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하나로 억만 장자 되다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5.05.1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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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 거침없는 질주…주가 400만원, 서경배 회장 국내 부자 2위

지난 5월8일. 주식시장 개장 전 많은 증권 전문가의 시선이 한 회사로 쏠렸다. 한때 주당 400만원을 넘어서며 ‘황제주’로 불렸던 아모레퍼시픽 주식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날은 액면분할을 위해 4월22일부터 거래가 정지됐던 아모레퍼시픽 주식이 재상장되는 날이었다. 과연 아모레퍼시픽의 주가가 재상장 이후에 어떤 흐름을 탈 것인지가 이날 증권가 최대의 화두였다.

증권 전문가들이 황제주의 귀환을 간절히 원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백수오 논란으로 주식시장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아모레퍼시픽이 다시금 주가를 끌어올릴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과연 아모레퍼시픽의 주가가 액면분할 이후에 상승 곡선을 그릴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주당 5000원이었던 아모레퍼시픽 주식은 액면분할을 통해 주당 500원이 됐고, 이에 따라 아모레퍼시픽 주가도 37만6500원이 됐다. 이날 38만6000원으로 시작한 주가는 소폭 하락해 장 마감 때 37만6500원을 기록했다. 증권 전문가들은 이번 액면분할이 아모레퍼시픽 주가에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동안 주당 400만원에 육박하는 높은 가격으로 인해 투자가 힘들었던 개인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퍼시픽이란 회사를 한때 화장품 가방을 들고 다니며 집 초인종을 누르던 ‘방문판매 아줌마’로만 연관 지어 생각하면 큰 오산인 시대가 됐다. 아모레퍼시픽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는 회사로 떠올랐고, 한국 주식시장의 상징적인 종목이 됐다. 한국 경제를 읽는 하나의 코드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 정도로 여겨졌던 아모레퍼시픽이 한국 대표 기업 중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의 혹독한 구조조정이나 2000년대 초부터 불었던 한류 열풍이 그것이다. 여기에 서경배 회장의 리더십도 빼놓을 수 없다. 서 회장이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다.

국내 최대 화장품회사였던 (주)태평양의 서성환 회장은 1997년 3월18일 차남인 서경배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대표이사 겸 사장에 앉히는 인사를 단행했다. 당시 서 사장의 나이는 34세. 30대 초·중반에 불과한 ‘둘째 아들’을 후계자로 점찍어 회사 경영을 맡긴 것은 당시 재계 분위기에서 ‘파격’이었다. 재계와 언론의 시각은 ‘서른네 살 초짜 사장’에 대한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서경배 당시 태평양 사장은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인터뷰 자리에 나왔던 서 사장의 모습은 아버지의 ‘깜짝 인사’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인터뷰했던 기자는 기사에서 서 사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K-뷰티’란 신조어 만들어내다

“(주)태평양의 서경배 사장에게는 ‘신세대’의 냄새가 물씬 난다. 무스로 빗어 올린 머리나 새끼손가락에 칠해진 매니큐어 등, 먼발치에서도 진한 남성용 향수가 번져오는 느낌이다.”

서 사장이 밝힌 태평양그룹의 청사진은 이랬다. “자회사 설립을 통한 신규 사업 진출은 노하우가 분명히 축적됐다고 판단되는 분야에 집중될 것이다. 유명 상표를 독립시키거나 유사 업종 인수·통합(M&A), 벤처기업 투자 등 다양한 방식이 모색될 것이다.”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새끼손가락에 매니큐어를 칠했던 젊은 CEO의 취임 일성은 18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실현됐을까. 그동안 (주)태평양은 아모레퍼시픽그룹이란 회사로 이름을 바꿨고, 서 사장도 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유명 상표를 독립시키거나 유사 업종을 인수하겠다는 서 회장의 계획대로 아모레퍼시픽은 ‘설화수’ ‘이니스프리’ ‘에뛰드’ 같은 독립 브랜드를 내놓으며 화장품 시장에서 다양한 소비자 계층을 공략해나갔다. 이런 브랜드를 선발대로 내세워 해외 시장 개척에도 공을 들였다. 검증된 분야의 사업에만 집중하겠다는 목표대로 패션·뷰티에 집중하고, 태평양정보기술·태평양시스템·동방기획과 같은 다른 분야 계열사들은 대부분 청산하거나 매각했다. 그 결과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더불어 30대 초중반의 초짜 CEO는 ‘K-뷰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화장품업계의 마에스트로로 떠올랐다. 업계에서 서경배 회장의 대표이사 취임 후부터 지금까지를 ‘서경배 시대’ 또는 ‘제2의 창업’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비약적 성장 때문이다.

빠른 성장에는 빛과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서경배 시대의 ‘빛’은 숫자로 압축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동안의 경영 실적은 숫자가 말해준다. 1997년 연매출 8100억, 세계 화장품업계 순위 26위에 불과했던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4조711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미국 패션·뷰티 전문 매체인 WWD가 발표한 2014년 패션·뷰티 기업 순위에서 17위까지 도약했다. 특히 아모레퍼시픽은 전년 대비 매출 신장률에서 20위 이내 기업 중에서는 가장 가파른 15.1%를 기록했다.

회사의 덩치가 커지면서 서 회장 개인의 재산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는 현재 세계 부자 순위 200위 안에 진입하며, 삼성그룹 오너 일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서 회장의 재산 증가는 아모레퍼시픽의 주가 그래프와 궤적을 같이한다.

18년 동안 주가 120배 뛰어

아모레퍼시픽의 주가는 1997년 주당 2만원에서 2만5000원 사이를 오갔다. 4월22일 10 대 1의 주식 액면분할을 발표하기 전까지 주당 400만원을 넘어서는 황제주로 등극했다. 1997년의 주가를 주당 2만5000원으로 단순 계산해도 18년 동안 120배가 뛰어오른 셈이다. 매출액 기준으로 아모레퍼시픽의 재계 순위는 50위권 밖이지만, 시가총액으로 따지면 8위다. 시가총액 순위는 더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증권업계에서는 “그동안 주당 400만원 가까이 되는 주식을 개인투자자가 사기 힘들었지만, 액면분할 이후에는 개인투자자들도 주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고공비행 원동력은 ‘한류 열풍’이란 외부적 요인과 적절한 현지화 전략이란 내부적 요인으로 압축할 수 있다. 특히 K팝과 한국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시작된 한류 열풍이 15억 인구의 중국 시장에 불어닥친 것이 첫 번째 요인이 됐다. 물론 이러한 한류 열풍은 다른 기업에도 똑같은 기회였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유독 이 바람을 잘 활용했다. 아모레퍼시픽 중국 법인의 지난 3년간 연평균 매출 증가율은 28.8%로 글로벌 브랜드 중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아모레퍼시픽이 중국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일까. 아모레퍼시픽 측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도해온 현지화 전략을 우선적으로 꼽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중국 시장 개방이 가속화되기 이전인 1993년부터 선양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중국 시장을 공략해왔다. 선양에서 상하이로 진출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서 회장은 지난해 12월 상하이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1992년에 사업을 시작해 만 10년간 선양에서 사업을 했다”며 “여러 번 상하이로 나오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내실을 충분히 다진 끝에 상하이에 진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라네즈’의 경우 중국 시장 진출에 앞서 3년 동안 사전 시장조사를 하고, 3500명을 대상으로 소비자 욕구를 파악했다. ‘마몽드’는 중국 6대 의과대학과 함께 10년 이상 중국인들의 피부 변화와 특징을 연구했고, 그 결과에 따라 제품과 전략 방향을 수정했다. ‘마몽드’가 판매하고 있는 제품 123종 중 현지 특화제품은 53%에 이른다.

브랜드와 제품을 현지화하는 과정에서 서 회장은 중국을 내 집처럼 오갔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50차례 넘게 선양을 드나들었고, 상하이로 진출한 후부터는 70번 가까이 중국 출장을 다녀왔다. 매년 2~3개월에 한 번씩 중국을 방문한 셈이다.

이 같은 현지화 덕택에 지금 아모레퍼시픽은 한국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선물로 사갈 정도로 친근한 브랜드가 됐다. 중국어 입간판을 내세운 명동 매장들 안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있다. 중국 시장을 바탕으로 서 회장은 시가총액 8위, 세계 200대 억만장자, 주가 400만원이라는 성과를 쌓아올렸다.

아모레퍼시픽이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하고 있지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중국 쏠림 현상에 따른 잠재적 위험 요소는 서경배 회장이 극복해야 할 과제다.

현재 아모레퍼시픽은 사업 대부분의 매출을 화장품 관련 분야에서 올리고 있다. 특히 중국 비중이 매우 크다. 중국 시장에서의 매출뿐만 아니라 중국 관광객들이 국내 시장에서 일으키는 매출까지 포함하면 그 비중이 절대적이다. 중국 시장은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글로벌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아모레퍼시픽이 미주·유럽·동남아로도 시장을 확장하고 있지만, 중국 시장에서 밀릴 경우 그룹 전체의 뿌리가 흔들릴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미 아모레퍼시픽보다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몇몇 글로벌 화장품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서 고전을 하고 있거나, 아예 철수한 곳도 있다. 특히 중국 현지 기업들의 약진이 글로벌 기업의 위기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사업이 화웨이·샤오미 같은 중국 기업들로부터 시장을 조금씩 잠식당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2014년 12월 LG경제연구원 고은지 연구위원과 자오유 연구위원이 함께 발간한 ‘중국 화장품 시장 아직 성장 초기 단계’란 제목의 리포트는 이런 우려가 잘 담겨 있다. 다음은 리포트 내용 중 일부다.

“P&G와 시세이도, 암웨이 등은 중국 내 시장 점유율이 계속 하락하는 추세이며, 프랑스 로레알 브랜드인 가르니에와 미국의 르블론 등 일부 브랜드와 기업들은 이미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거나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해당 브랜드들이 적절한 포지셔닝 등에 실패했기 때문인데, 특히 저가 제품군이 주를 이루는 매스 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매스 시장은 전체 시장 규모의 80%가량을 차지하며, 다수의 중국 로컬 브랜드가 포진해 있다.”

리포트는 중국 로컬 브랜드의 사세 확장이 글로벌 기업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 상황을 놓고 보면 글로벌 브랜드의 퇴조는 아모레퍼시픽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오히려 이런 브랜드들이 빠진 시장을 아모레퍼시픽이 공략해 들어갔다. 하지만 중국 현지 브랜드가 프리미엄 시장을 파고들어올 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지 여부가 향후 중국 시장에서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상하이쟈화·쟈란그룹과 같은 중국 현지 기업이 최근 1~2년 새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기업들은 3~4년 전만 해도 단둥이나 우루무치 같은 3선 도시를 기반으로 성장해왔으나, 최근 들어 베이징·상하이·쿤밍·하얼빈 같은 1, 2선 도시까지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다. 특히 ‘바이챠오’ ‘쯔란탕’ 등 일부 로컬 브랜드는 아모레퍼시픽의 잠재적 경쟁자로 떠오를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다.

중국 ‘토종’ 업체들 추격 만만찮아

서 회장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상하이 기자간담회에서 “중국 업체 상당수가 우리보다 빠르게 성장한다”며 “올해(2014년)를 넘어서면 55%까지 상승할 듯하다”고 분석했다. 서 회장은 그 대비책으로 “고객 요구에 얼마나 빨리 대응하느냐가 현지 기업과의 경쟁에서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설립한 상하이 뷰티사업장도 물류 대응력을 올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서경배 회장이 세계적 기업인이자 거부로 떠오르면서 ‘재벌’ 이미지가 강해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몇 년 전부터 재계에서는 아모레퍼시픽의 사옥 건축이나 부동산 투자와 관련해 잡음이 나돌았다. 다른 재벌 기업들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주식 가치가 폭등한 만큼 후계 승계 과정에서 잡음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앞서 언급했던 LG경제연구원의 리포트는 “중국의 화장품 사용 인구는 아직 10%에 불과하고 주 소비 분야도 다양하지 못해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큰 시장”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은 여전히 아모레퍼시픽에 기회의 땅인 셈이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후발 중국 기업들의 견제를 받고 있는 것처럼, 아모레퍼시픽 역시 앞으로는 현지 기업들로부터 강력한 견제를 받을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은 문화적 가치를 함께 수출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 개선에도 중요하다. 서 회장은 중국 시장을 바탕으로 2020년까지 글로벌 톱5 브랜드로 도약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과연 서 회장이 아모레퍼시픽 브랜드로 한류 열풍을 얼마만큼이나 확장시켜 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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