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궤도에 영혼 싣고 떠나다
  • 김영대│대중음악 평론가 ()
  • 승인 2014.11.04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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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앞서갔던 ‘마왕’ 신해철…1990년대 이후 가장 탁월한 뮤지션

1989년 크리스마스 이브. 대학 연합팀 ‘무한궤도’는 MBC 대학가요제의 맨 마지막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결과를 예측한 것처럼 별도의 무대가 제공됐다. 초대 가수의 축하 공연을 방불케 하는 자신만만한 매너로 그들은 무대를 장악했다. 아마추어 대회라는 성격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프로그레시브록 스타일 키보드 반주가 무려 1분여를 지속하는 것도 기이했지만, 스타일을 쉴 새 없이 옮겨가며 진행되는 과감한 전개, 허를 찌르는 서정적인 마무리로 환호를 유도하는 쇼맨십까지. 이 공연을 지켜보던 신세대들은 단순히 한 팀의 등장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흐름의 약동을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고, 그렇게 1980년대의 마지막을 수놓은 이 팀의 리더 신해철은 곧바로 1990년대의 새로운 기수가 됐다.

신해철. 그의 삶과 음악을 돌아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앞서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 느낌은 <그대에게>를 처음 들었던 바로 그날부터 아카펠라로 수백 트랙의 목소리를 더빙한 근작 <A.D.D.a>에 이르기까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진정 남들보다 ‘앞서갔다’는 느낌을 줬던 뮤지션은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뮤지션만을 꼽자면 신해철은 그 첫머리에 거론해도 좋을 것이다.

2004년 3월20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에서 노래한 신해철. ⓒ 시사저널 이종현
셀프-프로듀싱 완벽하게 정착시켜

그는 탁월한 음악적 감각과 배짱을 무기로 셀프-프로듀싱의 개념을 완벽하게 정착시킨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작곡가, 제작자, 심지어 매니저의 입김으로 기획과 제작이 이뤄지던 당시 주류 가요계의 관행에서 탈피해 스스로 모든 음악을 기획하고 연주하는 신해철의 등장은 그 자체로 새로운 세대였다. 무한궤도의 동료로 한 시대를 같이 수놓은 정석원(015B), 그의 대학가요제 후배이며 그의 프로듀싱 아래 새롭게 음악을 배운 또 한 명의 빼어난 뮤지션 김동률(전람회) 등이 함께 몸담았던, 웰메이드 가요의 산실 대영AV의 득세는 신해철이 제시한 뮤지션 위주의 창작 집단이라는 개념 아래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음악의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켜 갖고 있던 음악적 개념을 최종 창작물에 고스란히 옮겨냈다. 이 새로운 흐름의 맨 앞에 신해철이 있었다. 1992년 가을, 당대의 뮤지션이 모인 슈퍼그룹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에서 선후배를 이끌고 테마곡 <더 늦기 전에>를 총지휘한 것은 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순간이라 부를 만했다.

그는 최신의 흐름에 누구보다 밝았던 트렌드 세터였다. 시퀀서와 드럼머신, 신시사이저 등을 적극 활용해 격정적인 멜로디 작업 그 자체보다 사운드와 편곡이 핵심인 작법을 지속적으로 실험해나간 것은 가장 뚜렷한 성과다. 프로그래밍만으로 재지한 분위기를 연출한 <재즈카페>, 하우스 비트에 피아노 음원을 결합시켜 내레이션을 덧입힌 <나에게 쓰는 편지> 등의 미묘한 혁신 속에 담긴 감성은 남달랐다. 밴드 음악으로 돌아온 넥스트 시절에 이르러 이 같은 실험성은 더욱 속도를 더한다. 한국 록이 여전히 1980년대적 감수성과 결별하지 못하고 있던 즈음, 그는 언더그라운드의 실력자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해 국내에서 듣기 힘들었던 장중한 사운드를 강한 자의식에 결합시켜 쏟아냈다. 댄스 음악, 혹은 전자 음악에 대한 관심은 각별한 것이어서 <안녕> <Turn off the TV> 등 랩을 적극적으로 껴안는가 하면, 천편일률적인 댄스 비트를 거부하고 로큰롤로 재해석한 훵큰롤 사운드를 넥스트의 1집에서, 좀 더 복고적인 신스팝과 일렉트로니카에 대한 관심을 윤상과의 콜라보 <노땐스>(1996년) 및 솔로 프로젝트 <Crom’s Techno Works>에서 구체화시키기도 했다.

10월28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신해철의 빈소. ⓒ 사진공동취재단
시대를 읽는 관찰의 예리함

파고다 록 신의 막내로서 그의 정체성은 그가 듣고 자란 선배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승계하고 발전시키는 결과물을 가능케 했다. 1970~80년대의 정치적 탄압과 보수적 분위기 속에 저질 음악으로 낙인찍힌 선배의 록과 소울을 그는 과감히 현재로 불러냈다. <커피 한잔>으로 새로운 세대에게 신중현의 존재를 되새겼는가 하면 <정글 스토리>(1996년)에서는 산울림의 <내 마음은 황무지>를 통해 이미 십 수년 전 한국 록에 존재했던, 세계적인 동시대성을 확보했던 시대를 뒤늦게 증언하고 재평가했다. 김수철과 기타리스트 김도균이 천착해온 만큼은 아니었으나 록과 국악의 접속 지점을 끊임없이 모색하며 새로운 ‘한국적’ 소리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널리 소개되지 못했지만 <The Return of N.EX.T Part 2: World>(1996년)의 <Komerican Blues>를 비롯해 양악과 국악의 미묘한 음계 차이를 사운드적으로 극복해 묘한 지점을 포착해낸 <Monocrom>(1999년) 앨범의 <Go With the Light>에서 새삼 확인된 건 신해철이라는 뮤지션이 가진 남다른 ‘비전’이었다.

시대를 읽는 관찰의 예리함, 쉽게 언급을 망설여온 부분에 대해 과감히 나설 수 있는 용기 등  ‘논객’으로서 그의 본질은 음악에서 정교화돼왔다. <우리 앞에 삶이 끝나갈 때> <불멸에 관하여> 등 청년이 품은 삶과 존재에 대한 고뇌에서부터, 비판 없는 현대문명 속  삶의 한 단면을 비판적으로 풀어낸 음악(<도시인> <재즈카페>), 심지어 낙태(<Requiem for the Embryo>), 동성동본 금혼(<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해>) 등 좀 더 구체적인 사회적 이슈를 풀어내는 그의 사유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던 진지한 면모였다. 온갖 가벼운 ‘신세대’론이 범람했던 1990년대 중반, ‘넌 마음 깊은 곳까지 세뇌되어버렸어/석회처럼 딱딱해진 너의 영혼을 해방시켜줘’라는 사색은 적어도 ‘다른’ 수준이었다.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만큼 오히려 정당하게 평가받기 어려웠을지 모를 커리어지만, 앞서 언급된 모든 선구적 면모들을 차치하고라도 그는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Here I Stand for You> <먼 훗날 언젠가>처럼 보편적인 감수성에 호소할 수 있었던 가수로 기억될 것이다. 빼어났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한, 참으로 독특했던 존재. 신해철의 음악에는 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기발함도 있었지만 늘 상식적이고 정당한 판단 안에 머물렀기에 보편적인 호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대중음악이 예술 장르임을, 시대정신과 호흡할 수 있는 강력한 매개임을 각인시켰다. 그래서 그의 부재가 비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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