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지 않은 무덤덤한 사랑의 맛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4.12.1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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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잔잔한 감동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우주 신파 <인터스텔라>도 꺾었다. 웬만한 상업영화는 적수가 안 된다. 화제의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연일 신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다. 11월27일 개봉해 2주 차 주말에 20만 관객을 돌파하더니, 이후에도 상승세가 거침없다. 전국 186개로 출발한 상영관 수는 12월 둘째 주에 접어들면서 300개 이상으로 대폭 늘어났다. 통상 다큐멘터리가 개봉 2주 차 상영을 보장받기도 어려운 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2만~3만명씩 관객을 꾸준히 끌어모으고 있다. 이대로라면 12월 중순까지 100만 관객은 무난하게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영화계 안팎에서는 조심스레 <워낭소리>(2008년)의 기록이 깨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30년을 동고동락한 소와 노인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는 293만 관객을 모았고, 이 기록은 다양성영화 역대 흥행 2위(1위는 342만명을 모은 <비긴 어게인>)다.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가 세운 기록 중에는 역대 최고다.

ⓒ 대명문화공장 제공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특별한 풍경이 아니다. 89세 강계열 할머니와 98세 조병만 할아버지, 이 금실 좋은 부부의 일상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개울가에 주저앉아 건너편에 있는 무덤을 바라보며 슬피 우는 할머니의 뒷모습이다. 이로써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정보부터 확실하게 전달된다. 이후 관객이 보게 되는 건, 그가 떠나기 전 계절이 네 번 바뀌는 동안 노부부가 알콩달콩 살았던 일상의 기록이다. 그리고 점차 병약해지는 할아버지를 보며 이별을 준비하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제2의 <워낭소리> 등장했다”

76년이라는 생을 함께한 이들 사이의 애틋한 정, 그리고 가슴 뭉클한 이별의 과정이 여기에 있다. 이 영화의 무엇이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없다. 다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형식미가 뛰어난 작품이라고 보긴 어렵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신선한 소재인 것도 아니다. 심지어 부부의 사연은 2011년 KBS <인간극장-백발의 연인>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됐다. 왜 지금, 어떻게, 극장가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열풍이 부는 걸까.

어느 정도 조짐은 보였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사전 제작 지원작으로 올해 9월 열린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다. 조재현 집행위원장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앞으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이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영화를 소개한 바 있다. 당시 강계열 할머니는 옆자리에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두고 영화를 관람했다. 상영 전석 매진과 더불어 영화제 기간 내내 관객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받은 이 영화는 결국 관객상까지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내년 1월에 열리는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도 초청된 상태다. 영화제 직후부터 “제2의 워낭소리가 등장했다”는 입소문이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11월 초부터 진행한 개봉 전 관객 시사도 입소문 확산에 한몫했다. 홍보 마케팅 측에 따르면 관객 반응은 하나같이 ‘감동적’이라는 데 모아졌다. “가벼운 사랑이 대세인 요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됐다” “<워낭소리>의 감동 그 이상이다”는 평이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중심으로 쏟아졌다. 이렇게 모인 개봉 전 관객은 6198명이다. ‘월간 윤종신’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매월 신보 한 곡씩을 발매하는 가수 윤종신이 11월호 ‘행복한 눈물’을 선보이면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영상을 뮤직비디오로 만들었다는 소식까지 SNS를 달구면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됐다.

제작사인 대명문화공장과의 공동 배급으로 CGV아트하우스가 나서면서 상영관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것 역시 초기 흥행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11월27일 개봉 당일 스크린 수만 해도 186개였다.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화제가 됐던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이 20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감동 다큐멘터리 <목숨>이 97개 상영관에서 출발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다고 이 흥행이 단순히 사전 입소문과 상영관 수만으로 이뤄진 결과라고 보긴 어렵다. 예매 사이트 맥스무비의 집계에 따르면 전체 예매 관객 연령 비율에서 30~40대 관객이 70%에 달한다. 그중 40대 관객이 40%다. 일반적으로 20~30대 관객이 먼저 흥행을 주도하고 장기 흥행으로 이어지면서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유입되는 경우와는 확연히 다르다. 블록버스터 등 ‘젊은 영화’에 밀려 상대적으로 주춤했던 중·장년층 관객을 움직일 만한 콘텐츠가 오랜만에 등장했다는 분석이 많다. 이는 <워낭소리>가 개봉됐을 때와 비슷한 양상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극장에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본 중년 관객에게 관람 이유를 물어보면 “주변에서 추천받았다”는 반응과 “자녀들이 예매해줬다”는 대답이 많다.

가벼운 사랑 시대의 진정한 사랑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연출한 진모영 감독은 방송 프로그램 제작 경력이 17년이다. 그는 노부부의 사랑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2012년)를 보고 이 다큐멘터리를 구상했다고 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감독의 개인적인 사연에서 출발한 작품이기도 하다. 진모영 감독은 첫 결혼에 실패했고, 그에게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탐구가 일종의 숙명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애초 감독이 “냉정하고 차가운 관찰과 응시를 통한 사랑의 정확한 표현”을 시도했지만 결국 연출 방향을 수정해야 했던 이유다. 그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신파 다큐멘터리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만 “노부부의 사랑과 이별 앞에서 의도치 않게 번번이 빗나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런 점이 되레 관객에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갔다. 한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뉴스도 흉흉한데 영화까지 심각한 내용을 보고 싶지 않은 관객의 심리와 정확히 맞아떨어진 기획”이라고 짚었다. 

이 분석은 12월 초 개봉한 다큐멘터리 <목숨>이 함께 선전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릴 때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목숨>은 남은 시간 평균 21일, 생의 끝자락에서 호스피스에 머무르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돌아보고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개봉 2주 차까지 관객 2만명을 모으며 선전 중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목숨>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더욱 정확하게는 ‘어떻게 사랑하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다른 듯 닮았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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