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죽음도 삶의 일부…얘기를 나눕시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5.03.1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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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영방송 ARD, ‘죽음’ 테마 일주일 내내 다뤄 담론 확산

죽음을 이야기하길 꺼리는 것은 독일인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어린이는 죽음에 대한 담론에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의식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초등학생 자녀와 성(性)에 대해 자유로이 대화를 나누는 부모들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얼버무리기 일쑤고, 소아·청소년 호스피스 사업은 성인 호스피스 사업에 비해 대중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어린 생명과 죽음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심리적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독일에서는 이러한 금기를 깨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2013년 2월10일 후베르트 휘페 연방 장애인이해(利害)대리인은 ‘소아 호스피스 사업의 날’을 맞아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죽음’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학교야말로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 대한 금기를 깰 수 있는 장소’라는 이유에서다. 오늘날 독일 사회와 학교는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독일 사회에 죽음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켰던 프로그램 에서 베를린 의학협회 관계자와 환자가 얘기하고 있다. ⓒ ARD
“죽음을 더 어린 나이에 가르쳐야”

2012년 가을, ‘죽음’이 독일의 광고판을 뒤덮었다.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 신문과 가판대 등 시민들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큼지막한 글씨로 ‘당신은 죽게 됩니다(Sie werden sterben)’라는 문구가 내걸렸다. 충격적인 문구 밑에는 작고 연한 글씨로 ‘그것에 대해 얘기를 나눕시다’라는 문구와 독일 공영방송사 ARD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ARD는 매년 11월 한 주간 하나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테마 주간 방송을 한다. 독일 전국에 내걸린 도발적인 슬로건은 바로 2012년의 주제인 ‘죽음과 함께하는 삶’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ARD의 테마 주간은 한동안 독일 사회에 죽음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방송을 통해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토크쇼, 영화가 방영되었고 온라인에서도 토론이 이어졌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그렇잖아도 우울한 계절에 일주일 내내 죽음에 대해 방송하는 것은 지나치다”라는 불만부터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삶을 바꿀 계기를 마련해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ARD의 시청자 게시판 역시 온통 ‘죽음’에 대한 얘기로 가득했다. 그동안 쉬쉬해온 죽음에 대한 담론을 공영방송사가 공적 영역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독일 방송사의 파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ARD 산하의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방송(RBB)은 홈페이지를 통해 죽음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과 어린이 인터뷰, 학부모와 교사를 위한 수업 자료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 그 이후 등 세 단계로 구성된 이 수업 자료의 대상은 초등학생이었다. 독일의 방송사가 깨고자 한 것은 이렇게 죽음에 대한 담론에서 어린이들을 배제해온 관습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인 크리스토프 슈투덴트는 RBB와의 인터뷰에서 “어린이를 죽음에서 떼어놓는 것은 곧 삶에서 떼어놓는 것이며, 아이가 죽음에 대해 물어오면 제대로 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보다 아이에게 죽음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아이의 상상을 존중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조언을 덧붙였다.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만나는 교사들은 이러한 주장에 지지를 보낸다. 본에 소재한 한 김나지움의 종교 교사인 크리스티네 슈테핀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죽음을 더 어린 나이에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막는 사회적 분위기가 죽음을 더욱더 금기시하게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슈테핀은 “6, 7학년 때 수업에서 처음 죽음을 다루지만 피상적으로 언급하는 수준에 그칠 뿐이다. 고학년에 올라가면 입시 준비 때문에 죽음에 대한 학생들의 진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밝혔다.

죽음에 대한 ‘조기 교육’을 실시하자는 데 찬성하는 학부모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베를린에 사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늦깎이 의대생인 요한나 클라인은 “탄생과 죽음은 모두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일찍부터 배울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전했다. 첫째 딸인 마리는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다. 마리는 세 살 때 증조할머니가 사망해 처음으로 장례식에 갔다. 그리고 불과 한 달 후 클라인의 친구가 한 살 된 아들을 잃었다. 클라인은 딸 마리에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나이가 많아서 돌아가셨다’고 설명해줬는데 바로 얼마 뒤에 친구의 아기가 죽자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난감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다른 친구들도 아이와 함께 왔고 관에 페인트로 손바닥 무늬를 찍고 하늘로 풍선을 날려 보내는 등 ‘아이를 위한 장례식’으로 진행돼 도움이 됐다. 그는 “둘째는 여덟 살이라 아직 좀 이르지만 큰애 정도 나이의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죽음을 다루는 것에는 대찬성이다”고 밝혔다.

독일에서는 소아·청소년 호스피스 사업도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1990년 최초로 아동 호스피스 단체가 생긴 이래 전국 각지에 11개의 소아·청소년 호스피스 병동과 20개의 외래 소아·청소년 호스피스센터가 문을 열었다. 독일에서는 매년 400여 가족이 소아·청소년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수요는 증가하고 있다.

소아·청소년 호스피스 사업 꾸준히 확대

독일의 ‘쥐트도이체 차이퉁’지는 한나 자바스와 다니엘 게레케 부부의 사례를 소개했다. 자바스 부부의 늦둥이 안누카는 생후 30개월에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아이를 살릴 길이 어디에도 없음을 받아들인 부모는 아이의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누카의 죽음에 동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의학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소아암 전문의는 암에 맞서 싸우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는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밝혔다.

망연자실한 부부를 도운 사람은 두 명의 완화의료 전문 간호사였다. 이 가족은 소아 호스피스 시설에 입주한 후 세 살배기 안누카의 죽음을 차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아이는 2주 후 가족의 곁을 떠났다. 부부는 “고통스럽지 않거나 평온한 죽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가 정한 시간에 죽음이 일어났고 곁에는 엄마·아빠와 언니가 있었으며 우리는 마지막으로 자장가를 불러주고 ‘이제 가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초등학교에서의 죽음 교육과 소아 호스피스 사업은 죽음을 대하는 독일 사회의 태도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은 예외나 사적인 일이 아니라 모든 삶의 일부이고 때문에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어떤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떤 부모들은 자녀의 병상 앞에서 배운다. 그리고 이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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