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릇하게 내질러놓고 속으론 ‘키득키득’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4.09.2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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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연애’ 발언으로 막말 논란…공수 바뀌었을 뿐 여야 모두 가해자

박정희 대통령(5~9대)의 유신 시절, 대통령에 대한 가장 큰 막말은 ‘박통’이었다. ‘박통’은 불경(不敬)과 동일시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여섯 자를 두 자로 줄인 것에 불과한 단어지만, 1970년대에는 달랐다. 혹여 화를 당할세라 야당 의원들도 사석에서나 입에 담았을 뿐 공석에서는 삼갔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기세등등하던 대학생들까지 ‘박통’을 얘기할 때는 버릇처럼 주위를 한 번 살피곤 했다. 

10대 최규하 대통령의 별명은 ‘최주사’였다. 권위를 인정받지 못해 6급 공무원인 ‘주사’로 불렸지만 그나마 뒷자리에서 통용됐다. 철권을 휘두르던 11·12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대머리’가 금기어가 됐다.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어떤 묘사도 금지됐다. 그래서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는 제스처가 최고권력자에 대한 불만과 비난의 수단이었다. 긴 턱의 영부인을 희화하는 ‘턱 쓸어내리기’도 저항의 징표였다.

국회 정상화를 위해 지난 9월12일 열린 국회 의장단과 상임위원장단 연석회의. 새정치민주연합 설훈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의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 관련 막말로 정국이 시끄러워졌다. ⓒ 시사저널 이종현
익명 보장되는 SNS에서 막말 보편화

대통령에 대한 별칭이 ‘해금(解禁)’된 것은 13대 노태우 대통령 때다. ‘물통’ 또는 ‘물태우’라는 별칭이 스스럼없이 일반인의 입에 올랐다. 권위적이었던 전임 대통령들과의 차별화를 추구하며 보통사람의 시대를 강조한 것 못지않게 ‘양김’의 거센 도전으로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과 언론 자유화가 결정적이었다. 이후 김영삼(YS) 대통령이나 김대중(DJ) 대통령을 호칭할 때 ‘영삼이’ ‘대중이’ 정도로 낮춰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DJ의 걸음걸이를 희화한 호칭도 없지 않았으나 타인의 신체적 약점을 들추는 말에는 반대자들마저 눈살을 찌푸릴 만큼 금도가 엄연했다. 대통령을 욕하고 비판하더라도 듣는 제3자까지 민망스럽게 만드는 표현은 삼가는 게 보이지 않는 원칙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 정국을 뒤틀리게 만든 새정치민주연합 설훈 의원의 ‘박근혜 대통령 연애’ 발언으로 다시 대통령을 향한 정치권의 막말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설 의원은 지난 9월12일 국회 정상화를 위한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단 간 연석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세월호 사고가 난 날) 청와대에서 7시간 동안 뭐 했느냐. 대통령이 연애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며 “문제는 그게 아니라면 더 심각한 데 있다”고 발언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얼핏 ‘연애’를 부정하는 듯하면서도 묘한 뉘앙스로 여성 대통령을 욕되게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통령을 겨냥한 근자의 막말 파동 효시는 ‘공업용 미싱’ 사건이다. 1998년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의  김홍신 의원은 정당 연설회에서 “살아생전 거짓말을 많이 하고 나쁜 짓 많이 하면 죽어서 염라대왕이 잘못한 것만큼 바늘로 한 땀 한 땀 뜬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거짓말 많이 하고 너무 많은 사람을 속였기에 바늘로 뜰 시간도 없이 공업용 미싱으로 드륵드륵 박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시중의 우스개를 전제하며 인용했지만 격분한 정부·여당은 징계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하는 등 정국이 시끄러웠다. 여론이 들끓자 한나라당 대변인이 “국가원수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했다”며 유감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검찰은 김 의원을 모욕죄로 기소했고 대법원은 벌금 100만원의 원심을 확정했다.

한나라당은 DJ 후임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온갖 비아냥거림을 이어갔다. ‘놈현’은 일상 호칭이 됐고 노 대통령의 외모에서 따온 ‘개구리’ ‘깍두기’ 정도는 공공연했다. 가뜩이나 개혁을 추진했던 노 대통령에 대한 미움을 덧댄 증오와 질시의 소재는 널려 있었다. 이에 질세라 노 대통령을 지지하는 ‘노사모’ 등은 인터넷에서의 강점을 활용해 비어와 속어를 개발·동원하며 이에 맞불을 놓았다. 공중화장실 낙서만도 못한 욕설이 뉴미디어가 전하는 여론이라는 명패를 달고 횡행하는 딱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정치권을 포함한 온 사회가 양분돼 죽기 아니면 살기 식 패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익명이 보장되는 SNS상에선 ‘년’ ‘새끼’는 보통이고 남녀의 성기를 가리키는 비속어들이 보편화됐다. 진보 진영의 누리꾼들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의 앙갚음이라도 하듯 이명박 전 대통령은 ‘쥐박이’ ‘땅박이’로,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년’자를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막말은 단순 호칭에 그치지 않는다. 내용도 다양해졌다. “76살 먹은 김대중 대통령이 ‘사정’ ‘사정’하다가 내년에 변고가 생길지…”(이규택 당시 한나라당 의원),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를 죽인 노가리. 불알 값 못해~거시기 달 자격 없어”(한나라당 의원들의 ‘환생 경제’ 연극)에서 “이명박 정권을 죽여버려야 하지 않겠나”(천정배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 등으로 공수가 바뀌었을 뿐이다.

2012년 총선 당시 서울 노원구에서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했던 김용민씨. 그의 막말들이 부메랑이 돼 본인의 낙선은 물론 당 전체의 득표에 차질을 빚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막말 당사자, 지지층 내에선 영웅 대접

이번에 정국을 얼어붙게 만든 ‘대통령 연애’ 발언 이전에도 아슬아슬한 막말은 있었다. 민주당(새정치연합의 전신) 홍익표 의원은 박 대통령을 겨냥해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는 뜻의 ‘귀태(鬼胎)’란 말로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결국 본인과 당의 공식 사과로 이어졌다. 2012년에는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에게 ‘그년’이라고 표현해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다. 이 의원은 ‘그녀는’의 축약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오타(誤打)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새해 소원이 ‘명박 급사’라고 했던 김광진 새정치연합 의원의 사례도 있었다.

막말이 결국 역풍을 초래해 발언자 스스로를 망치고 소속 정당까지 멍들게 한다는 사실은 2012년 총선 때 서울 노원 갑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김용민씨의 경우가 웅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지양될 것 같고, 그래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이는 막말 당사자가 사회 전체로는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지지층 내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는 풍토에서 비롯한다.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그러하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유권자 그룹과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은 이를 조장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현재는 새누리당이 집권하고 있어 막말의 ‘피해자’처럼 비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과 개구리가 닮은 점’ ‘뇌에 문제가 있어서…’ ‘그 놈의 대통령 때문에 참 X 팔린다’ 등등 낯 뜨거운 막말 사례는 누가 누구를 탓할 처지가 못 됨을 방증한다. 대통령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게 마땅하지만 막말까지 용인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상대의 감정 밑바닥까지 촉발해 정치를 더더욱 살벌한 전쟁으로 몰아간다는 측면에서 막말의 폐해는 심각하다. 여야, 보수·진보를 가릴 것 없이, 뜻있는 국민이 한목소리로 막말 퇴출을 부르짖고 나서야 할 것이라는 문제의식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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