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세 자매, 죽음을 공유하다
  • 배상훈│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프로파일러) ()
  • 승인 2015.06.16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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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시스템 붕괴가 낳은 비극…타살 의심할 여지 없어

 

부지불식간에 한반도를 강타한 ‘메르스’라는 쓰나미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혼란과 공포 그 자체이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에 아연실색할 뿐이다. 바이러스 확산 공포보다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갑자기 붕괴되는 듯한 공포가 우리를 더욱 떨게 만든다. 메르스에 가려졌지만, 시스템 붕괴의 공포와 관련해 우리 사회가 깊이 주목해야 하는 끔찍한 사건들이 최근 빈번해지고 있다. 바로 ‘가족 붕괴’ ‘가족 살해’의 여러 징후들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지난 5월 경기도 부천에서 발생한 세 자매 변사 사건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사건 자체를 형해화하면서 자살이냐, 타살이냐 논란으로 ‘미스터리’화하고 있다. 자살로 결론 내린 경찰 수사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타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세 자매의 동반 자살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동반 자살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은 다른 많은 가족 살해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 사회 가족 시스템, 더 나아가 사회 시스템의 붕괴 징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에서는 가족 붕괴의 가장 큰 지표로서 ‘세대 단절’ ‘가족 기능의 소멸’ ‘가족 (갈등) 스트레스의 폭력화’ ‘가족 구성원의 소외’ ‘하층 계급의 게토화(투명인간화)’ 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 사회 시스템의 붕괴 조짐은 이 사건처럼 가족 (범죄) 살해로부터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 일러스트 정찬동

부천 세 자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보통의 사회적 관계에서 단절돼 우리 사회에서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함께 살던 30세 안팎(셋째 33세, 넷째 31세, 막내 29세)의 세 자매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이유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세 자매는 ‘우울감의 공유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별·연령별 특이성을 볼 때 특히 10대 중반부터 30대 미혼에 이르기까지의 여성들은 감정 공유 능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때문에 이 사건에서와 같이 세 자매가 각자의 절망을 공유하면서 일종의 공명 현상을 일으켜 우울감이 증폭되었고 결국에는 유사한 방법을 통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두 명이 어떤 이유에서든 힘든 처지에 놓여 각각 우울감을 느끼더라도 외부와 관계를 맺은 나머지 한 사람이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통해 감정을 공유했다고 하면 이런 방식의 동반 자살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세 자매의 경우, 각기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가 유사하고 이 과정에서 친밀한 감정 공유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자신도 혼자 남을 수 없고 상대방도 혼자 남겨둘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수순으로 스스로 각자 죽는 것보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면서 죽음마저 공유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각에서 말하듯 일종의 ‘미스터리’에 대한 것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 외부인의 침입 흔적이 없고 같은 집에서 모친이 자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세 자매 모두의 목에 본인이 아닌 타인이 목을 조른 손자국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당연하다. 또한 막내가 목이 졸려 사망한 후 다른 두 언니들은 어떻게 2분 정도의 시차를 두고 투신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자살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그 답을 개인의 우울증 정도와 상대적 빈곤 정도에서 찾으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5월25일 경기도 부천시의 한 아파트에서 세 자매가 숨진 채 발견됐다. 세 자매 중 두 명이 투신한 아파트 주차장 지붕이 뚫려 있다. ⓒ 연합뉴스

따로 죽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

가난해서, 그리고 실직으로 인한 우울증 탓에 자살한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면, 이는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모든 책임을 가난하게 태어난 개인이나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개인에게 지우는 과오를 범할 뿐이다. 본질적으로 이 사건이 가지는 미스터리와 의문들을 풀 비밀의 열쇠는, 바로 이 세 자매가 준거하는 ‘가족 구조’와 ‘가족 행동’에 있다.

세 자매의 부친은 오래전에 사망했고, 가족으로는 동거하는 모친과 결혼해서 출가한 두 언니가 전부다. 다른 친척들과도 소원했고, 거기다가 세 자매 모두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셋째만 최근 취업 경험이 있었고, 넷째와 막내의 경우 직장생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나마 셋째도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월급 160만원을 받고 10여 년간 일하다가 최근 실직했다. 물론 넷째와 막내의 직장 기록이 없다는 의미가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그냥 실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장기간의 아르바이트 인생을 의미할 것이다. 미래가 없는 비정규직의 삶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하층 계급은 경제적·시간적·문화적 이유로 인해 사회관계가 대부분 단절돼 파편화된 소수자로 겨우 살아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이들은 보통의 공간에는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존재인 것이다. 물론 과거에는 그 공간을 가족 혹은 지역사회라는 공동체가 대신하거나 채워주었지만, 이제는 가족이라는 공간도 이미 세대끼리 단절되고, 정서적·경제적·문화적·심리적 기능에서도 단절되었다고 봐야 한다. 결국 껍데기뿐인 가족의 틀 정도만 남아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이 사건에서 세 자매는 어머니와 출가한 언니들로 대표되는 윗세대와 단절되었다. 사실 어머니나 첫째, 둘째 언니도 자기 살길이 바빴을 것이다. 분명히 오래전에 세 자매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머니나 언니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없고, 그럴수록 이들 셋은 서로가 똘똘 뭉쳤을 것이다. 같은 처지가 결국 더욱 깊은 감정 공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감정 공유는 여중생이나 여고생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른바 소울메이트로서의 여중생·여고생 친구 사이는 친자매나 부모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얘기를 하면서 감정을 공유한다. 그래서 흔히 손잡고 화장실도 같이 가고, 별 내용도 없는 카톡 문자메시지를 날리면서 밤을 새우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동화되는 이런 현상은 자존감이 낮은 소수자들에게 더 흔하고 깊게 나타난다. 이런 관계가 특정한 단계를 넘어서면 같은 물건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 고통까지도 공유하는 상태에 이른다. 그래서 상대방의 고통이 결국 나의 고통이 되는 것이고, 결국 이 사건과 같이 형식적으로는 타인을 죽이는 것이지만 실제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는 생명을 빼앗는 행동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너무나도 서로를 아껴서 동시에 같이 떠나고자 하는 것이다.

부천 세 자매 동반 자살 사건의 경우에는 동시성이 중요한 개념이다. 셋이 동시에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당면 목표인 것이다. 그래서 셋이 서로 목을 조르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어떤 이들은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반문한다. 어떻게 세 명이 원을 그리면서 서로 목을 조르는 것이 가능하냐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 셋은 각기 다른 하나를 따로 생각하지 않고 셋이서 한 생명체처럼 생각했을 것이기에 이런 자살이 가능했다.

중산층 이하에서 가족 시스템 붕괴 직전

따로 죽는 것은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서로 가장 아끼는 사람들과 동시에 같이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약을 이용할 수도 없는 것이고, 같이 투신하는 것도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서로 목을 조르다가 가장 약한 막내가 먼저 죽었다. 결국 막내만 죽고, 남은 두 언니는 서로 목을 조르다가는 한 명이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남은 방법으로 더 용기가 있는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먼저 가게 도와주고, 이후에 본인도 따라 죽은 것이다. 오히려 세 자매가 동시에 목이 졸린 채 같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필자는 분명 타살을 의심했을 것이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셋째와 넷째가 동시에 추락했다고 하면 이 역시 타살을 의심했을 것이다. 자살 행동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일부 정신과 전문의가 말하는 것처럼, 이런 동반 자살이 사전에 계획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서를 작성했다는 것은 오랜 시간 고민한 흔적을 나타내기 때문이라는 게 그 주장의 근거다. 실제 세 자매는 각자 한 장씩 ‘사는 게 힘들다. 화장해 뿌려 달라’는 등의 내용이 적힌 유서를 남겼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세 자매가 동반 자살하는 상황과 혼자 자살하는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는 단견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의 심경에 대해 비교적 여러 가지 얘기를 한다. 반면 이 사건의 경우에는 두어 줄 정도만으로 지금의 상태와 시신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언급만 할 뿐이다. 혼자 자살하는 경우와 극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자기 혼자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감정을 공유하고 있던 사람들과 같이 떠나므로 굳이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 자매가 처했던 가족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개인에 대한 분석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이들이 처해 있던 가족 내의 상황이 중요한 것이다. 왜 세 자매는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처럼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족 시스템은 적어도 중산층 이하에서는 붕괴 직전이다. 시스템의 모순이 중첩돼 지금은 그 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를 타자(他者)로 인식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 지표가 가족 범죄의 폭발적인 증가인 셈이다. 그래서 부천 세 자매 동반 자살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본질적으로 읽어내고, 그에 대비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생존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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