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람슈타인 기지는 미군 드론의 비밀 아지트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5.06.0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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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 공격 사망 예멘 유족, 독일 정부 상대 소송 국내 언론 최초 시사저널 단독 취재

미군의 드론(무인기)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한 예멘 시민이 독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미국이 아닌 독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쾰른 행정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린 지난 5월27일, 국내 언론사로는 유일하게 시사저널이 그 현장을 직접 찾았다.

오전 10시쯤 재판이 열리는 쾰른 행정법원. 법원 현관 앞에서 우연히 이번 소송을 주도한 인권단체 ‘유럽헌법·인권센터(ECCHR)’의 아나벨 베르메조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원고인 예멘의 파이잘 빈 알리 자베르가 직접 오는지 묻자 그녀는 “예멘 공항이 파괴되고 신변에 위험을 느끼는 상황이라 직접 참석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재판 결과 예상에 대한 질문에 베르메조는 “독일 정부가 갑자기 입장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공판이 열릴 쾰른 행정법원 1호 재판실 앞은 분주했다. 널찍한 홀의 한 구석에 기사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는 기자들, 방송국 카메라, 마이크가 모여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나눈 대화에서 피에르 베커-로젠펠더 쾰른 행정법원 공보관은 “35개 언론사가 취재 요청서를 보내왔다. 이렇게 언론이 큰 관심을 보이는 일은 드물다”며 놀라워했다. 오전 11시, 감청색 법복을 입은 3명의 판사와 2명의 시민 재판관이 입장했다. 촬영이 허락된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예멘 수도인 사나의 벽에 붙은 미군 드론 비판 그림. 독일에서 벌어진 미군 드론 소송(작은 사진)은 람슈타인 기지의 드론 연루설을 기정사실화했다. ⓒ EPA 연합
“미군과 체결한 기지 사용 계약 해지해야”

소송을 제기한 자베르는 2012년 8월29일, 예멘 동부 카샤미르의 한 결혼식에 참석했다. 흥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공중에 미군의 드론이 나타나 다섯 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삼촌과 처남이 즉사했다. 사망한 사람들은 알카에다와는 무관한 민간인들이었다. 결혼식장은 이내 장례식장이 되었다.

자베르가 미군 드론 전쟁의 배후로 독일을 지목하게 된 것은 한 전직 미군 무인기 조종사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브랜든 브라이언트라는 이 조종사는 2012년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간 드론을 조종해 1623명을 살해했다”고 양심고백을 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2014년에는 “내가 참가한 드론 공격은 모두 독일 람슈타인에 소재한 미 공군기지를 거쳐 이뤄졌다. 독일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모든 드론 전쟁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폭로했다. 자베르의 소송장이 독일로 향하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브라이언트의 폭로 이후 탐사보도가 잇따르면서 서서히 드러난 람슈타인 기지의 정체는 놀라웠다. 독일 남부에 위치한 람슈타인 미 공군기지 부지는 1400ha로 미국의 해외 공군기지 중 최대 규모다. 기지 내의 항공우주작전센터(ASOC)에서 복무 중인 군인의 수만 650명, 사용되는 컴퓨터는 1500대에 달한다.

거대한 기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독일의 ‘쥐트도이체차이퉁’지와 영국의 탐사보도 전문 매체인 ‘인터셉트’는 공동 취재 끝에 람슈타인이 “미국 본토의 조종사와 작전지역 상공의 드론 정찰기 사이의 중개소”라고 결론지었다. 무인기가 자료를 보내면 이를 받아서 미국의 드론 조종사에게 보내고, 조종사가 명령을 내리면 다시 이를 받아 무인기로 보낸다는 것이다. 아직 원거리 조종에 기술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중개소는 반드시 필요하다. 람슈타인은 예멘뿐 아니라 소말리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내의 드론 공격 작전에도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베르는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10월 독일 정부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미군이 독일 땅에서 드론 폭격을 중개하고 있으니 독일 정부가 이를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소송의 법적 근거로는 독일 헌법에 명시된 ‘보호 의무’를 들었다. ‘누구든지 생명권과 신체적 훼손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는 독일 헌법 2조 2항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날 공판에서 카스파리-비어초크 부장판사는 이번 소송이 ‘독일 정부가 원고에 대해 보호 의무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원고 측의 죈케 힐브란 변호인은 독일 정부가 예멘인의 생명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독일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부장판사의 질문에 힐브란은 “미군과 체결한 람슈타인 기지의 부지 사용 계약을 해지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피고석에 앉은 독일 국방부 인사 두 명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독일이 미국에 그런 걸 요구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한, 승리를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독일 법원 “기지가 미군 드론 전쟁에 이용”

2012년 1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드론이 투입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무인기 공격을 시인했다. 이후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드론 예찬론을 펼쳤다. 드론 공격은 매우 정확하고, 미군은 목표물에 대한 생포가 불가능할 때나 미국 국민에게 직접적이고 반복적인 위협을 가할 때에 한해서만 드론을 투입한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5월7일에는 예멘에서 아라비아반도 알카에다(AQAP)의 지도부 나사르 빈 알리 알-안시가 드론 폭격으로 사망했다. AQAP는 올해 1월 프랑스의 풍자 잡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의 배후를 자처한 단체다.

국제 앰네스티와 휴먼라이트워치(HRW)는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드론 공격은 전쟁범죄”라고 강력히 규탄했다. 재판도 없이 단지 테러 혐의만으로 용의자를 살해할 뿐 아니라, 억울하게 살해되는 민간인이 테러범보다 훨씬 많다는 이유에서다. 영국의 인권단체 ‘리프리브’는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살생부’에 올린 41명을 드론으로 사살하기 위해 무려 1147명을 죽였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그동안 미국의 드론 전쟁이 소송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카스파리-비어초크 부장판사의 표현대로 빈 알리 자베르의 소송이 “매우 특별한 경우”인 셈이다.

낮 12시30분, 카스파리-비어초크 판사가 휴정을 선언했다. 촬영팀이 다시 카메라를 들고 재판장에 들어왔고, 기자들은 원고 측 대변인과 법원 공보관에게 몰려들었다. 20분 후 재판부가 판결을 내렸다. 독일이 예멘인 자베르의 생명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는 있지만, 반드시 원고가 바라는 방식대로 이 의무를 수행할 의무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패소를 하긴 했지만 뜻밖의 소득을 올린 원고 측은 별로 낙심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독일 법원이 람슈타인 기지가 미국의 드론 전쟁에 이용되고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동안 람슈타인의 드론 연루설을 부정해온 미국과 독일 정부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원고 측은 바로 항소 의사를 밝혔다. 반면 승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 대변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이번 판결을 통해 독일 사회는 ‘미국의 독일 총리 휴대전화 감청’ 사건에 이어 다시 한 번 양국 간 힘의 불균형을 실감하게 되었다. 유럽의 강대국 독일 역시 한국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안보 문제에서는 주권 국가로서 미국과 대등하게 행동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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