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라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4.11.1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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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름’ 제작 비정규직 노동자 영화 <카트>

현실은 언제나 이상보다 거칠다. 당장 오늘내일 먹고사는 게 당면 과제인 사람들에게 법이란 허울뿐인 개념이다. 우리는 지금, 돈 아래 인간이 있는 세상을 산다.

<카트>는 이런 세상에 의미 있는 울림을 던진다. 여기에는 부당한 상황에 맞서 소리치는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제발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고 우리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는 절박한 외침이 있다. ‘더 마트’라는 가상의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이지만 영화의 시나리오는 2007년 이랜드 홈에버 파업과 대학교 청소노동자 문제 등 여러 비정규직 노동자 사례를 참고해 만들어졌다.

영화
‘나’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

마트 입사 후 5년간 벌점 한 번 받지 않고 성실하게 일한 선희(염정아)는 정직원 전환을 눈앞에 두고 회사로부터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당한다. 다른 직원도 마찬가지다. 회사가 잘되면 나도 잘되는 줄 알고 밤낮없이 일했던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린다. 생계형 가장 선희, 홀로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 혜미(문정희)를 비롯해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단체행동에 들어간다. 노동조합의 ‘노’자도 몰랐던 이들은 함께 투쟁하며 연대의 힘을 깨닫는다. 하지만 경찰과 용역 투입까지 서슴지 않으며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는 사측의 강경 대응이 만만치 않다.

극 중 마트 노동자가 일하는 환경은 열악하다. 추가 수당은 말도 못 꺼내고 연장 근무를 강요받는 상황은 그나마 양반이다. 자식뻘인 관리자에게 온갖 굴욕을 당하며 반성문을 쓰는 일이 허다하고 진상을 부린 고객 앞에 억지로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일도 벌어진다. 불평 대신 이들은 어두컴컴한 층계 밑 좁아터진 창고에서 찬밥 한 덩이를 간신히 입에 밀어 넣는다. 영화는 그러던 그들이 힘을 합쳐가는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사측과 교섭을 시도하고, 파업 투쟁을 시작하고, 무수히 실패하고 오뚝이처럼 다시 시작하는 모든 기록이 이 영화에 있다.

<카트>는 연대의 가치와 의미를 이야기한다. 이 안에는 절대 선도 없고 절대 악도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구도가 명확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정규직 직원 역시 자신의 일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밀어내야 하는 이들일 뿐이다. 세상에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밀어내는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같이 잘사는 방법도 있다는 것.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이는 비단 마트에서 일하는 ‘아줌마’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조합에 참여하는 직원 중에는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로 마트 일을 하는 20대 미진(천우희) 같은 인물도 있다. 그는 일반적인 20대가 그렇듯 노동 문제에 심드렁하다.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게 막상 내 일로 닥치는 순간 싸우게 될 뿐이다.

선희의 고등학생 아들 태영(도경수)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월급을 떼인다. 그것도 모자라 사장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기까지 한다. 자신이 처한 억울한 상황도 꾹꾹 참고 있던 선희는 아들을 때린 편의점 사장을 향해 처음으로 울분을 터뜨린다. 선희의 외침은 바보같이 당하고만 살던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영화는 이것이 이다음 세대에까지 얼마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상황일 수 있다는 것을, 지금도 눈을 돌리면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생히 전달한다. ‘남이 하는 과격한 행위’를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일’로 바꿔 전달할 수 있는 힘,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그 감수성이 이 영화엔 있다. 

영화 ⓒ 리틀빅픽쳐스
<파업전야> <우생순> 그리고 <카트>

상업영화가 선뜻 다루기 어려운 비정규직 문제를 꺼내들었으되 재미와 감동을 버무려 탄탄하게 완성했다는 점에서 <카트>는 충분히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영화를 연출한 부지영 감독은 “어떻게 보면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가족과 우정, 동료애 등 보편적인 감정을 균형 있게 맞춰간다면 상업영화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카트>를 보다 보면 명필름이 2007년 제작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이 여러 번 떠오른다. <우생순>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결승전까지 올랐던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우생순>이 보여주는 선수들의 현실은 팍팍하다. 영화는 그것을 미화하는 대신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을 통해 초라하고 팍팍한 현실을 돌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악착같은 끈기로 주어진 삶을 살아내려는 그들의 모습에, 공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의 도구로 카트를 미는 <카트>의 노동자가 겹친다. 누군가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그걸 왜 굳이 주목해야 하느냐고 말하는 소재에서 공감을 길어 올리는 힘. 명필름은 그것을 동력 삼아 <우생순>과 <카트>를 만들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카트>에는 한국 독립영화의 전설 <파업전야>(1990년)에서 오는 기시감이 어른거린다. 제작자 심재명의 남편이자 명필름 공동대표인 이은이 독립영화단체 장산곶매에 있던 시절 몇몇 감독과 함께 만든 극영화다. 영화의 주 무대는 동성금속으로, 저임금과 연장근무 등 노동 착취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생산 현장이다. 

<파업전야>는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1980~90년대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5년 가까이 지난 지금 갓 태어난 영화인 <카트>가 담고 있는 풍경이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명필름이 <카트>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이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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