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리스트', 권력 심장부를 노리다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04.1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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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핵심 나열된 판도라 상자 열려···정치권에 거센 후폭풍 몰아칠 듯

노무현·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도 결국 ‘자살 정국’의 암운이 드리워졌다. 2004년 3월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과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 사건은 당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지난 4월9일 발생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에 따른 충격 또한 이에 못지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권 3년 차를 맞아 자칫 정권의 레임덕으로 직결될 수 있다. 성 전 회장이 작심한 듯 현 정권의 전·현직 실세 등 ‘친박계 주류’ 핵심 인사들과 청와대 인사들을 금품 수수 대상자로 지목했다는 점이 심상찮다. 

정치권은 ‘성완종 리스트’에 숨죽이고 있다. 특히 여권은 바짝 얼어붙었다. 해외 자원외교 비리 의혹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숨진 채 발견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된 한 장의 메모지가 정치권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전체 글자 수 쉰다섯 자가 적힌 이 짧은 메모지는 그 진위 여부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자살자가 죽음 직전 마지막 남기고 간 메모라는 점에서 정치권은 물론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써내려간 쉰다섯 자의 무게가 결코 간단치 않은 까닭이다.

성완종 리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의 면면을 보면 더욱 그렇다. 김기춘·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리스트에 언급된 인물들은 모두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 그룹으로 분류된다. 검찰이 이명박(MB) 정부 해외 자원개발 사업 수사에 급피치를 올리면서 벼랑 끝에 몰렸던 성 전 회장이 현 정권의 핵심부를 향해 비수를 꽂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성완종 리스트의 존재만으로도 박근혜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미 야당은 이번 사건을 박근혜 정권의 최대 스캔들로 규정하고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성완종 리스트가 여권뿐만 아니라 정치권 전체에 거대한 쓰나미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래서 역대 정권을 넘나들며 정·관·재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했던 기업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성 전 회장의 과거 행적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 시사저널 임준선·뉴시스

자살 직전 인터뷰에서 “돈은 내가 직접 줬다”

4월9일 오후 숨진 채 발견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서 발견된 메모지는 10일 현재까지도 검찰이 유족과 언론에 공개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이나 형식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메모지에는 ‘유정복 3억, 홍문종 2억, 홍준표 1억, 부산시장 2억, 허태열 7억, 김기춘 10만 달러’ 등 유력 정치인의 이름과 금액이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경우 ‘10만 달러’ 옆에 ‘2006년 9월26일’이라는 날짜도 명시돼 있다.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완구 국무총리의 경우 금액 표기는 없이 이름만 적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메모지에 나와 있는 정치인과 금액, 날짜 이외에 구체적인 부연 설명이 적시돼 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 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인 9일 새벽 경향신문과 한 전화 인터뷰를 고려하면, 그가 그동안 돈을 준 정치인을 메모 형식으로 요약해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성 전 회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김기춘 전 실장이 2006년 9월 VIP(박근혜 대통령)를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 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면서 “당시 수행비서도 함께 왔었다”고 폭로했다. 그는 당시 돈 전달 경위에 대해 “결과적으로 신뢰 관계에서 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은 허태열 전 비서실장에 대해서도 “2007년 당시 허 본부장(박근혜 캠프 총괄직능본부장)을 강남 리베라호텔에서 만나 7억원을 서너 차례 나눠서 현금으로 줬다”면서 “돈은 심부름한 사람이 갖고 가고 내가 직접 줬다”고 말했다. 그는 ‘허 본부장의 연락을 받고 돈을 줬느냐’는 질문에 “적은 돈도 아닌데 갖다 주면서 내가 그렇게 (먼저 주겠다고 할) 사람이 어딨나. (먼저 주겠다고 하지 않은 것은) 다 안다. (친박계) 메인에서는…”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성 전 회장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 역시 자신이 금품을 제공한 정치인을 요약해 정리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거명된 당사자들은 펄쩍 뛰며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김 전 실장은 “황당무계한 소설”이라고 부인했고, 허 전 실장은 “상상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 외에 거명된 인사들도 “성 전 회장과 한 번 만나고 한 번 통화했을 뿐 친밀하지 않다”(홍준표 경남도지사), “성 전 회장이 공천 부탁했는데 안 들어줘 관계가 나빴다”(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성 전 회장이 (검찰 수사 영향력 청탁을 받아주지 않자) 섭섭해서 그런 것 같다”(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는 등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성완종 리스트'에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기춘(왼쪽)·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 시사저널 이종현·임준선
홍준표 경남도지사, 유정복 인천시장 ⓒ 시사저널 최준필·박은숙

 
“내가 경상도 출신이면 이렇게 잡았겠나”

성완종 전 회장은 MB 정부 시절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250억여 원의 회사 돈을 횡령하고 800억원대의 사기 대출을 받은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신청돼 있던 상태였다. 그는 숨진 채 발견되기 전날 밤에도 다음 날 오전에 열릴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와 관련해 담당 변호사와 상의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전날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열기도 했다.

하지만 성 전 회장은 다음 날 오전 5시10분 유서를 남기고 북한산을 올랐다. 그의 돌연한 자살 결행 배경과 관련해서는 기업 경영권 포기와 사법 처리를 앞둔 상실감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 전 회장의 자살에는 현 정권의 실세인 친박계 핵심 인사들에 대한 배신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성 전 회장은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된 이후 사석에서 만난 지인들에게 현 정부에 대한 배신감을 적나라하게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21일 충남 서산시 음암면에서 열린 자신의 모친 19주기 추도예배식에 참석해 현 정부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시사저널은 당시 추도예배식에 참석했던 성 전 회장의 지인 A씨를 만나 당시 성 전 회장이 격분해서 한 말을 전해 들었다.

기업을 하면서 (사업을 위해) 무리한 일을 왜 안 했겠느냐. 하지만 염치없는 짓은 안 했다. 적어도 이 (해외 자원개발 사업) 건과 관련해서는 (불법과) 무관하다. 5개 기업 컨소시엄이 함께 들어가고 똑같은 규정에 따라 사업을 한 것이다. (내 의지로) 맘대로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나는) 구석에 조그만 덩어리를 하나만 차지했을 뿐인데…. 나온 돈 그대로 회사로 들어가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입질을 하겠느냐.”

A씨는 “당시 성 전 회장이 격분한 채로 억울하다는 심정을 토해냈다”면서 “‘내가 충청도 출신이 아니고 경상도 출신이었다면 나를 이렇게까지 잡았겠나’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표적 수사 대상으로 삼는 데 대해 억울해했다”고 말했다. 특히 성 전 회장은 자신에 대한 검찰 수사에 앞서 표적 사정을 벌이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 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성 전 회장 측은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기 전인 지난해 11월부터 사정기관이 경남기업에 대한 사정 작업을 벌여온 정황을 인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성 전 회장은 지난 3월 중순 검찰의 경남기업 압수수색 등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 대한 비리 수사로 확대될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전 회장과 오랫동안 교분을 쌓아온 충청권 출신의 한 인사는 “당시 성 전 회장은, 자신이 그래도 국회의원 출신으로 오랫동안 현 정권의 실세라는 친박계와 교분을 쌓아왔는데 설마 이전 정권과 연루된 수사에서 자신이 희생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 같았다”고 전했다. 

성 전 회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날인 4월8일 기자회견에서 “2007년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선 후보 경선 때 허태열 전 의원 소개로 박근혜 후보를 만났고, 그 뒤 박 후보 당선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이 공개적으로 박 대통령을 거명한 데서 현 정권의 친박계 핵심 실세, 나아가 박 대통령에 대한 불만과 서운함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에게 갖다준 게 얼만데···”

성완종 리스트의 존재만으로 검찰이 전면적인 수사에 나설 것이라는 데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현행 법률상 정치자금법 위반의 공소시효는 7년이다. 성 전 회장이 언론 인터뷰와 메모지를 통해 밝힌 금품 제공 시점은 2006년 9월과 2007년이다.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된 만큼 검찰이 성완종 리스트와 유력 정치인들의 돈 거래 의혹 수사에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진실 규명이 사실상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완종 리스트의 파장이 권력형 게이트로 비화되면서 현 정권을 넘어 정치권 전반으로 불똥이 튈 가능성도 작지 않다. 성 전 회장은 정·관·재계에 폭넓은 인맥을 두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공개된 리스트에서 친박계 핵심 인사들이 거론됐지만, 향후 성완종 리스트가 업그레이드돼 수면 위로 떠오를 여지가 적지 않다. 2009년 MB 정부 시절 워크아웃 당시에도 권력 실세로 통했던 이상득 의원을 통해 구명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실제 성 전 회장의 또 다른 지인은 “성 전 회장이 과거 사업상 어려움을 겪었을 때 울컥하면서 한 정치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내가 ○○○에게 갖다준 게 얼만데···’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성 전 회장의 폭로가 친박계뿐만 아니라 친이계로까지 전이될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성 전 회장은 충청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 인맥이 넓어 마당발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그는 1980년대부터 기업 활동과 정치 활동을 병행해왔다. 충남 서산이 고향인 성 전 회장은 충청 지역을 근간으로 정치적 기반을 닦아왔다.  그가 2000년 결성한 충청포럼은 충청 출신 경제인뿐만 아니라 정·관계 인사들을 연결하는 통로가 돼왔다. 충청 지역 인사 3500여 명이 참여하는 충청포럼의 면면은 예사롭지 않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정운찬 전 총리 등도 충청포럼 소속이다.

두세 차례의 워크아웃을 거치면서도 성 전 회장이 2조원대의 거대 기업을 일궈낸 배경에는 이러한 인맥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한 지인 A씨는 “성 전 회장은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며 “친화력이 상당히 좋은 사람이다. 도움이 되면 성의를 다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성 전 회장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의 2007년 경선 당시 자금을 지원한 것과 관련해 “기업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면 무시할 수 없어 많이 (지원)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성 전 회장이 죽음을 앞두고 가족과 기업에 대한 수사 확대 등 자신의 사후 벌어질 돌발 사태에 대비해, 성완종 리스트의 ‘완결판’이나 제2의 리스트를 따로 모아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성 전 회장이 2조원대 기업을 운영해오면서 철두철미한 사업 관리를 해왔다는 점에서 본다면, ‘성완종 리스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장부’가 있을 것이란 추론이다. 특히 성 전 회장은 9일 숨진 채 발견된 당일 새벽, 회사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검찰 수사 기록을 챙기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을 결행하면서 굳이 수사 기록을 챙기라고 한 것은 자신이 폭로한 리스트 파문이 그만큼 클 것이란 점을 예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전 회장의 사망으로 리스트의 진위를 가리는 작업은 어렵게 됐다. 그러나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고 말았다. 덮는다고 덮여지지 않는다. 리스트를 놓고 당분간 진실 게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유족에게조차 유품 안 주는 이유 뭐냐”

시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유족이 ‘성완종 리스트’가 담긴 메모지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검찰에 했는데 검찰이 거부했다는 증언이 나와 검찰의 사건 축소 및 은폐 논란이 예상된다. 성 전 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한 인사는 4월10일 충남 서산에 차려진 성 전 회장 빈소에서 기자와 만나 “(성 전 회장이 숨진 채 발견된 후) 9일 유품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검찰 관계자는 해당 메모지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며 “유족에게도 유품을 돌려주지 않는 검찰의 행태에 대해 당시 법적 대응까지 고려했지만, (어제는) 대단한 내용은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내용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정확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유품을 반환하지 않는 검찰의 행태에 대해 유족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검찰은 당시 “메모를 열람이나 복사라도 하게 해달라”는 성 전 회장 큰아들의 요구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장지를 지켰던 성 전 회장의 한 유족은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자 했는데 이런 식으로 검찰이 내용을 밝혀버렸다. 유족들은 정작 내용을 전혀 몰랐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검찰의 메모지 미반환은 빈소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도 문제가 됐다. 기자회견을 진행한 박준호 전 경남기업 상무는 “메모지의 내용을 보지 못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메모지를 달라는 유족의 요구에 검찰은 특별한 이유 없이 줄 수 없다고 거부했고, 우리들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검찰은 4월10일 오전 “9일 저녁 강남 삼성병원 검시 과정에서 성 전 회장 바지 주머니에서 메모지가 발견돼 이를 확보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유족 요청에도 메모지를 반환하거나 복사를 허용하지 않는 검찰의 행보에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측은 검찰의 발표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고 향후 대정부질의 등을 통해 추궁할 계획이다. 새정치연합 관계자는 “경향신문 보도 후 검찰이 갑자기 메모지를 확보했다고 발표한 것, 그리고 메모지를 성 전 회장 시신 발견 한참 후인 9일 저녁 검시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는 것은 검찰이 은폐를 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성 전 회장의 빈소에는 박찬우 전 행정안전부 차관, 정진석 전 국회 사무총장 등이 찾아와 고인을 조문했다. 특히 정 전 사무총장은 이틀 연속 빈소를 찾아 눈길을 끌었다.

충남 서산=엄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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