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 피네, 붉은 잎이 지네
  • 신영철│여행 작가 ()
  • 승인 2015.02.0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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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와 남도의 동백 기행 삼백리 길

뼛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에도 마음은 달아올랐다. 기다리면 오실 님이건만…. 정해진 만남이라 해서 기쁨의 부피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포악스럽던 파도마저 고분고분해지는 것만 같다. 기다림에 달떴던 바닷가 동백은 시든 모습을 보이기 싫어 붉은 몸 그대로 님 앞에 던져놓는다. 님이 오는 남도의 섬돌이길. 동백꽃이 온몸을 바쳐 님을 반기는 길목이다. 봄을 맞이하는 길목이다.

■ 동백꽃 떨어지니 봄이어라, 제주의 동백숲

남국이라 하지만 바다에서 칼바람이 휘몰아치니 제주의 겨울은 녹록하지 않다.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해 제주 사람들은 집담과 밭담을 쌓았고 담을 에둘러 다시 동백을 심었다. 이렇게 형성된 동백숲은 한겨울에도 상록의 기운을 돋우며 하얀 눈밭에 붉은 꽃을 보여줬다. 겨울 지나 봄이 되면 동백은 겨우내 피어오른 꽃송이를 봄이 오는 길목마다 흩뿌려 놓는다. 제주의 봄은 동백의 헌화로 시작되는 셈이다.

눈을 뚫고 피어난 제주 동백 ⓒ 신영철 제공
제주도 남원읍 신흥2리와 위미리는 오래된 동백숲이 잘 보존된 마을로 찬찬히 봄맞이 나가기에 좋다. 신흥2리는 동백마을로도 불린다. 1706년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던 김명환님이 심은 동백숲이 오늘도 굳건하다. 집담을 둘렀던 동백이기에 규모는 아담하지만 숲 안에는 집 지을 당시 마당에 심었던 귤나무와 통시 등이 남아 있어 흥미롭다.

동백마을에서 남쪽 바닷가로 차를 달리면 위미리가 나온다. 이곳의 동백나무 군락은 한 여인의 손에서 시작됐다. 가난한 집에 시집온 현맹춘 할망은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모은 돈 35냥으로 바닷가 황무지 땅을 샀다. 거친 바람 때문에 농사가 되지 않자 한라산에서 동백 씨앗을 주워와 밭고랑에 심었다. 수십 년의 기다림 끝에 씨앗은 숲이 돼 바람을 막아주었고 밭은 옥토가 되었다. 할망은 세상을 떠났지만 더욱 그윽해진 숲에는 새들의 노래가 청아하다. 동백꽃 그늘에 젖은 마을과 감귤밭을 거닐자면 할망의 품처럼 따스한 남국의 정취가 온몸에 스민다.

추사 김정희도 아름답다 극찬했던 안덕계곡은 상록의 원시림이 울울창창하다. 천연기념물 제377호로 지정된 난대림도 귀하지만 건천이 대부분인 제주도에서 사철 물이 흐르는 계곡 또한 진귀하다. 한라산에서 눈 녹은 물이 계곡으로 흘러들어 숲 어디선가 동백이 떨군 꽃송이를 실어 나른다. 푸른 물 위에 꽃이 흐르니 봄 운치의 극치라 할 만하다.

상록의 싱그러움에서는 오설록 다원도 빼놓을 수 없다. 운이 좋다면 녹차 두렁을 거닐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녹차꽃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꽃잎만 하얄 뿐이지 겨울에 꽃을 피우는 점이나 황금빛 수술은 동백꽃을 빼닮았다. 동백이 차나무과에 속하니 당연한 일이다. 이 시절 오설록에서 연인들의 명당자리는 녹차공장 앞의 동백숲이다. 푸른 잔디밭 위 동백꽃송이들이 선홍빛 자수를 놓은 자리에 앉으면 녹차밭은 푸르다 못해 은빛으로 반짝인다.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동백꽃의 꽃말이 연인들의 밀어가 돼 숲을 맴돈다.  

▲ 제주 동백숲 찾아가기

* 신흥2리 동백마을 : 서귀포시 남원읍 한신로 531길 22-1

* 위미리 동백나무 군락 :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중앙로 300번길 28

* 안덕계곡 :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 359

* 오설록 다원 :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1235-3



① 한겨울에도 상록의 숲을 이룬 안덕계곡. ② 전설처럼 얽힌 나무 뿌리에 내려앉은 홍도 동백꽃. ③ 겨울 추위에 얼음화석이 될지언정 시들지 않은 울릉도 동백. ⓒ 신영철·김천령 제공
■ 그곳으로 봄마중 가다, 남도의 동백섬

제주에서 불기 시작한 꽃바람은 섬에서 섬을 징검다리 삼아 육지에 닿는다. 떠들썩하지 않게 봄마중을 하고 싶다면 동백꽃 피고 지는 남도의 섬마을로 향할 일이다.

울릉도는 한반도에서 꽤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 눈도 많지만 난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한 편이다. 덕분에 동백꽃이 일찍 꽃잎을 연다. 오징어 잡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2월부터 꽃을 피우니 어부들의 콧노래를 부르는 꽃이기도 하다. 시인 정훈은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라고 동백을 노래했다. 울릉도 동백은 3월이 아니라 백설에 꽃을 피우는 진짜 겨울꽃이라 더욱 반갑다. 향나무 자생지로 유명한 대풍감 가는 산책로에 피어나는 동백꽃이 유독 어여쁘다. 긴 호흡의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내수전에서 석포에 이르는 태하령 옛길이 제격이다. 고즈넉한 숲길 간간이 동백꽃이 푸른 바다에 젖어 있다.

홍도는 해질녘이면 섬 전체가 붉게 물들어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이면 섬은 노을 질 때가 아니어도 붉게 빛난다. 홍도 관리사무소 옆을 돌아 자생란전시관 뒤로 오르면 울울창창한 동백숲이 시작된다. 수백 년 세월을 부여잡고 있는 동백숲은 홍도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왔다는 죽항당산을 품고 있다. 당집 주변으로는 호롱불 밝힌 듯한 동백, 동백꽃. 전설 같은 풍경이다.

거문도는 대한제국 때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섬을 불법 점령했던 사건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곳은 역사책보다 사진첩에서 빛나야 마땅하다. 삭막한 겨울에 섬은 오히려 화사해진다. 발길 닿는 곳마다 천혜 절경. 특히 목넘애에서 등대까지 이르는 1.2㎞의 섬돌이길에서 만나는 동백숲은 화려의 극치다. 1월 말부터는 유명한 해풍쑥을 채취하기 시작하니 거문도의 겨울은 향기롭기까지 하다. 제주에서 불어온 봄바람이 거문도까지 닿았으니 며칠 지나면 여수 오동도에도 붉은 꽃비가 내리겠다.

 

 

▲ 남도의 섬마을 찾아가는 길 : 각 시·군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상세히 안내돼 있다.

* 울릉도 : http://ulleung.go.kr/tour

* 홍도 : http://www.hongdo.go.kr

* 여수 : http://www.ystour.kr


①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의 중반까지 계속되는 동백 터널. ② 동백꽃 피는 섬자락마다 소박하게 세워진 고토의 성당. ⓒ 신영철 제공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라 트라비아타>는 ‘춘희’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원제는 우리말로 동백아가씨라는 의미지만 일본에서 춘희(椿姬)라 번역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동백을 椿(춘)이라 쓴다. 그래서일까, 동백은 일본 꽃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였던 것도 이런 무지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동백은 한국과 일본, 중국에 고루 자생하는 나무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에 국경이 필요할까.

한국보다 남단에 위치한 일본 규슈에는 동백꽃이 이미 만발했다. 가깝기도 하거니와 엔화 약세 덕분에 부담도 적어진 규슈에 간다면 색다 른 봄을 맞을 수 있다.

규슈의 후쿠오카 시에서 한 시간 남짓 전철을 타면 가라쓰에 닿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국과 가까운 이곳 바닷가에 히젠 나고야 성을 지어 임진왜란의 전초기지로 사용했다. 제주올레의 자매길인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는 그 역사의 흔적을 더듬는다. 전쟁은 승부를 떠나 청춘의 피로 얼룩지기 마련. 성터로 향하는 길에는 아까운 생명들이 져버린 것을 애도하듯 내내 동백이 붉은 눈물을 떨군다. 가라쓰 올레 끝 하토 곶에 이르면 바다 건너 섬 하나가 보인다. 백제의 무령왕 탄생지인 그곳 가카라 섬에도 동백이 무성하다.

규슈의 서쪽 나가사키 시에서는 고토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오를 수 있다. 일본의 막부는 서양과의 통교 이후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불안을 느꼈다. 막부가 금교령과 더불어 박해를 시작하자 많은 기독교인이 이 섬으로 숨어들었다. 금교령이 해제되자 놀랍게도 200년 동안 성직자도 없이 신앙을 지켜왔던 기독교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한 끼 거른 돈을 모아 돌이 많은 곳에서는 돌로, 나무가 많은 곳에서는 나무로 성당을 올렸다. 그렇게 탄생한 고토의 성당들은 엄동설한에 꽃을 피운 동백과 참 많이 닮았다 싶다. 붉게 꽃물 든 섬 자락마다 서 있는 성당의 자태를 보자면 그 말이 떠오른다. ‘절조’! 동백꽃의 또 다른 꽃말이다.

▲ 규슈의 섬 찾아가는 길 : 각 지자체 관광협회 홈페이지의 한국어 서비스를 통해 안내받는다.

* 가라쓰 시 : http://www.karatsu-kankou.jp

* 고토 섬 : http://www.gotokank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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