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18. 대통령 3명과 사돈을 맺다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3.12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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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 조홍제, 명문가 딸과 혼인…재계에서 소문난 혼맥 일궈

“내가 7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결단 중에 가장 현명한 결단이었다.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분배받을 재산에 연연했더라면 내 독자적인 사업은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재산은 재산대로 찾지 못한 채 끝나게 됐으리라. 때로는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요, 버리지 않는 것이 곧 잃는 것이라는 이 역설적인 교훈은 내 후배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효성그룹 창업자인 만우 조홍제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과 헤어질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1962년 56세에 효성물산을 설립하며 독자 경영의 길에 나선 조홍제는 스스로를 ‘늦되고 어리석다’고 칭하며 이때부터 ‘만우(晩愚)’라는 호를 쓰기 시작했다.

2003년 8월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조현문 당시 효성 전무(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와 이여진씨(조 전무 오른쪽 옆) 약혼식에서 양가 가족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조석래 효성 회장과 부인 송광자씨, 전원자씨(여진씨 모친), 이부식 전 교통개발원장(여진씨 부친). 뒷줄 왼쪽부터 조현준 사장과 부인 이미경씨, 조 전무, 이여진씨, 맨 오른쪽은 조현상 부사장. ⓒ 시사저널 포토
만우 조홍제와 호암 이병철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조홍제의 집이 경상남도 함안(군북면 동촌리), 이병철의 집이 의령이어서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조홍제는 이병철의 형인 이병각과 동갑 친구여서 자주 오가곤 했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온 조홍제와 이병철은 서로 자주 만나면서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1948년 12월 이병철이 무역업을 시작할 때 조홍제는 800만원이라는 거금을 이병철에게 빌려줬다. 1949년 초 조홍제는 이병철의 청을 받아 200만원을 보태 1000만원을 아예 투자했다. 이병철은 이 돈에 자신의 돈을 합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는 자본금으로 삼았다. 조홍제와 이병철의 동업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병철이 사장, 조홍제가 부사장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인 1958년 삼성은 명실공히 재계의 최고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하늘 아래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는 법, 두 사람의 결별은 어쩌면 예고된 수순이었다.

만우 조홍제 회장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펴낸 <만우 조홍제 일화집-늦되고 어리석을지라도>에서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그해(1958년) 호암(이병철)은 만우(조홍제)에게 동업 청산을 요구했다. 40대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기업가로서 황금 같은 시기에 그의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일군 기업, 그곳을 떠나라는 요구였다. 두 사람은 결별에 동의했으나, 문제는 지분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호암은 선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이리저리 태도를 바꾸며 시간을 끌었다.

그 기간이야말로 만우의 일생에서 가장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만우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하룻밤에 담배를 5~6갑 태워 없앴다. 만우는 자신의 지분이 3분의 1 정도 되고 사장을 지내 회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제일제당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결국 호암이 내놓은 것은 당시 부실기업으로 은행 관리를 받고 있던 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이론에 삼성이 지분으로 갖고 있던 3분의 1가량의 주식이었다. 만우에게 남은 선택은 재산을 찾기 위해 소송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만우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조홍제, 이병철과 결별하다

1962년 삼성과 결별하고 효성물산이란 조촐한 무역회사로 새 출발을 한 조홍제가 처음 시작한 사업은 제분업이었다. 그가 제분공장을 인수해 가동하자마자 제분업계가 일대 호황을 맞게 돼 그는 큰 성공을 거뒀다. 조홍제는 4년 후 60세 되던 해에 나일론 원사를 생산하는 동양나이론(현 효성)을 설립하고 부실기업이었던 조선제분·한국타이어 등도 인수해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오늘날의 효성그룹은 이렇게 태동했다.

조홍제는 ‘사업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40여 년간 기업을 경영해 오면서 내가 주관했던 모든 사업에서 실패가 없었다. 그것은 사업성을 검토하는 데 있어서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계수적으로 철저하게 체크해 이만하면 틀림없겠다는 심증이 서면 비로소 착수하고, 대신 그 추진은 담당자나 전문가에게 일임해온 데 있지 않나 싶다.’

효성가(家)의 혼맥은 재벌가 중에서도 화려하기로 소문나 있다. 전직 대통령 3명과 유명 정치인, 장관 등 다수의 정·관계 인사들과 연결돼 있다.

조홍제는 경상남도 함안 대지주였던 부친 조용돈과 모친 안부봉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에 진주의 명문가인 하세진 가문의 하정옥과 결혼했다. 조홍제는 하정옥과의 사이에 3남 2녀를 뒀다. 장녀 조명숙은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경남 진양의 대지주였던 허정호와 결혼했다. 허정호는 서울신한병원 원장을 지냈다. 차녀 조명률은 경남 산청의 대지주인 권동혁의 장남 권병규에게 시집갔다. 권병규는 효성건설 회장을 지냈다.

조홍제의 장남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을 거쳐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원에서 화공학을 전공했다. 학자의 꿈을 키웠으나 부친의 요청을 받고 1966년 효성 경영에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경영에서 물러난 1978년 이후 본격적으로 주력 기업인 효성물산·동양나이론·동양폴리에스터·효성중공업(4개사 모두 ㈜효성으로 통합) 등을 맡았다.

조석래의 부인은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전 재무부장관)의 3녀인 송광자다. 조홍제와 송인상이 처음 만난 곳은 재판정이었다. 5·16 직후 부정축재자 처리법에 따라 혁명재판소 피의자석에 함께 앉게 됐고, 이때 송인상이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내가 다 했다”고 진술하는 조홍제를 유심히 보게 된 것이다. 언젠가 조홍제는 송인상에게 자신의 콤플렉스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사돈에게 내가 가장 감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어쩌면 남에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칭찬을 잘하나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바로 그렇게 칭찬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잘 안 돼요.”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 시사저널 포토
조석래와 전두환은 ‘사돈의 사돈’

어쨌든 효성가의 혼맥은 조석래-송광자 혼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송인상의 장녀 송원자는 이봉서 한국능률협회 회장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딸 이혜영은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의 장남 이정연과 혼인했다. 송인상의 차녀 송길자는 신명수 전 동방그룹 회장과 결혼했는데 첫째 딸 신정화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최태원 SK 회장의 처남인 노재헌과 혼인했다. 그러나 신정화-노재헌은 2013년 5월, 결혼 23년 만에 이혼했다. 두 사람은 지난 1990년 청와대에서 결혼했으나 2011년 각각 한국과 홍콩에서 이혼 소송을 냈다. 자녀 3명의 양육권은 신정화가, 친권은 노재헌과 신정화가 공동으로 갖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석래는 세 아들을 뒀다. 장남 조현준 효성 사장은 모건스탠리에서 일하다가 1997년 경영기획팀 부장으로 효성에 합류했다. 이희상 동아원그룹 회장의 막내딸 이미경과 결혼했다. 이미경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3남 전재만의 부인 이윤혜의 동생이다. 조석래와 전두환은 ‘사돈의 사돈’인 셈이다. 이윤혜는 전두환의 사저인 서울 연희동 별채의 소유권을 갖고 있어 주목됐다. 전두환이 퇴임 전 매입한 이 별채는 1996년 전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당시 검찰이 압류했다. 2003년 추징금을 회수하기 위해 강제 경매에 들어갔는데, 전두환의 처남인 이창석이 감정가를 훨씬 웃도는 16억원에 사들였다. 이것을 2013년 5월, 전두환 며느리인 이윤혜가 12억5000만원에 이창석으로부터 다시 사들인 것이다.

차남 조현문 법무법인 현 고문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뉴욕 주 변호사로 일하다가 1999년 경영기획2팀 부장으로 효성에 합류했다.  이부식 전 교통개발원장의 장녀인 이여진과 2003년 결혼했다. 조현문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가수 신해철과 보성고 동창으로 1학년 때 반 대항 응원전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의 음악 실력을 알아봤다고 한다. 대학 때 밴드를 같이하자는 약속을 지켜 ‘무한궤도’를 결성해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라는 노래로 대상을 탔다. 당시 조현문은 키보드를 쳤다. 조현문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수석 입학, 수석 졸업했다.

이여진은 2001년 미국 로펌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때 조석래 부부를 처음 만났다. 조현문과는 2002년에 처음 만나 1년여 만에 결혼에 이르렀다. 서울대 불문과를 나온 이여진은 1997년 외무고시(31기)에 합격한 후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등에 근무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조석래의 삼남 조현상 효성 부사장은 경영컨설팅사 베인&컴퍼니와 일본의 통신사 NTT도코모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 효성에 입사했다. 김여송 광주일보 사장의 딸 김유영과 결혼했다. 김여송은 행남자기 김용주 회장의 사촌이다. 줄리아드스쿨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비올리스트 김유영은 2014년 세계적 첼리스트인 요요마와 함께 ‘실크로드 앙상블’ 협연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차남 조현문이 형인 조현준을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아버지 조석래와 형 조현준이 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검찰에 동반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언론에서는 ‘효성가 형제의 난’이라고 이름 붙였다. 갖고 있는 지분을 팔아치우고 독자 노선을 선언한 조현문이 조석래·조현준·조현상과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조현범 사장, MB 셋째 딸과 혼인

조홍제의 둘째 아들은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미국 유학이 예정돼 있던 조양래는 전공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이 많았다. 하루는 아버지 조홍제에게 물었다.

“아버지, 제가 전공을 어떤 것으로 하면 좋을까요?”

“그게 무엇이든 네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를 택하거라. 다만 정치 쪽은 하지 말아라.”

조홍제는 정치의 속성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직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싫어했고 정치 쪽으로 나가는 것을 반대했다.

조양래는 홍긍식 전 변호사협회장의 딸 홍문자와 혼인했다. 2남 2녀를 뒀는데 미국 뉴욕에서 수학과 교수로 활동하는 장녀 조희경은 노재원 전 중국 대사의 아들인 노정호 연세대 법대 교수와 결혼했다. 장남 조현식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사장은 차동환 카이스트 교수의 딸인 차진영과 혼인했다. 차동환은 설경동 대한전선 창업주의 둘째 사위다. 1970년생인 조현식은 경복초등학교-홍익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쳤다. 1995년 시러큐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10월 미국 미쓰비시상사에 입사해 2년간 경영 경험을 쌓은 뒤 1997년 6월 한국타이어에 합류했다.

조양래의 막내아들인 조현범 한국타이어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셋째 딸인 이수연과 결혼했다. 이수연의 큰아버지인 이상득 전 국회의원은 구자두 LG인베스트먼트 회장과 사돈을 맺고 있다.

조홍제의 막내아들 조욱래 DSDL(옛 동성개발) 회장은 28세에 대전피혁을 물려받아 사장을 맡으며 경영 일선에 뛰어들었다. 이에 조홍제는 조욱래의 장인 김종대 전 농림부장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종대는 신동방그룹 창업주의 부인 김영자의 동생이다. 형님 조석래와 동생 조욱래가 신동방그룹을 거쳐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김종대는 3공화국 당시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치열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다. 조욱래는 장녀 조윤경과 삼공개발 홍준기 회장의 아들 홍석융 신라저축은행 전무의 혼사를 통해 정치권 인사와 연결된다. 조윤경의 시아버지는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과 사돈관계다.

조욱래는 효성기계공업·동성개발 등 그룹 확장에 나섰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현재는 DSDL이란 부동산개발임대업체를 통해 프레이저플레이스 호텔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다. 부인 김은주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조홍제의 동생 조성제 전 대전피혁 사장은 정정윤과의 사이에 5남 3녀를 두었다. 3남 조경래는 홍재선 전 전경련 회장의 딸 홍애수와 혼인했다. 조경래의 손윗동서는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차남인 구자승 전 LG상사 사장이다. 4남 조익래는 원용필 전 한국타이어 사장의 딸인 원정선과 결혼했다. 원용필의 형은 원용석 전 경제기획원장관이다. 조성제의 장녀 조정숙은 정종철 전 서울시장의 아들인 정창순과 혼인했다.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는 1978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 아들들에게 휘호를 하나씩 써서 줬다. 조석래에게는 ‘덕을 숭상하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숭덕광업(崇德廣業)을, 조양래에게는 ‘쉬지 말고 힘을 길러라’는 자강불식(自彊不息)을, 조욱래에게는 ‘항상 재난에 대비하라’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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