은 용어다. 의학의 발달, 삶의 질 개선 등으로 인간이 장수(長壽)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호모 헌드레드 대다수는 도시에서 산다. 2012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도시화율은 80%대를 넘어 90%에 육박하고 있다. 귀농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도시에서 살다 도시에서 죽는 것이 보편적인 라이프스타일로 굳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실버 세대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보고 자란 전통사회 노인의 모습이 ‘참고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그 어떤 세대도 경험하지 못했던 미증유의 환경 속에서 새로운 노년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탄생한 베이비붐 세대, 근면한 노동으로 조국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었던 이들 세대는 나이가 들어서도 고단하다.

9월11일 한 노인이 서울 동자동 골목을 걷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통계 보고서의 숫자가 전해주지 못하는 우리 시대 노년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취재진은 서울에서 노인과 접촉할 수 있는 대표적 장소를 선정해 각 공간에서 만난 노인 20여 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실시했다. 노인문화의 중심지인 종로3가 일대, 지하철 전동차 경로석, 실버 노동 현장, 아파트 노인정 및 노인복지센터, 서울역 인근 영세 쪽방촌 등에서 만난 노인들에게 그들의 일상에 대해 물었다. 각 인터뷰는 짧게는 20분, 길게는 1시간 넘게 진행됐다. 서로 처한 조건과 환경이 다른 노인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도시 노인으로서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절대 자식에게 짐이 돼선 안 돼” 강박관념

도시인은 외롭다. 쪼개지고 쪼개져 원자화된 ‘개인’으로 산다. 도시 노인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외롭다. 전통사회에서처럼 마을 공동체나 대가족이 그들의 노후를 보살피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핵가족이 기본 단위인 도시에서, 노인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다른 ‘핵가족’을 구성해 독립해버리는 자녀들과의 관계는 과거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 자녀를 기르고 가정을 보살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쓸쓸한 상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이 들면 남는 건 아내밖에 없더라. 아들이 둘 있지만 연락도 뜸하고 자기들 살기에 바쁘다.”(설완종씨·65), “애들하고 지지고 볶고 살 때가 제일 좋았던 거야. 나이 먹으면 하나씩 다 떨어져 나간다고. 시집·장가가면서 곁을 다 떠났어. 이렇게 늙어서 돌아보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어. 삶이 뭔가 싶은 거지. 나이 먹어보니 그런 게 참 처연하다.”(정행승씨·81)

자녀와 함께 살거나 경제적 부양을 받고 있는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특정 공동체의 ‘어르신’, 누군가의 ‘부모’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늙은 개인’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다. 시사저널 취재진이 만난 상당수의 노인은 그들이 사회에서 취해야 할 포지션이 자신이 보고 자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옛날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노인의 삶은 정말 많이 다르다. 예전에는 아파도 견디고,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참아가며 자녀들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남겨주려 하지 않았나. 지금은 아니다. 주변을 보면 나 자신이 먼저 건강하고 행복한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가 죽을 때까지 스스로 잘 살아야 자식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최춘염씨·여·68), “절대 자식들에게 짐이 돼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을 정도다. 요즘은 수명이 길어서 80~90세까지 산다는데,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자녀들한테 기대야 하지 않겠나. 지금부터 기대기 시작하면 아이들에게 내가 얼마나 원수 같겠나.”(진윤자씨·여·66)

늙고 나서야 알게 됐다. 젊은 시절 자신의 손으로 일으켜 세운 이 도시가 늙은 자신에게 결코 상냥하지 않다는 사실을. 길게는 10~20년 이상 지속될 여생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상시적으로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요즘 노인들에게는 4고(苦)가 있다. 경제적 고통, 건강으로부터 오는 고통,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 무료함으로 인한 고통이다.” 한 인터뷰 대상자가 도시 노인들이 마주하게 되는 상황을 압축해서 설명했다. 생계 대책, 건강관리, 인간관계, 활동(노동 및 여가) 등이 노후의 행복 여부를 판가름하는 핵심 요소라는 뜻이다.

‘제2의 인생’을 비교적 순탄하게 열어젖힌 이부터 만나보자. 김선태씨(71)는 2006년 초등학교 교장 직에서 은퇴한 이후 문화재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을 거쳐 지금은 경복궁에서 일한다. 김씨는 퇴직하기 3년 전부터 은퇴 이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달 330만원씩 교직원 연금을 받는 김씨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철저히 고민하고 준비한 덕에 자신의 사회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전문 영역을 찾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김씨처럼 은퇴 이전에 노후의 삶을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9월11일 서울 낙원동의 한 이발소. 20년째 요금을 올리지않고 노인들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대학 동기라는 인연으로 함께 다니니 좋다”

“1950~60년대에는 중학교도 가지 못했던 사람이 70~80%는 될 것이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열심히 일하며 ‘몸뚱이’ 하나로 살아온 노인이 많다. 나름대로 배웠다는 사람도 별로 갈 곳이 없는 마당에 그 사람들은 오죽하겠나.” 다수의 실버 세대에게 김씨처럼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씨는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고 사회 경력도 차별화되는 축에 속한다. 하지만 이런 배경은 노후의 삶을 개척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일하는 노인들끼리는 군대 갔을 때랑 똑같다는 얘기를 한다. 사회에서 했던 것은 잊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격증이 100개 있어도 내가 하고자 하는 직종과 관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기업이든 어디든 과거에 잘나갔단 얘기는 이력서에 안 적는 것이 더 좋다. 노인이 되어 일하려면 지난 과거는 털고 ‘졸병’이 돼야 한다.”

도시 노인들에게는 인간관계 역시 주체적으로 개척해야 할 대상이다. 의지를 갖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집 안에 고립되기 때문이다. 도시 노인들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뒷방 노인’으로 주저앉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더 외로움을 타고 인간관계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진다. “젊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나이 드니 마음에 공허함이 항상 밀려와. 자식들이 조금만 뭐라 해도 마음에 상처가 되고. 그러니까 늙으면 외로운 거야. 나이 들어봐야 알아. 우리도 젊었을 땐 몰랐어.” 서울 반포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오정자씨(여·66)의 말이다. 그에게 도시에서 늙는다는 것은 “인간은 다 외롭고 쓸쓸하고 결국 다 혼자”임을 깨닫는 일이었다. “지난번엔 어떤 할아버지가 옆에 오더니 ‘여기 앉아도 되느냐’고 묻더라. 여든 살 잡수셨는데 혼자 산 지 8년 됐다고. 아주 정정하셔. 그렇게 괜히 말 붙이는 거다. 외로우니까. 그분은 주변 문화센터 다니면서 다른 할머니들하고도 많이 만나고 그러는 것 같았다.”

도시 노인들이 인간관계를 맺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직장 동료나 학창 시절 친구 등과의 친목회·동창회를 활용하는 경우, 아파트 노인정이나 교회·성당 등 거주지 주변에서 새로운 이웃을 만나는 경우, 서울 종로 일대와 같은 실버문화 중심지를 찾는 경우 등이다.

최춘염씨(여·68)는 매주 월요일 대학 동기들과 만난다. 편한 등산복 차림으로 만나 몸을 움직이며 친교를 쌓는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산, 걷기 코스 등을 찾는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 신체적·정신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에 무료 탑승이 가능한 전철을 이용한다. 취재진과 만난 9월2일에는 경춘선을 이용해 춘천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들 직장에 있을 때는 안 만나다 퇴직하고 시간이 나니 이렇게 만나게 되더라. 사실 친목회 안에 대학 시절 절친했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대학 동기라는 인연 때문인지 함께 다니니 참 편하고 좋더라.” 최씨는 젊은 시절부터의 지인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찻집을 찾아 시간을 보내는 일도 즐긴다. 그림 감상을 좋아해 전시장을 찾기도 하는 등 노후의 여가를 잘 활용하는 축에 속한다.

최씨의 경우와 달리 과거의 인연이 껄끄러운 노인들도 상당수다. 친목회나 동창회에 나가려면 상당 액수의 회비가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노인들에게는 부담스럽다. 이른바 ‘성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옛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일을 꺼리게 만들기도 한다. “나와 여건이 비슷하거나 못한 수준이면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나보다 낫다 싶으면 잘 안 보게 된다. 내가 찾아가면 마치 자신에게 기대려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가질까 봐서다. 상대가 그런 생각을 안 하더라도 내가 그런 자격지심을 갖는다.”(김차균씨·67) 특히 남성 노인들의 경우 중·장년에 개인 사업을 하다 실패하면서 주변 친구들과 연락이 모두 끊기게 됐다는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이들에게 서울 종로 일대는 매력적인 놀이터이자 사교의 장이다. 영화관·식당·술집·다방·이발소 등에서 노인에게 특화된 저렴한 가격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 요소다. 이곳을 찾는 노인들은 왜 이곳에 왔는지, 방문 목적을 서로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서로가 같은 처지임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탑골공원 뒤편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주변 노인들과 시간을 보내던 홍 아무개씨(73)는 “사는 재미랄까, 그런 게 없다. 인생의 목표가 있고 그걸 성취하는 게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는데. 그러니 지금은 사람 목숨이 아니다. 그냥 시간만 보내는 것이다. 그나마 여기 나와서 이렇게 얘기하는 게 살아가는 유일한 낙”이라고 말했다.

많은 노인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전철을 타고 여가 활동을 즐긴다. ⓒ 시사저널 구윤성
상당수 노인들 “내 노후는 불행하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의 노인은 불안하다. 미리 고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4고’의 늪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도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잿빛 도시 속에서, 노인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을 직접 기획하고 설계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취재진이 만난 노인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노후에 대해 “불행하다”고 말했다. “그냥 죽지 못해 산다. 칠십 넘어가면 돈 없는 사람 대다수는 아마 나처럼 죽지 못해 살 것이다.”(오경운씨·78), “젊었을 땐 좋았지. 여유 있게 살진 못했지만 그때는 암만 해도 좋았어. 그 이후론 사는 게 서글프기만 했어. 사는 게 참 외로워. 죽고 싶어 죽겠어.”(정동순씨·여·80), “과거에 좀 더 잘할걸 하는 생각에 후회감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해봐야 무슨 소용 있나. 그냥 사는 거다. 스스로 지금 삶에 만족한다고 생각하며 그냥 사는 거야.”(홍 아무개씨)

젊었을 때만 해도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개념이 희박했기에 이렇다 할 대책 없이 늙음을 맞이하게 된 노인이 많다. 지금 노인 세대들에게서 지난 삶에 대한 후회와 체념의 정서가 짙게 나타나는 이유다. 돈, 인간관계, 건강, 그리고 노동·여가. 지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당신은 평생 이 ‘네 마리 토끼’를 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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