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44. 외교독립이냐, 무장투쟁이냐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7.0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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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 노선 갈등…아직도 사대주의 명맥 이어져

정치에는 노선이 중요하다. 한 나라가 어느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1910년 망국 후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국가 건설 노선은 공화주의였다. 여기에 바로 한국 독립운동의 가치가 있다. 복벽(復)주의로 불렸던 왕정 복고주의자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해방 후 세울 새 나라는 대한제국의 부활이 아니라 민(民)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으로 만들자고 설정한 것이다. 이런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노선을 두고 둘로 갈렸다. 하나는 ‘외교독립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장투쟁론’이었다.

무장투쟁론자 “상해서 무슨 독립운동을…”

외교독립론은 미국·영국 등의 외교적 후원에 힘입어 독립을 이루자는 노선이었고, 무장투쟁론은 군사를 양성해 결정적 시기에 독립전쟁을 벌여 해방을 이루자는 노선이었다.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외교독립론은 결국 우호적인 외세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자는 노선이고, 무장투쟁론은 내부 역량으로 나라를 되찾자는 노선이었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 직후부터 내분에 휩싸인 것도 노선 차이 때문이었다. 이승만과 정한경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 위임통치 청원서’를 보낸 것이 문제였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25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미국의 윌슨에게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2000만의 이름으로 각하께 청원하나니… 먼저 한국을 일본의 학정하에서 벗어나게 하여 장래 완전 독립을 보증하시고 아직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하에 두게 하시옵소서”라고 요청했다.

1921년 1월1일 상해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요원들이 정부 수립 3년을 맞아 새해 기념촬영을 했다. ⓒ 뉴스뱅크 이미지

당시 미국에 사는 친구의 편지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은 신채호는 박은식·김창숙과 함께 펑펑 울었다. 김창숙은 “물론 왜인(倭人)의 한국 침략이 분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을 미국의 위임 통치하에 넣겠다고 하므로… 우리 3인이 통곡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3인은 이승만씨를 임정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경향신문 1962년 3월2일자)라고 회고하고 있다. 신채호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라고 이승만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당시 외교독립론은 임정의 단합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였다. 임시정부의 소재지가 상해였던 것도 문제였다. 무장투쟁론자들은 일제와 무장투쟁이 가능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이 가능한 만주나 러시아령 연해주에 임시정부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만주에서는 3·1운동 직후 만주 자치 운동과 무장투쟁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이상룡(李相龍·1858~1932년)을 총재로 추대해 군정부(軍政府)를 설치했다. 이상룡의 ‘행장’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만주에 주재하던 한인들이 일제히 유하현의 고산자에 모여서 혈전 준비를 의논하고 남정섭과 송종근을 공(이상룡)에게 보내서 이 일에 대해서 아뢰었다. 이에 군정부를 설립하고서 공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공은 사양할 수 없어서 드디어 부임해서는 여준을 부총재로 삼고 이탁을 참모장관으로 삼았다. 밖으로는 한족회를 설립하여 총관(總管)·검독(檢督) 등의 직(職)을 두어 지방자치를 관리하게 하였다. 청년을 대규모로 모집하여 속성으로 (군사)훈련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상해의 임시정부는 여운형을 만주에 파견해 군정부의 임정 합류를 요청했다. 만주 인사들 사이에 큰 거부감이 일었다. 만주 무장투쟁론자들 사이에는 상해에서 무슨 독립운동을 하느냐는 의견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상룡이 “(상해에 정부를) 이미 세웠으니 한 민족에게 어찌 두 정부가 있을 수 있으리오”라면서 ‘정부를 상해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군정서(軍政署)라 하여 독판제를 채용했다’(‘행장’)고 전하는 것처럼 상해에 정부를 양보했다. 그래서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편해서 최고 책임자인 독판에 이상룡을 선임했다.

“외교와 내정보다는 군사와 재정이 더 중요”

이 무렵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가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안창호는 ‘외교와 내정(內政), 재무와 군사가 임정의 4가지 대단(大端)’이라면서 의견을 구했다. 즉 임정의 정책 우선순위는 ‘①외교 ②내정 ③재정 ④군사’라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임정의 첫 번째 노선인 외교독립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외교 상황입니다. 이것은 가장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으로 현재 구미(歐美) 지역에는 여론이 하나가 되어 우리를 지지하고 일본을 배척하고 있는데, 공리(公理)와의 싸움에서는 여론이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곧 개최될 국제연맹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승기를 잡아 칼자루를 쥘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괄적인 말이고, 구체적인 교섭은 이미 영국·미국과 상당한 양해를 얻어놓았으니 머지않아 어떤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안창호의 편지를 부치다’)

그러나 이는 외교독립론자들이 국제 상황을 오판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국제연맹은 창설 당시부터 일본이 영국·프랑스·이탈리아와 함께 상임이사국이었고, 게다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다. 미국은 1905년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서 일본의 한국 점령을 비밀리에 승인했고, 영국은 이보다 이른 1902년 일본과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영일동맹의 제1조는 ‘영국은 청(淸)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며,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에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미국과 영국이 일본과 싸워서 한국을 독립시켜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었다.

두 번째의 ‘내정’ 또한 교민들이 극소수인 상해에서의 내정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창호도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만한 행정이 없습니다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안창호는 이 편지에서 연통제를 통해 국내에 파견한 특파원 등의 보고에 고무된 듯 “두세 곳의 보고에 의하면 국민들의 마음이 갈수록 고양된다고 하니 곧 다시 모종의 형식의 제3차 표시가 있게 될 것 같으나 그 역시 아직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상해에 정부 소재지를 두고서 국내에서 다시 만세 시위 같은 것이 발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재정’ 문제도 교민이 없는 상해에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안창호는 네 번째로 ‘군사’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무장투쟁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상해에서 군사 계획이 있을 수가 없었다. 다만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정식 명칭이었던 만주의 참의부(參議府)가 스스로 임시정부 직할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활발하게 펼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만주 참의부의 독자적 역량이었지 상해 임정의 역량은 아니었다.

이상룡은 답변에서 “제 생각으로는 이 일은 외교로 시작해서 혈전으로 마치는 것으로서 이는 특별히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외교독립론을 선택한 임정의 노선을 직접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독립은 ‘혈전으로 마친다’는 무장투쟁론의 방침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상룡은 안창호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삼가 합하께서는 지금부터 앞에서 정하신 네 가지 대단(大端) 중에서 조금 순서를 바꾸어 제4항을 제1항으로 하고 제3항을 제2항으로 삼아서 이 일에 전력을 경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이른바 제1항과 제2항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잘 성취되리라고 봅니다.”(‘안도산 창호에게 드리다’) 즉 임정의 ‘①외교 ②내정 ③재정 ④군사’의 순서를 ‘①군사 ②재정’의 순서로 바꾸면, 외교와 내정은 ‘저절로 잘 성취’되리라는 권고였다.

6월21일 윤병세 외교부장관(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아직도 외교정책에서 강대국 눈치

임정의 어려워진 재정 문제는 당시 미주에 머물러 있었던 임정 대통령 이승만의 탓도 있었다. 이승만은 임정 대통령에 선임된 직후인 1919년 5월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만들었는데, 이는 임시정부 외교위원부와는 별도의 조직으로서 임정 직제에 없는 사조직이었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둔 목적은 미주 교포들이 내는 애국 후원금을 상해 임정에 보내지 않고 자신이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재정이 부족한 임정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에서 “구미위원부가 미주에서 정부 재정을 관장하면서, 임시정부가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던 미주 동포사회로부터의 재정 수입에 차질을 가져와 재정상의 타격이 컸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항상 구미위원부의 폐지를 요구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구미위원부는 임정의 재정을 크게 위축시켰다.

그래서 1920년 5월 임시정부 국무차장 회의에서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하기도 했다. “상해에서 무슨 독립운동을 하느냐”고 여기는 무장투쟁론자들이 당시 상해와 미주의 재정 다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승만은 상해로 부임하지 않다가 임정의 거듭된 촉구를 받고 1920년 12월에야 상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1921년 5월까지 불과 6개월 동안 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1919년 4월 대통령에 선출된 후 1925년 3월 의정원에서 탄핵돼 해임될 때까지 6년 동안 상해에는 고작 6개월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해방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달성하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이 되는 성취를 이뤄냈다. 그럼에도 아직도 외교정책에서는 강대국의 눈치를 심하게 보는 ‘약소국’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했으면 그에 따른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입었던 사대주의라는 작은 옷을 성인이 되어서도 입고 있으니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일본과 위안부 문제 등을 놓고 대립하다가, 정작 일본은 큰 태도의 변화가 없는데도 한국은 ‘미래’ 운운하면서 유화적으로 돌아서서, 한국 외교가 웃음거리가 되지나 않을까 우려스럽다. 이제 사대주의를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주인으로 놓는 자주적 시각으로 외교 문제의 질적 전환을 이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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