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사는 것에 죄의식 갖지 말라
  • 한혜경│호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 승인 2014.09.1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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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은퇴자들이 인생 후배들에게 건네는 조언들

필자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2001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1000명에 달하는 은퇴자를 조사한 바 있다. 2010년에는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 300여 명에 대한 심층 면접 연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한때 경험했고, 혹은 아직도 겪고 있는 ‘은퇴 순간의 진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은퇴자들이 가장 많이 떠올렸던 단어는 다름 아닌 ‘후회’였다.

필자가 만났던 은퇴자의 90% 이상이 남성이었다. 이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겉으로는 그리도 잘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남성들이 은퇴를 맞으며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약한 존재로 전락해버린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어깨가 축 늘어진 은퇴 남성들을 보면서 일종의 부채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중년 남성으로,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와 고통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은퇴 남성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난날에 대한 회한은 다양한 형태로 밀려온다. 한 은퇴 남성은 우연히 마주친 옛 부하 직원이 모른 척하며 자신을 지나치는 모습을 보고 나서 “현역에 있는 동안 동료와 후배들에게 좀 더 친절했어야 했는데”라고 반성했다고 털어놓았다. 후배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까칠하고 예민한 독설을 일삼았던 과거를 돌아보며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걸 그랬다”며 후회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 은퇴 남성들이 가장 후회하는 점은 바로 ‘너무 일밖에 모르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월급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모른 척하며 살아왔다. 직장을 놀이터로, 직장 동료를 놀이 친구로 여기며 살아야 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한창 때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생각해볼 수 있는 나만의 시간과 휴가를 가졌더라면’ ‘나한테 맞는 맞춤형 놀이 세 개쯤 미리 준비했더라면’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는 사치를 누렸더라면’ 등 후회의 말을 쏟아냈다.

은퇴자들은 자신을 함부로 대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처럼 대했던 것, 자신의 몸을 혹사했던 것, 돈을 벌지 못하면 더 이상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인 것처럼 생각해왔던 일을 후회했다. ‘잃어버린 나’에 대한 설움이 뒤늦게 북받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는데” “내 몸을 좀 더 소중히 다뤘어야 했는데” “대박만을 성급하게 좇으며 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만의 멋과 매력도 키우며 살았더라면”이라고 말이다. 가족들이 일터와 학교로 나간 후 홀로 식사를 챙길 때마다 울컥한다는 한 은퇴자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기술을 진작 익혀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렵고 고독하다는 것이다. “항상 만날 수 있고 힘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친구 세 명쯤 만들어뒀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은퇴자도 있었다.

고통스러운 진심들을 마주하면서, 필자는 우리나라 70대 남성 노인들의 자살률이 왜 그렇게 높은지(OECD 국가 중 1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처럼 여기며 살아온 남자들일수록 자기 내면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들이 싫어할까 봐, 혹은 가정에 불이익을 줄까 봐 타인의 주파수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왔다. 그래서 은퇴 이후 인생의 크고 작은 어려움, 패배, 좌절 앞에서 그토록 쉽게 무너지고 스스로를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은퇴’라는 단어를 들으면 당장 ‘돈’부터 떠올린다. 그래서 항간에는 은퇴 후부터 죽을 때까지 수십억 원이 필요하다는 식의 재무적 관점에만 치우친 논의가 넘쳐난다. 은퇴자들의 후회도 대부분 돈과 관련된 것이려니 짐작해버린다. 하지만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돈이 전부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돈 때문에,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바로 은퇴자들의 뼈아픈 후회 목록이라고. 은퇴한 바로 다음 날,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돈 자체가 아니다. 바로 ‘오늘 하루를 어떻게 행복하게 보낼 것인가’의 문제다.

바리스타 정규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한 노인들이 커피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나’를 사랑해야 노후도 행복하다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 특히 30~40대 젊은 직장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이 살게 될 100세 시대의 은퇴는 ‘인생 70~80세 시대’를 염두에 두고 살아왔던 베이비붐 세대와는 달라야 한다. 은퇴하고 나서 여행 한두 번 다녀오고 나면 잠깐 앓다 죽던, 그런 시대는 이미 끝났다. 인생을 더 길게 봐야 한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중요하고, 매달 통장에 입금되는 월급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보다 길어진 인생을 멀리 내다보고 꼼꼼히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적은 돈이라도 오래 벌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에서 준(準)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고, ‘행복의 포트폴리오’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놀이와 취미 활동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꿈이 담긴 명함도 몇 개쯤 만들어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요즘 유행하는 ‘스칸디 대디’(북유럽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처럼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녀와 친밀하게 지내는 아버지를 일컫는 신조어)로 사는 것도 좋겠지만, 자신에 대한 투자가 우선이다. 가족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에서 벗어나라. ‘1인 가구’로 산다고 해도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한다.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독립적이어야 한다.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것에 죄의식을 갖지 말라.

100세 시대에 마흔이란 ‘불혹(不惑)’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다. 오히려 마흔은 창조성과 열정, 꿈을 필요로 하는 나이다. 감수성과 도전의식도 필요하다. 무리하게 성공하려, 조급하게 ‘대박’을 거두려 서두르지 말라. 너무 일찍 인생의 정점을 찍고 조로(早老)한 중년으로 오래 사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당신 세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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