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무늬 셔츠가 군부의 시대 끝내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4.11.06 17: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민 후보’로 인도네시아 대통령 된 조코 위도도의 인생 역정

핏빛 소식으로만 가득했던 이슬람권에 모처럼 고무적인 뉴스가 들려왔다. 2억5000만명으로 세계 4위의 인구를 가진 나라, 그중 88%가 이슬람을 믿는 나라인 인도네시아가 민주주의와 이슬람의 공존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10월20일 인도네시아 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조코 위도도(별칭 조코위)는 직선제로 선출된 두 번째 대통령이자 첫 정권 교체의 주인공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인도네시아가 갈림길에 선 선거였다. ‘갈림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는 상대 후보 때문이다. 기호 1번 프라보워 수비안토는 31년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던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로 자바 섬의 명문가 출신이다. 장인의 긴 독재 기간 동안 육군 중장에 올랐고, 수하르토 퇴위 시위가 벌어질 당시 활동가들을 납치해 살해한 혐의를 받았지만 제대로 된 재판 한 번 받지 않은 인물이다. 수하르토 축출 이후 요르단에 망명했다가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이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인도네시아행동당(Gerindra)을 창당했다. 그는 이슬람 정당들과 연합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이슬람주의와 사회질서를 강조하며 “아직 인도네시아에 민주주의는 이르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는 후보였다.

조코 위도도가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지지자들과 환호하고 있다. ⓒ AP 연합
가구업 뛰어든 후 지방자치 중요성 깨달아

조코위 대통령은 2005년 인구 52만명의 소도시 수라카르타 시장이 되기 전까지는 정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 1961년 자바 섬 수라카르타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대학에서도 임학을 전공했다. 인도네시아 야당 정치인처럼 독재 타도 운동에 열중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전공을 살려 가구업에 뛰어들었다. 유럽에 수출 길을 열었고 수라카르타 가구산업협회장을 맡을 만큼 나름으로 성공했다.

그랬던 그가 2005년 갑자기 수라카르타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를 정치의 길로 이끈 것은 가구산업협회였다. 2002년 협회장에 취임하면서 가구업계의 수출을 늘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 한 곳에 거점을 건설하기로 했고, 2004년 9월 수라카르타 북부 지역에 23헥타르(23만㎡)의 토지를 확보해 ‘가구·공예 산업센터’를 개설했다. 이날 개소식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참석했다. 메가와티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4년 3월 조코위를 자신이 당수로 있는 투쟁민주당(PDIP)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이 수라카르타와 스마랑을 연결하는 철도 수송 구상이었다. 스마랑은 인도네시아 주요 무역항으로 수라카르타와 100㎞ 정도 거리에 있는데도 차량으로 수송할 경우 4시간이나 소요됐다. 그런데 철도 수송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조코위 대통령은 이때 기업인의 노력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을 통감했다. 주변 동료들은 “다가오는 시장 선거에 출마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수라카르타 시장은 부패 혐의로 비난을 받고 있을 때였다.

2005년 수라카르타 시장에 당선됐을 때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신출내기 조코위에 관한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불식시킬 정도로 그는 눈에 띄는 업적들을 세웠다. 수라카르타 시민들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빈민들이 살아갈 주거지도 이때부터 건설됐다. 직접 현장 시찰을 다니며 정책을 모니터링하고 서민들을 만나는 행사인 ‘블루수칸’(Bluskan·불시에 현장을 방문한다는 뜻)은 조코위 대통령의 대표작인데, 수라카르타 시장 때부터 시작됐다.

풀뿌리 단체·SNS 주축으로 승리

2010년 압도적인 지지로 수라카르타 시장에 재선된 그는 2012년 9월 메가와티 전 대통령이 이끄는 투쟁민주당의 요청으로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현직 주지사를 제치고 승리했다. “가장 하위에 있는 조직을 체크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조직은 타락한 것”이라는 그의 지론에서 알 수 있듯이 블루수칸은 주지사 때도 계속됐다. 지금까지 전임 주지사가 방치해온 문제들도 대화와 설득으로 풀어가기 시작했다. 길가에 가득한 노점상 문제, 홍수 대책용 저수지에 무단으로 정착하고 있는 빈민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뤄졌던 지하철 건설도 그의 시대에 시작됐다. 공공사업의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입찰을 실시했다. ‘일하는 주지사’ ‘서민 주지사’라는 별명을 얻으며 미디어가 그의 ‘블루수칸’을 좇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자카르타 주지사가 된 지 불과 1년 후에 그는 대선 출마를 요구받았다. 이슬람 정당의 세력이 강해지고 프라보워의 기세가 치솟자 ‘조코위 차출론’이 떠올랐다. 2013년 9월 투쟁민주당의 비주류 의원들은 “차기 대선에 메가와티가 아닌 조코위를 후보로 옹립해야 한다”는 요청을 당 집행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대선 출마를 고려하던 메가와티는 그 요청에 응답하지 않고 오히려 당내 함구령을 내렸다. 자신의 영향력 약화를 바라지 않았고 자신의 역할을 딸 푸안 마하라니가 넘겨받길 원해서였다.

대선의 해인 2014년이 열리자 ‘강한 인도네시아’를 주창하는 프라보워의 인기가 점점 치솟았다. 중산층 이상의 엘리트와 군부 독재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층에서 프라보워의 지지가 높아졌다. 반대편에선 트위터·페이스북 등에서 조코위를 지지하는 운동이 시작됐다. 당내 여론뿐만 아니라 일반 여론도 조코위 차출에 호응했고, 여론조사에서 조코위가 프라보워를 이기는 것으로 나타나자 메가와티도 욕심을 접었다. 2014년 3월14일 조코위는 메가와티의 손에 이끌려 투쟁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됐고 결국 정권을 잡았다.

메탈 음악 마니아로 레드 제플린과 메탈리카를 좋아하며 권위적인 화이트셔츠가 아니라 누구나 입는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현장을 누비는 정치인. ‘서민’ 조코위 대통령은 기득권이 뒤얽힌 행정부와 의회를 대상으로 능력을 시험받게 됐다. 300개 이상의 부족으로 엮인 2억5000만명을 안고 ‘다양성 속의 통합’도 요구받게 될 것이다. 그가 인도네시아에 수십 년 동안 기생했던 부정적인 전통들을 지워나갈 수 있을까. 정치 활동 10년 만에 대통령으로 월반한 그에게 주어진 험난한 여정들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