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것을 사랑하라, 그리고 저항하라
  • 조용신│뮤지컬평론가 ()
  • 승인 2015.07.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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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 막 오른 퀴어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

6월2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제16회 퀴어문화축제의 대표 행사로 꼽히는 퀴어 퍼레이드가 열렸다. 퀴어 퍼레이드는 뉴욕·런던·시드니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 6월 말~7월 초 사이에 성소수자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차별 금지를 촉구하는 거리 행진으로, 을지로에서 명동에 이르는 도심 코스에서 열렸다. 행사 전날 미국 연방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헌 판결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행사장에는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를 비롯해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13개국 대사관과 단체, 기업 부스가 설치됐고 3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 최대 인원이 참가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일부 보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이른바 ‘혐오 세력’의 맞불 집회 등 실력행사도 이어져 여전히 한국에서 동성애를 둘러싼 갈등의 골이 깊다는 걸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처음으로 열렸던 200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초연된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Bare The Musical)>이 우리나라에서 때맞춰 막을 올린 것도 그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미국의 보수적인 가톨릭계 고등학교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 동성애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그렸다.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또래 사이에서도 손가락질을 받는 성소수자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룬 용기 있는 작품이다. <렌트>와 유사한 록 혹은 팝 오페라로 불리는 실험성도 갖추고 있다.

ⓒ 조용신 제공

청춘 로맨스 뮤지컬 계보 잇는 작품

이 작품의 중심 캐릭터인 동성애자 커플은 외유내강 성격의 피터와 학내에서 남녀에게 모두 인기가 많은 활달한 제이슨인데 두 사람은 비밀 연애 중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관계를 커밍아웃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떳떳하게 살고 싶은 피터와 달리 벽장 속에 성 정체성을 숨겨 차별을 피하고 부모님의 기대와 친구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유지하고 싶은,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려는 제이슨 사이에 갈등이 시작된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학내에서 가장 외모가 뛰어난 여학생인 아이비는 그 외모 때문에 질투와 시기를 한 몸에 받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소심해졌는데 제이슨을 짝사랑하게 된다. 아이비를 짝사랑해 그녀를 스토킹하는 맷을 포함하면 이들 사이에 사각관계가 형성된다.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인 또 다른 여학생 나디아는 제이슨의 이란성 쌍둥이지만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다. 그녀는 아이비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자신의 깊은 상처를 감내하는 인물이다. 결국 이 작품은 세상에 현존하는 갖가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소수자들과 고교 시절 한 번쯤은 고민해봤을 법한 콤플렉스, 그리고 사랑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극이다.

이 작품은 학내 뮤지컬 공연이라는 극 중 극을 통해 학창 시절의 쾌활함을 전달한다는 면에서 대표적인 청춘물인 <그리스>를 현대에 오마주한 <하이 스쿨 뮤지컬>(2006년), 그리고 이를 게이 버전으로 표현한 청춘 판타지극인 <Were the World Mine>(2008년)으로 이어지는 2000년대 청춘 로맨스 뮤지컬 장르의 계보를 잇고 있다. 세 작품 모두 셰익스피어의 작품(<로미오와 줄리엣> <한 여름 밤의 꿈>)을 학내 공연으로 올리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파트너가 바뀌는 소동극의 요소를 첨가했다.

하지만 <베어 더 뮤지컬>의 한국 공연이 이런 장르의 계보와 원작의 주제의식을 우리 무대에 잘 표현했느냐는 점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느껴진다. 주인공인 피터의 고뇌와 상황은 원작에서처럼 어느 정도 표현되고 있지만 제이슨은 진심을 가진 동성애자라기보다는 호기심에 양성애를 즐기며 고민의 흔적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스타일만 남은 평범한 킹카로 그려진 느낌이다. 그렇다 보니 1막의 마지막인 제이슨과 아이비의 섹스 장면은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멜키어와 벤들라의 섹스 장면과는 다르게 선정적이며 그 이후에 동성애자라면 응당 고민해야 할 여성과의 잠자리에 대한 후회나 자책과 같은 자아성찰의 기회가 부족하다. 외모가 뛰어난 아이비는 상황 설정은 되어 있지만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어 캐릭터의 내면을 관객이 선험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극 전반에 나타나는 학생들의 일탈 행위는 현실에 비해 낡은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이 초연된 게 2000년이니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서구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파티룩으로 이미 퀴어문화가 자리 잡은 상태라 극 중에서 퀴어문화를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는 청소년들의 마약과 음주 파티는 단지 보여주기를 위한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 조용신 제공

배우들의 호연과 무대 활용 돋보여

그럼에도 호연을 보여준 배우들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특히 피터 역의 윤소호는 높은 비중을 담당하며 안정적인 연기와 노래를 보여주었고, 나디아 역의 이예은은 몸에 꼭 맞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자칫 지나칠 수 있는 또 다른 편견을 과하지 않게 소화했다. 샨텔 수녀, 클레어, 마리아 등 다역을 소화하며 특유의 위트감으로 신스틸러의 역할을 해내는 백주희의 무대 장악력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연강홀의 무대 높이를 활용한 커다란 성당 세트와 그 뒤에 배치한 8인조 라이브 밴드는 배우들이 중심이 돼 이끌어가야 할 무대에서도 적절하게 장면을 전환하며 다양한 공간 활용을 느끼게 해주었다.

<베어 더 뮤지컬>은 프로덕션의 전체 비주얼과 음악의 역할,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등 최근에 개막된 비슷한 규모의 뮤지컬에 비해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성애 드라마 혹은 판타지 사이에서 어정쩡한 포지션을 취해 막연한 사랑 이야기로 포커스가 흐려진 부분은 못내 아쉽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민낯의 주제 전달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이 시대에 용기 있는 작품이다. 화장기 없는 그 자체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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