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I의 FIFA 수사에 “왜 미국이 나서나” 러시아 강력 반발
  • 김원식│미국 통신원 ()
  • 승인 2015.06.0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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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2018년 월드컵이 미국에서 개최될 경우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이렇게 FIFA(국제축구연맹)를 수사했을까.” 러시아 국민들은 미국 등이 주도해 FIFA를 부패의 온상으로 몰아가는 데 대해 불만이 크다.

5월27일, 미국 연방검찰과 스위스 검찰은 FIFA 전·현직 간부 14명을 전격 체포했다. 비리 혐의에 대한 수사에 격하게 반발한 쪽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다음 날인 28일 TV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이번 수사는 제프 블래터 FIFA 회장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시도”라며 “블래터 회장은 월드컵이 러시아에서 개최되는 것을 금지하라는 외압을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푸틴의 불만에 미국의 대답은 분명했다. “부패 관련 수사일 뿐, 그런 의도는 전혀 없다.” 어쨌든 미국의 수사는 블래터를 축구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5월27일 로레타 린치 미국 법무장관이 국제축구연맹 비리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AP 연합
“러시아월드컵 개최지 바꾸라고 압력”

FBI가 밝힌 수사의 범위는 2011년 FIFA 회장 선거와 2010년 남아공월드컵 개최를 둘러싸고 벌어진 뇌물 수뢰 사건이다. 여기에 2018년 러시아월드컵은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FBI의 칼날은 러시아를 겨냥하고 있다. 미국 사법 당국 관계자는 6월2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2018년 러시아월드컵과 2022년 카타르월드컵 개최지 선정 과정에 관한 의혹도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2010년에 한 번 일었던 의혹이었다. 당시 FIFA는 자체적으로 조사해 발표했는데 뇌물 제공 등 구체적인 부분은 나오지 않았고 경고 수준에서 유야무야된 바 있다. 당시에도 러시아는 “러시아월드컵 개최지를 바꾸라는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며 FIFA의 조사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그런 전례가 있다 보니 미국이 주도하는 이번 조사에 대한 반발은 더욱 거셌다.

미국이 FIFA 간부들의 뇌물 제공 행위가 미국 내 은행을 통해 이뤄졌고 로비도 미국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들어 사법권의 정당함을 말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미국이 스위스 검찰을 이용해 체포 작전을 벌인 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미국의 체포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스위스에서 FIFA 간부들이 체포된 것은 미국의 사법 관할 지역 밖에서 일어난 불법”이라며 “미국은 심판자 노릇을 멈추고 국제법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비난했다.

러시아의 의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정부가 푸틴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2018년 러시아월드컵 개최지를 바꾸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블래터 전 회장이 꿈쩍도 하지 않자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사법권을 동원하고 있다는 게 러시아의 생각이다. 5월27일 미국 연방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러시아 크렘린 산하 ‘시민사회인권위원회’ 위원인 키릴 카바노프는 “미국이 이번 수사에 나선 진짜 이유는 FIFA가 미국 정치인들의 2018 월드컵 개최지 변경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발단은 지난 4월 미국 상원의원 13명이 FIFA에 보낸 서면이었다. “크림반도를 강제로 합병한 러시아가 월드컵 개최국이 되는 것은 푸틴 정권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며 개최지 변경을 요구했다. 하지만 블래터 전 회장은 이 서한을 받은 직후 러시아 소치에서 푸틴 대통령과 만나 “러시아는 이제까지 있었던 것과 비교해 가장 큰 규모의 월드컵을 열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묵살했다. 미국 정부에 블래터가 미운털이 박힌 장면이다.

미국 정부는 이번 수사 과정에서 뇌물 혐의로 신병을 확보한 ‘미국 축구계의 거물’ 척 블레이저와 양형 거래(피고가 유죄를 인정하면 감형해준다는 피고와 검찰 사이의 합의)를 했다. 블레이저는 체포된 14명이 1998년과 2010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뇌물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블레이저는 1997~2013년에 FIFA 집행위원을 지낸 핵심 인사로 블래터의 측근이다. 미국 연방검찰이 그에게서 얻은 정보 중 러시아월드컵 유치와 관련한 것도 있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미국 내에서는 연방검찰이 이들 14명과의 양형 거래를 통해 2018년 러시아월드컵 개최지 선정을 둘러싼 부패 혐의를 밝히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본다. 블래터 전 회장이 전격 사임을 선언한 것은 이같이 치밀한 계산을 읽고 벗어나려 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미국의 칼날이 정말 러시아로 향한다면 블래터의 사임으로만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우크라이나 사태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미국과 뜻을 함께한 서방 국가들은 대(對)러시아 제재에 나서는 등 경제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2018년 월드컵이 러시아에서 열리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볼 수는 없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거꾸로 월드컵 개최에 엄청난 애착을 보이는 푸틴의 의도는 뚜렷하다. 각종 제재에도 러시아는 흔들리지 않으며 오히려 강하다는 점을 러시아월드컵을 통해 보여주려는 심산이다. 하지만 블래터 전 회장이 사임하면서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도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사실이다. 아카디 드로브코비치 러시아 부총리가 “이번 FIFA 사태가 러시아와 카타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러, 월드컵 준비 위해 죄수 동원 고려

당장 3년밖에 남지 않은 러시아보다는 카타르가 도마에 오를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예상이다. 하지만 개최지 변경까지는 못 하더라도 러시아월드컵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순 있다. 그리고 미국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미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어가는 중이다. 반면 푸틴 대통령이 가진 대응 카드는 옹색해 보인다.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내건 미국의 공격 앞에 블래터 전 회장을 비롯한 러시아 지지파가 초토화되고 있지만 이를 막을 수단이 마땅치 않다. 이 과정에서 임원진이 전면적으로 바뀌고 러시아월드컵 개최에 관한 메가톤급 비리가 드러난다면 개최지 변경 요구가 일거나 러시아월드컵을 향하는 지구촌의 시선이 싸늘해질 수도 있다.

경제 제재로 고통을 겪고 있는 러시아 상황도 푸틴에게는 골칫거리다. 45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으며 12개 주경기장을 완성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하나만을 완성했다. 러시아월드컵 대표팀 감독의 임금조차 못 주고 있다는 폭로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예산이 눈덩이처럼 늘어나자 러시아 의회는 월드컵 공사 현장에 죄수들을 투입하는 방안까지 고민하고 있다. 힘겨운 경제 상황 속에서 월드컵을 통해 러시아의 힘을 보여주려던 푸틴, 그런 푸틴을 용서할 수 없는 서방 국가들의 물밑 싸움이 FIFA를 통해 분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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