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뭉치 뿌려 워싱턴에 비단길을 깔다
  • 김원식│미국 통신원 ()
  • 승인 2015.04.2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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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미국 의회 연설에서 ‘진정성 있는 사과’ 안 할 듯

“사실 아베의 이번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 대다수 의원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베가 아주 철두철미하게 이를 전략적으로 준비했을 뿐이다.” 미국 외교 소식통은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이야기의 맥락은 이랬다. 일본은 굳이 미국 의회 모든 의원을 상대로 로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초청자이자 허가권을 가진 존 베이너 하원의장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 그리고 외교 관계 의원들에게만 사전에 치밀하게 로비해 준비를 한 것으로 충분했다.

사상 처음이라는 일본 총리의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이다. 원래 첫 주인공은 과거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인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가 됐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헨리 하이드 하원국제관계위원장은 데니스 헤스터트 당시 하원의장에게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의회 연설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리고는 무산됐다.

3월8일 일본 자민당 창당 60주년을 맞아 연설을 하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아베 총리의 미국 의회 연설은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이해 속에서 성사됐다. ⓒ AP연합
아베가 굳이 사과 안 해도 되는 이유

하지만 이번에는 그 누구도 적극 나서서 반대하지 않았다. 과거의 실수를 되짚어 일본 측에서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4월19일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에이먼 핑클턴이 경제 전문 잡지 ‘포브스’에 실린 칼럼에서 “베이너 하원의장의 결심을 설명해주는 것은 돈”이라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지금 미국 의회는 어느 때보다도 돈에 의해 운영되고 있고 일본만큼 워싱턴 정가에 돈뭉치를 뿌릴 수 있는 나라는 없다”고 설명했다. 타국이 미국 정치권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주식회사 일본’은 자동차와 전자 산업 분야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바탕으로 미국 의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독특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는 게 핑클턴의 설명이다.

사실 일본은 미국 의회에 로비를 할 필요도 없다는 게 정설이다. 이미 ‘지일파’로 불리며 일본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일본 장학생’들이 의회는 물론 행정부와 학계 등에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다. 따라서 과거사 문제에서 역대 어떤 총리보다 후퇴하고 있는 아베가 의회 합동연설을 성사시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 일본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아베 총리를 불러들여야 할 만큼 미국이 처한 국제 관계의 현실은 허약하다. 어찌 보면 급한 것은 아베가 아니라 미국 정책 입안자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굳이 의회 연설에서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나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를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답은 ‘중국’에 있다. 유일한 세계 최강대국이어야 하고 유일한 세계 경찰이어야 하는 미국의 위치에는 최근 빨간불이 들어왔다. 중국의 성장과 강대국화는 미국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그동안 지켜왔던 국가 이익마저도 위협하고 있다는 게 미국의 최근 인식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대표하는 ‘재균형(rebalancing) 전략’이나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라는 말은 그나마 품위 있는 용어다. 사실 “중국을 막아라”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고 말았다. 미국이 아무리 아시아로 회귀하기 위해 중동에 있는 물자들을 가지고 오려 해도 이제는 단독으로 수행할 힘이 없다. 미국의 바람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이를 해달라’는 것이다.

일왕 생일날과 겹쳐…“참전 용사들 분노”

아베 정부는 미국의 이런 상황을 십분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명분은 일본이 다시 앞으로 나갈 기회를 미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바탕이다. 그렇다 보니 과거사 문제에서도 미국의 바람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관계국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라.’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4월22일 질문을 하나 받았다. 미국을 방문하기 전 인도네시아 반둥회의에서 아베 총리가 행한 연설에 과거사에 대한 언급이 없자 한국 정부는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기자가 이에 대해 묻자 대변인은 이렇게 답했다. “(아베의) 연설 자체에 대해 어떤 분석도 하지 않겠다.”

오바마 정부의 바람과 달리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주류 언론은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과거사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를 담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동아시아 전문가들의 칼럼도 넘쳐났는데 대부분 아베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 내부에서도 반발이 나온다. 아베가 연설하는 4월26일은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을 기리는 쇼와의 날이다. 보수 매체 ‘위클리 스탠더드’의 에던 엡스타인 부편집장은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미국의 참전 용사들도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에 앞장섰던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와 ‘시민참여센터’ 등 한인 단체들은 아베 총리의 의회 연설을 반대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13명이 넘는 하원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의회 연설에서 사과와 사죄를 표현해야 한다는 뜻을 주미 일본 대사관과 베이너 하원의장에게 전달했다.

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는 “아베는 이번 미국 의회 연설을 계기로 이제 과거사 문제는 다 끝났다고 둘러댈 것”이라며 “한국 등이 문제를 제기하면 미래로 나가지 않고 과거 문제에 대해 생트집 잡는다고 핑계를 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바라보는 아베의 의회 연설은 비단길이다. “미국이 아베에게 실크로드를 깔아준 격이다”는 것이다.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을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미국의 전략이 성공할지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현지 정세를 무시한 중동 전략 실패의 재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의 확장을 다소 막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을 향해 다시 발톱을 들이밀 수 있는 새끼 호랑이를 키우는 우를 범할 수 있어서다. 큰 호랑이를 잡으려고 새끼 호랑이를 빨리 키우겠다는 전략이지만 어느 호랑이가 미국에 먼저 달려들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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