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의 ‘사각지대’
  • 박상희 인턴기자 (.)
  • 승인 2015.08.12 19:09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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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자료 입수·분석…성범죄 사건의 경우 2차 피해 및 악용 소지 제기돼

 

2013년 10월26일, 경기도 가평군의 한 펜션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회사 동료 4명으로 구성된 한 모임의 술자리였다. 이들은 밤새 술을 마셨고 다음 날 새벽 5시쯤이 되어서야 자리는 정리됐다. 먼저 술에 취한 두 사람은 방에 들어갔고, 남은 고 아무개씨와 박 아무개씨(24·여)는 함께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됐다. 그러던 중 사건이 발생했다. 고씨가 잠에서 깨어난 후 옆에 자고 있던 박씨의 팬티 속에 손을 넣어 유사강간을 한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12월1일 새벽 4시쯤 인천 부평구의 한 모텔에서 이 모임이 다시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도 역시 고씨가 박씨를 유사강간했다. 박씨는 고씨를 고소했고,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은 지난 5월 인천지방법원에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이날 배심원 7명은 첫 번째 시도에 대해서는 무죄, 두 번째 시도에는 유죄 평결을 내렸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해자 박씨가 범행 당시 공포·당황 등으로 인해 즉시 항의하지 못했고, 피해자가 피고인과 계속 같은 회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모임에도 줄곧 참석했을 가능성 등을 고려해 두 건 모두 유죄로 판결했다. 이에 피고인 고씨에게 징역 2년형을 내리고 40시간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했다.

영화 중 강제 철거 현장에서 아들을 잃고 경찰을 죽인 현행범으로 체포된 철거민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윤진원(윤계상)이 배심원들 앞에서 변론하고 있다. ⓒ (주)시네마서비스

성범죄 피해자, 법정에서 ‘2차 피해’ 심각

최근 영화 <소수의견>이 국민참여재판을 소재로 다뤄 화제가 됐다. 감정에 호소해 배심원을 설득하는 이른바 ‘참여재판꾼’인 검사, 재판 도중 배심원단이 단체로 손을 들어 질문을 요청하는 모습 등은 국민참여재판이 이뤄지는 실제 법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사법 민주화를 목표로 시작된 국민참여재판이 2008년에 도입된 이래 올해 8년째를 맞았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대법원의 관련 자료에 따르면, 국민참여재판은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전체 대상 사건 가운데 4.3%에 해당하는 총 3624건이 접수됐고, 1464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법원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배제’하거나 피고인 측이 신청 이후 마음을 바꿔 ‘철회’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전체 2만1397건 가운데 1.3%에 해당하는 271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배심원의 의견 반영 정도를 보여주는 배심원 평결과 최종 판결의 일치율도 92.8%를 기록했고, 배심원 양형 의견과 선고 형량의 차이가 1년 이내로 비슷했던 재판은 89.3%에 달했다.

이렇듯 국민참여재판이 형사재판 방식의 하나로 자리매김해가고 있지만, 사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이 제도를 추진할 당시만 해도 우려가 많았다. 국내 정서에 부합하는지와 배심원의 판단 능력, 평결의 기속력(처분에 부여되는 구속력) 여부 등을 두고 논란이 지속됐다. 시사저널은 지난 8년간 진행되어온 국민참여재판의 문제점과 현주소를 짚어보고자 판사, 변호사, 배심원들 및 법학 교수와 관련 단체 관계자 등을 다양하게 만나 의견을 들었다. 그런데 그들을 통해 들은 내용 중 유독 성범죄 사건과 관련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실제 본지가 입수한 자료에도 성범죄 사건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의 경우 배심원 평결과 실제 판결의 불일치율이 11.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는 평균 불일치율인 7.2%를 웃도는 수치다. 뿐만 아니라 재판 특성상 피해자가 배심원 앞에서 진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와 그에 따른 부담 때문에 구체적 진술을 어려워 한다는 점, 그리고 배심원들의 감정에 호소해 무죄평결을 유도하는 등의 악용 가능성이 있음도 드러났다. 실제 일부 성범죄 피의자들은 이런 점 때문에 변호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국민참여재판을 원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 일각에서 나도는 “성범죄 피의자는 국민참여재판이 유리하다”는 소문은 실제로도 맞는 것일까.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재판을 통해 피해자의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2차 피해란 범죄 사건 이후 수사 과정 등에서 벌어지는 형사 사법기관의 부적절한 대응, 주변 사람들이나 여론 등이 보이는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 반응에 의해 피해자가 정신적·사회적으로 받는 또 다른 피해를 말한다. 실제 국민참여재판 법정에서는 재판에 반드시 필요한 판사·검사·변호사 등과 별도로 10명 내외의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피해자를 바라보고 있다. 피해자는 낯선 그들 앞에 노출된 채로 잊고 싶은 그날의 범죄 현장을 상세히 진술해야 한다. 이는 피해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다. 사건이 작은 지역사회에서 발생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2013년 한 지역사회에서 일어난 친부에 의한 성폭력 사건 재판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방이슬 한국성폭력상담소 상근활동가는 “이런 경우 피해 사실이 작은 지역사회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심리적 부담감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4월 한 성추행 사건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에 배심원단으로 참여했던 이유진씨(36·여)는 “피의자 쪽에 가림막을 설치해 피해자와 만나지 못하게 했다”며 “피해자가 증언을 하는 과정에서 많이 힘들어하고 울먹였다”고 전했다.

이씨는 “피의자와 피의자 측 증인 모두 논리적으로 말하기보다 감정에 호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8월까지 성범죄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 평결과 판결이 불일치한 건수는 28건이었는데, 그중 26건에서 배심원은 무죄, 재판부는 유죄를 주장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악용 가능성이 있음에도 변호사들 사이에선 오히려 “성폭력 사건은 배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재판 결과를 고려해보면 국민참여재판이 피고인 입장에서 결코 유리한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수의 국민참여재판을 맡아온 신민영 국선변호사는 “성폭력 사건 피고인들이 국민참여재판을 강력히 요청해도 설득해 막았다”며 “사건 특성상 정황 증거가 중요한데 이를 배심원이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며, 일반인들이 싫어하는 죄명이라 편견이 작용할 수도 있다. 성범죄는 특히 피고인의 기억 왜곡이 심해 피해자일지 모르는 사람에게 2차 가해를 할 가능성이 있고 이 모든 것이 유죄 선고 시 형량을 강화하는 요인이 됨을 고려했을 때, 최종적으로 피고인에게 결코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부담 호소해도 재판부 강행하기도”

법원 역시 성범죄 사건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은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2012년 1월17일 법 개정에 따라 성범죄 피의자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더라도 피해자가 이를 원하지 않을 경우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배제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일 뿐 강제성이 없어 재판부 판단에 의해 재판이 그대로 진행될 여지가 있다. 앞서 언급한 ‘2013년 친부에 의한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거절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이슬 상근활동가는 “피해자 입장에서 부담감을 호소해도 재판부가 하겠다면 할 수밖에 없다”며 현행법의 보완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함철환 인천지방법원 판사는 “피해자가 거부하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만, 재판부가 피해자에 대한 인격권 침해가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그대로 진행한다”고 말했다. 김대현 대법원 홍보심의관도 “배제 사유가 추가되면서 성범죄 국민참여재판 건수가 줄어들었다”며 “단순히 성폭력 범죄라고 해서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제돼야 된다고 보긴 어렵다”고 밝혔다.

국민참여재판은 성범죄(16.7%) 외에도 살인(26.4%), 강도(18.3%), 상해(5.1%) 등 다양한 범죄 유형을 다룬다.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 정착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지미 민변 사무차장은 “초기 시행 후 ‘아니다’ 싶었으면 범위 확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소요되는 많은 시간과 비용, 진행 절차, 기속력 여부 등을 둘러싸고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신민영 변호사는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원을 위한 프레젠테이션도 준비해야 되는 등 ‘품’이 많이 들어 쉽지 않다”며 “진행 방식을 좀 더 표준화하고 평결에 구속력을 갖게 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승흠 국민대 공법학전공 교수는 “현재는 잠정적 제도에 불과하므로 기속력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법관에게 자문만 하는 형식으로 계속 제도를 운영하는 건 낭비”라고 전했다.

 

 

배심원은 “무죄”, 재판부는 “유죄” 


2008년 도입 이래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 평결과 실제 재판부의 판결 일치율은 92.8%에 달하는 것으로 시사저널이 대법원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서 밝혀졌다. 이 수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재판부가 부담을 느끼고 배심원 의견을 적극적으로 참작하고 있음을 뜻하며, 사실상 재판부와 배심원의 판단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이는 시행 초기 불거졌던 배심원 평결의 권고적 효력과 배심원의 판단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는 숫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일치율에 가려진, 불일치했던 105건(7.2%)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김지미 민변 사무차장은 이 수치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이 중 대다수인 97건이 배심원은 무죄, 재판부는 유죄를 주장한 사례여서 문제는 더 심각하다고 말한다. 보통 피고인 측은 재판부가 유죄를 선고할 수도 있으나 일반인 시각에서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기대될 때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다. 실제 피의자들이 노렸던 대로 배심원의 무죄 평결이 나왔는데도 앞서 언급된 97건처럼 재판부가 평결을 뒤집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와 동일한 상황에서 배심원의 무죄 평결을 뒤집은 적이 있는 함철환 인천지방법원 판사는 “진짜 ‘무죄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배제하려면 어느 수준까지 유죄가 입증돼야 하는가를 일반인이 알기는 어렵다”며 배심원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건 힘들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형사재판의 대원칙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에 배치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김지미 사무차장은 “무죄인지 유죄인지 의심스러울 때는 무죄를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배심원들이 무죄를 내릴 정도면 의심할 여지 없이 무죄”라며 “결국 판사의 뜻대로 결정할 것이라면 굳이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가며 왜 국민참여재판을 해야 하나라는 비판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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