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33. 김준기 회장 아들 부인은 차병원 이사장 손녀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7.0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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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7선의 김진만 전 국회부의장

“20세 초반에 100만 달러를 번 사람은 기업인으로서 일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선박왕 오나시스)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을 부리다 간 사람 여기 누웠노라.”(카네기 묘비명) 위 두 문장이 1968년 당시, 20대 초반이던 한 젊은이의 가슴을 뛰게 했다. 무일푼으로 창업에 나선 젊은이는 숱한 난관을 딛고 대그룹을 일궈냈다. 그 주인공은 동부그룹 창업자인 김준기 회장이다. 동부그룹은 창업자가 현재까지 오너로 있는 드문 경우다.

1969년 세운 미륭건설이 동부그룹 모태

김준기는 1944년 12월,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김진만-김숙자의 5남 3녀 중 둘째다. 부친 김진만은 7선 의원에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제헌의원과 참의원을 역임한 김진구 선생, 광복 직후 국민촉성회 비서장을 지낸 김진팔 선생이 김진만의 형들이다. 김준기는 정치인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다른 길을 걸었다.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2009년 5월10일 김준기(오른쪽에서 두번째) 동부그룹 회장이 선친인 김진만 전 국회부의장 3주기 추도식에서 가족친지들과 추모비를 제막하고 있다. 왼쪽부터 임주웅 전 동부생명 사장(매형), 김흥기씨(동생), 김명자 여사(누나), 김남호 동부금융연구소 부장(아들). ⓒ 동부그룹 제공

누구나 그렇지만 인생의 전환점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다. 군 복무를 마치고 고려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준기는 1968년 미국을 방문했다. 전자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전자업계 미국 우수 인재 유치단에 뽑혀 미국 견학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버드 대학, 컬럼비아 대학 등과 전자업계를 돌아보며 김준기는 강대국 미국의 실상을 보았고 대한민국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기업’의 힘을 본 것이다. 1968년 어머니 김숙자가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김준기는 유학 계획을 접고 본격적으로 창업을 결심했다. 김준기가 처음에 관심을 가진 분야는 ‘관광’이었다. 미국에서 라스베이거스·디즈니랜드 등을 둘러보며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 리조트를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설회사·운송회사 등을 창업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수중에 돈이 없었다.

부친 김진만은 아들이 사업을 하는 것에 반대했다. 유학을 갔다 온 후 공부를 계속하길 바랐다. 자금을 지원해줄 리 만무했다. 김준기는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주변 지인들에게 구상을 밝히며 돈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빌린 돈이 2500만원이었다. 김준기는 이 돈으로 1969년 미륭건설(동부건설의 전신)을 세웠다. 창업 첫해 매출은 9200만원이었다. 미륭건설이 업계에 존재를 알린 사업은 연세대 이공대 건물 공사였다. 독일 정부가 연세대학에 100만 달러(당시 돈으로 약 4억5000만원 정도)를 기부해 시작된 이 공사는 당시 국내 건축공사로는 규모가 제일 컸다. 당연히 유명 건설회사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설립된 지 불과 2년여에 지나지 않고 실적도 변변치 않은 미륭건설이 수주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준기는 도전했다. 70여 차례나 연세대 관계자들을 찾아가 설득했다. 하청을 주지 않고 직접 짓겠다는 전략도 강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경쟁 입찰을 통해 수주에 성공함으로써 미륭건설은 일약 도급 순위 30위 내로 도약했다.

 

2008년 유동성 위기 이후 경영 악화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 입찰을 따낸 것은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입찰 결과 1위를 했으나 내정가보다 낮은 금액에 낙찰을 받아, 실제 공사를 진행할 경우 1000만 달러 이상을 손해 볼 상황이 되어버렸다. 수주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금액 추산을 잘못한 업보였다. 김준기는 “당시 나는 죽고 싶었다. 중동 진출과 성공의 꿈은 사라지고 늪에 빠졌다는 생각에 피사의 사탑 앞에서 양주를 마시고 탑에 올라가 뛰어내리려고 작정했었다”고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발주처를 다시 찾아가 설득해 재입찰을 성사시켰고 내정가보다 2000만 달러나 높은 금액으로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를 따냈다. 총 공사비는 단일 공사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4800만 달러였다. 이 공사에서만 1600만 달러를 남기며 김준기는 대도약했다. 김준기는 1976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 현지 시무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적자를 본다는 것은 가난한 우리나라가 거꾸로 귀중한 외화를 들여 부자 나라 사우디에 집을 지어주는 것과 같다. 우리가 1달러라도 낭비하면 그만큼 조국에 대한 배신이다. 공사 원가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김준기가 예상을 뒤엎고 주베일 공사를 따낸 것을 계기로 이때부터 한국 건설업계의 본격 해외 진출이 시작됐다.

‘동부(東部)’라는 이름은 1971년부터 사용됐다. 동부고속이 설립될 때다. ‘도전과 개척’(東) ‘안정과 풍요로움’(部)을 상징한다. 1989년 미륭건설을 동부건설로 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룹 이름으로 쓰기 시작했다. 김준기는 사업을 ‘뒤따라가는 사업’ ‘같이 가는 사업’ ‘앞서 가는 사업’ 세 가지로 구분하고 금속, 화학, 건설·물류, 금융 등 4대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동부투자금융·동부화재·동부익스프레스·동부제강·동부한농 등을 잇달아 설립하며 1990년 재계 순위 20위권에 진입했다. 창업한 지 20년 만이다. 2000년에는 10위 안에 들었다.

김준기는 사업을 하면서 공과 사를 구분했다. 정치헌금을 할 때는 회사 돈이 아니라 개인 돈으로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이회창 후보 캠프에 지원한 30억원도 회사 돈이 아니라 자신의 주식을 팔아 마련했다. 출신 학교나 동창회에 기부금을 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 태풍 루사로 강원도 지역이 피해를 입었을 때도 자신의 돈 20억원을 의연금으로 기부했다. 매일경제가 펴낸 <1등 기업의 비밀>에 따르면, 김준기는 회의나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좋아한다고 한다. “나는 항상 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왔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 최종 결정권자가 내리는 결정은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혹시 내 결정이 독단적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는 항상 회의를 소집해 안건으로 상정하고, 집중적인 토론 과정을 거쳐 얻은 결론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독선 방지, 스피드 경영, 전원 참여, 벽 허물기가 실현된다.”

동부그룹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유동성 위기를 맞으며 구조조정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동부제철·동부특수강·동부익스프레스·동부발전당진 등이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동부하이텍도 매각이 추진되고 있다. 현재 동부그룹은 동부화재를 중심으로 한 금융 계열사와 동부대우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제조 계열사 두 축으로 운영되고 있다.

1973년 9월7일 김종필 국무총리, 김진만 국회부의장, 김영삼 신민당 부총재(왼쪽부터)가 타워호텔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 뉴스뱅크 이미지

김 회장 처가는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 집안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부친 김진만 전 국회부의장은 1954년 제3대 민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7선 국회의원을 지낸 현대 정치사의 거물이다. 국회 상공위원장,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내고 1973년 3월 재적의원 215명 중 199명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국회부의장에 선출됐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데 역할을 한 ‘공화당 4인방’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낚시협회장을 지낸 그는 평소 “큰 바늘은 어떤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말로 큰 정치를 해야 한다는 신념을 표현하곤 했다. 김진만은 부인 김숙자와의 사이에 5남 3녀를 뒀다.

김준기의 누나인 장녀 김명자는 임주웅 전 동부생명 사장과 결혼했다. 한국자동차보험 전무와 동부생명보험 사장을 지낸 임주웅의 부친은 국내 최초의 치약회사인 동아특산약화학 임형복 회장이다. 임주웅의 형 임주용은 중앙투금 부사장을 지냈는데 동국제강 장상태 전 회장의 막내 동생인 장복혜의 남편이다. 김명자-임주웅 부부는 1남 2녀를 뒀는데 아들 임준석의 장인인 윤호중은 흥아해운 창업주 윤종근의 아들이다.

김진만의 둘째 자식이 장남인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다. 김준기의 부인 김정희는 삼양그룹 창업주 김연수의 장남 김상준 삼양염업 전 회장의 2남 3녀 중 둘째 딸이다. 김연수는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동생이다. 김상준의 동생이 고려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이다. 김정희의 오빠는 김병휘 한양대 명예교수다. 김준기와 김병휘는 중·고등학교 동기 동창이다. 김정희의 여동생 김정림의 남편은 윤천주 전 문교부장관의 아들인 윤대근 동부CNI 회장이다. 윤대근은 1970년대 초반부터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김준기-김정희 부부는 1남 1녀를 뒀다. 딸 김주원은 김효일 옛 해동화재 부회장의 장남 김주한과 결혼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김주원은 일본 게이오 대학에 유학 중이던 김주한과 1997년 약혼했는데 당시 동부와 해동화재 오너가 사돈을 맺는다고 해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김주한은 미국의 메릴린치증권사에서 자산운용사로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준기의 아들인 김남호 동부금융연구소 부장은 2005년 6월 차경섭 차병원 이사장의 손녀이자 차광렬 차병원그룹 회장의 장녀인 차원영과 결혼했다. 누나 김주원이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줬다. 경기고-미국 웨스트민스터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김남호는 미국 워싱턴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MBA)을 마친 후인 2009년 동부제철 차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농업 부문 계열사인 동부팜한농에 근무하다가 지난 4월 동부금융연구소로 옮겼다. 재계에서는 동부금융연구소가 동부그룹 금융 계열사의 사업 전략을 수립하고 신사업을 개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동부그룹이 향후 금융을 중심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농심·동국제강 등 재계와 혼맥 연결

김준기의 여동생인 김명희는 ‘여성의 전화’ 창립 멤버다. 김희선 전 열린우리당 의원 등 여성운동가들과 친분 관계가 남다르다. 김명희는 김준기의 고교 동창인 김평우 변호사와 결혼했다. 김평우는 <등신불>로 유명한 소설가 김동리의 아들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김준기의 첫째 남동생은 국회의원을 지낸 김택기다. 미국 미주리 주립대 정치학 박사인 김택기는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의 딸인 이양희 성균관대 교수와 결혼했다.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 사장을 지내고 2000년 16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 김택기는 2006년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2008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 후보가 됐으나 선거운동 도중 금품 살포 등이 적발돼 후보직을 사퇴했다. 2013년에는 제일저축은행 유동천 전 회장으로부터 2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양희는 2011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동부증권·동부건설 부사장을 지낸 김준기의 둘째 남동생 김무기는 이종진 전 서울대 문리대학장의 딸인 이지은과 혼인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김준기의 셋째 남동생 김흥기는 동생 김희선의 소개로 교사인 오남선을 만나 연애결혼했다. 현재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김준기의 막내 여동생 김희선의 남편은 농심홀딩스 신춘호 회장의 차남인 신동윤 농심홀딩스 부회장이다. 김희선은 새언니인 오남선의 소개로 신동윤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준기의 막내 남동생인 김형기는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김준기의 인척 가운데 주목되는 이는 외삼촌인 고 김형배 전 동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1932년 강원 삼척에서 출생한 김형배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상공부 상역국장, 공업진흥청장, 한국공업표준협회장, 한국소비자보호원장,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94년 동부에 합류해 제조부문 회장, 상임고문을 지냈다. 부인 김혜숙과의 사이에 아들 김한수, 딸 김이정·김이원을 뒀다. 사위 최철순은 한림대 강동성심병원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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