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 몰아주기로 ‘누워서 돈 먹기’
  • 송응철 기자 (sec@sisapress.com)
  • 승인 2015.08.05 18:02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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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들 규제 대상 비켜나…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활용

 

최근 중견그룹의 일감 몰아주기 실태가 대기업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내 상위 100대 그룹사 중 일감몰아주기법 규제 대상에 포함된 상위 49개 그룹사보다 하위 51개 그룹사에 규제 대상 계열사 수가 더 많고, 내부 거래 비중도 높다는 내용이다.

중견그룹 내부 거래 더 심각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 건 지난해 2월 일감몰아주기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해당 법률은 규제 대상 기준을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 총수 일가가 지분 30%(비상장사 20%)를 넘게 보유한 기업이 200억원, 또는 매출의 12% 이상 내부 거래를 할 경우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는 신규 내부 거래만 제동을 걸고 기존 내부 거래에 대해서는 1년간 적용을 미뤄왔다. 대기업들이 ‘시정’할 시간을 준 셈이다. 이후 대기업들은 저마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썼다. 여기엔 계열사 간 사업 구조 재편이나 회사 청산, 지분 매각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됐다.

ⓒ 시사저널 포토

이런 가운데 올해 2월 개정안이 본격 시행되고 공정위가 본격적인 조사에 나서면서 중견기업과 대기업의 차이가 극명해졌다. ‘데드라인’이 다가오자 규제 탈피를 위한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공정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대기업 계열사 상당수가 규제 대상에서 벗어났다. 이 과정에서 편법이 동원됐다는 지적도 제기됐지만, 일감몰아주기법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뒀다는 의견이 많았다.

반면, 규제 대상에서 빠진 중견그룹 계열사들은 일감 몰아주기 논란에서 비켜나 있었다. 이로 인해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부의 증식과 대물림이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총수 일가의 부당 이익 편취 관행을 막겠다는 일감몰아주기법의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비판과 함께 자산 5조원 미만 기업들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함께 나오고 있다.

자생력 없는 ‘식물계열사’는 어디?

실제 중견기업들의 일감 몰아주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시사저널 조사 결과 그룹의 ‘양분 공급’ 없이는 생존 자체가 어려운 회사가 적지 않았다. 일감몰아주기법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51개 중견그룹 계열사 가운데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30% 이상이면서 내부 거래율이 50%를 넘는 이른바 ‘식물계열사’가 많았다. 일감몰아주기법 시행령에 따르면 지주사의 경우 그 자회사·손자회사·증손회사 간의 거래에서 발생한 매출액은 과세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들여다보지 않았다.

중견그룹 중에서 식물계열사가 가장 많은 곳은 오뚜기였다. 오뚜기라면·상미식품·알디에스·오뚜기제유·오뚜기SF 등이 여기에 포함됐다. 눈여겨볼 대목은 온 가족이 한 회사씩 맡아 둥지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그룹 내에서 내부 거래 비율과 규모가 가장 큰 오뚜기라면은 함태호 오뚜기 명예회장(10.93%)과 그의 아들 함영준 오뚜기 회장(24.7%)이 지분 35.63%를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 4716억원 가운데 99.5%에 해당하는 4695억원을 내부 거래를 통해 올렸다. 사실상 그룹 계열사에 매출 전체를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전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이 회사의 내부 거래율은 2013년 99.4%(총매출 4602억원-내부 거래액 4578억원), 2012년 99.3%(4425억원-4394억원), 2011년 98.7%(3893억원-3844억원) 등이었다.

또 다른 계열사인 상미식품은 함태호 명예회장의 동생 함창호 상미식품 회장이 지분 46.4%를 가지고 있다. 이 회사는 그룹의 지원 사격 없이는 지속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지난해 매출 734억원 중 98.2%인 720억원이 그룹 계열사들과의 거래에서 발생했다. 이 회사도 과거 비슷한 수준의 내부 거래율을 유지했다.

알디에스는 함영준 회장(60%) 외에 그의 조카인 함영제씨(20%)가 주주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내부 거래율은 84%(63억원-53억원)였다. 이외에 함영준 회장이 지분 26.52%를 보유한 오뚜기제유의 내부 거래율은 82.1%(697억원-572억원), 함영준 회장(14.41%)의 아들 윤식씨(38.53%)가 최대주주인 오뚜기SF는 64.2%(225억원-145억원)였다. 결국 함영준 회장을 중심으로 부친과 숙부, 아들, 조카 등 온 가족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셈이다.

SPC그룹에도 식물계열사가 2곳 있다. 샤니와 호남샤니가 그곳이다. 샤니는 허영인 SPC그룹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가 지분 90.2%를 보유한 오너 회사다. 호남샤니의 오너 일가 지분율은 61.6%다. 그러나 나머지 38.4%를 샤니가 가지고 있어 사실상 총수 일가의 개인 회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배구조는 물론 매출 구조도 비슷하다. 샤니와 호남샤니는 지난해 매출 전체가 그룹 계열사에서 나왔다. 이들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각각 2140억원과 590억원 수준이었다.

한일시멘트그룹 계열사인 세원개발도 전량에 가까운 매출을 그룹 계열사들이 책임져왔다. 허동섭 한일시멘트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서연씨(50%)와 차녀 서희씨(47.5%), 부인 김천애 여사(2.5%) 등이 지분 100%를 보유한 이 회사가 지난해 계열사와의 거래를 통해 올린 매출은 523억원에 달했다. 넥센타이어그룹의 넥센L&C도 지난해 80% 이상의 내부 거래율을 기록했다. 강병중 넥센타이어 회장(40%)과 장남 강호찬 넥센타이어 사장(10%)이 전체 주식의 절반을 쥐고 있는 넥센L&C의 내부 거래 비율은 83.8%(524억원-439억원)였다.

대한전선 계열사 대한시스템즈와 일진그룹의 일진파트너스는 내부 거래율이 70%대다. 대한시스템즈의 지난해 내부 거래율은 79.7%(585억원-467억원)였고, 일진 파트너스는 74.3%(19억원-14억원)였다. 애경그룹의 에이텍과 신안그룹의 그린씨앤에프는 내부 거래율이 60%대다. 이들 회사는 지난해 매출의 60.6%(506억원-306억원)와 60.2%(333억원-200억원)를 내부에서 올렸다. 사조그룹 계열사인 사조시스템즈와 사조인터내셔널은 내부 거래율이 50%대로 나타났다. 이들 회사는 지난해 매출의 56.5%(126억원-71억원)와 53.7%(192억원-103억원)를 ‘집안’에서 올렸다.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은 6월17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해 “내부 거래 실태 조사를 조속히 마무리해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행위가 확인되면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오너 일가, 손쉽게 곳간 채워

식물계열사들이 외부 일감을 수주하면서 내부 거래 비중이 감소한 경우가 있었지만, 집안에서 나오는 매출을 줄이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견그룹 오너 일가는 이를 통해 별다른 노력 없이 손쉽게 곳간을 채우고 있다. 현금 배당은 보너스다. 부의 대물림을 위한 창구로도 활용할 수 있다. 그간 재벌가에선 후계자 소유의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줘 덩치를 키운 후 이를 이용해 그룹 전체를 물려주는 승계방식을 애용해왔다. 앞서 언급한 식물계열사 가운데서도 이런 정황이 포착되는 회사가 있다. 오뚜기SF와 세원개발, 사조인터내셔널, 사조시스템즈 등이다.

오뚜기SF는 오뚜기그룹이 그동안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경영권을 대물림해왔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함태호 명예회장은 지주사인 오뚜기 지분 17.5%를 보유해 여전히 지배구조의 정점에 서 있다. 하지만 장남인 함영준 회장에게 사실상 회사를 물려준 상황이다. 선대의 지분을 차례로 넘겨받는 수순만 남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함영준 회장 역시 장남 윤식씨에게 집중적으로 주식 자산을 물려주며 장남 중심의 후계 구도를 굳혀가고 있다. 현재 윤식씨가 보유한 오뚜기 지분은 2.04%다. 이 집안 3세들 중 가장 많은 규모다. 윤식씨는 올해 25세다. 하지만 회사 안팎에선 그가 가업을 물려받으리란 점에 이견이 없다. 재계에서는 이 과정에서 오뚜기SF가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세원개발도 비슷하다. 다만 한일시멘트그룹의 후계 구도는 아직 불분명한 상태다. 그러나 허동섭 명예회장은 경영권과 별도로 서연·서희씨 두 딸에게 보유 지분을 물려줄 예정이다. 세원개발에 대한 그룹 차원의 지원 사격은 물론, 이 회사가 부동산 투자에 활발히 나서고 있는 배경도 지분 승계를 위한 재원 마련 차원으로 풀이된다.

사조그룹은 현재 지배구조 개편이 한창이다. 이 과정에서 주진우 사조그룹 회장의 장남인 주지홍 사조대림 총괄본부장의 경영권 승계가 가시화되면서 그가 최대주주인 사조시스템즈와 사조인터내셔널이 주목받고 있다. 재계에선 이들 회사가 향후 ‘합병 카드’로 사용되리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사조시스템즈와 사조인터내셔널이 지주사인 사조산업의 지분을 각각 1.97%, 6.78% 보유하고 있어서다. 이들 회사와 사조산업이 합병할 경우 주지홍 본부장은 사조산업에 대한 지배력을 대거 확보할 수 있다.

이미 승계 작업에 동원된 식물계열사도 있다.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의 장남 허정석 일진홀딩스 사장이 지분 100%를 보유한 일진파트너스가 그곳이다. 이 회사의 지난해 내부 거래액은 14억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전을 돌아보면 상황이 다르다. 일진파트너스는 2010년 34억원을 시작으로 2011년 90억원, 2012년 136억원 등의 매출을 또 다른 계열사인 일진전기로부터 올렸다. 이렇게 마련한 재원을 바탕으로 2013년 허진규 회장이 보유한 일진홀딩스 지분 전량(15.27%)을 매입했다. 이로 인해 일진파트너스의 일진홀딩스 지분율은 9.37%에서 24.64%까지 높아져 일진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오르게 됐다. 허정석 사장이 세금 한 푼 들이지 않고 그룹 전체를 지배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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